무지(無知)

2021-12-07 0 By 커피사유

대학(大學)에 들어오고 그래도 이제 비로소 학생 구실이라도 할 수 있게 된 나는 계속 무언가를 배워 나가면 배워 나갈수록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만 느낀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나에게는 무지란 더없이 부끄러운 것이며 한없이 부담스러운 것이고 스스로를 끝없이 원망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고야 말았다. 대학에서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고 기숙사의 작은 몇 평의 방에서 그나마 고시원보다야 넓은 면적에 감사하면서 룸메이트와 1여년을 동고동락하니까 이제 남은 것은 나 자신과의 대면 뿐이어서, 이제 나는 지난 1년 동안 내가 마주한 것은 지식도 타인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나 자신이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어느 글에서 나는 대학에 서 있는 것은 교수도 학생도 아닌 이념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념만이 대학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념이 서 있는 대학 앞에 나 자신도 서 있다. 어느 공동체든 내가 속한 한 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은 분명히 거기 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는 지금 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앎의 최전선이라고 부르면 될련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등교육기관이라는 이름 하에 지난 수십년 동안 수많은 사상이 거쳐가고 사람이 거쳐간 다름아닌 대학이다. 수많은 사상과 사람이 거쳐갔기 때문에 그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한 나 자신은 더욱이 그들 앞에서 나 자신이라는 거대한 추상과 마주하게 된다. 대학의 이념과 사람 앞에 서서 괴상하게도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과 사람 앞에서, 그것들 모두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 것이다.

비어 있다. 아무 것도 모른다. 확실한 것 하나 없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며, 무언가 나 자신의 의미 자체를 찾기도 어려운 비어 있음이 여기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명제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란 오류를 피하기 위한 판단의 중지 밖에 없으며, 따라서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겠는데 속으로는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야 말겠노라고 욕구를 불태운다.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남은 수명을 여기에 바치겠노라고 어리석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거짓된 명제를 향하도록 나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나는 아는 것 없는 나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다. 나는 무지와 열려 있는 광활한 장과 끝없이 이어져야 할 겸손, 그리고 공포에 떨고 있는, 스스로의 무지에 잡아먹히고 스스로의 무능에 잡어먹혀 공포에 떨고 있는 나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모르는 나를 나는 대면하는 것이다. 무지와 무능에 잡아먹혀서 떨고 있는 나는 시험이라는 하나의 방어 기작에, 따라서 나의 무능과 무지에 대한 전면적인 공포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나 자신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에 떨고 있기 때문에 방황하고 방황해서 다시 공포에 떠는 그런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니던가.

어디서부터 나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무지와 무능 속에 나 자신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이 방황 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공포의 악순환 속에서 나는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 무지 때문에 나는 여기에 다시 서 있고 묻는 것이다. 수많은 이념과 사상가들이 거쳐간 대학의 땅에 서서 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