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 무능 · 시간과 나의 수학(修學)
대학의 강의가 열리고 한창 수업을 듣는 요즘, 학부 Lab Internship까지 같이 해서 수치모델 연구실에 자리 하나를 얻어 인턴십 생활까지 하게 되면서 시간이 남아 돌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무능과 무지의 공포가 내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무능 · 무지의 공포의 손아귀 위에서 시간의 부족함이 더 세게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매우 비효율적으로 하는 것인지, 나의 기억력이 아주 형편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력이 바닥을 기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보통 대학의 강의를 하나 들으면 강의를 들은 시간의 평균 2배 ~ 8배에 해당하는 시간을 그 강의 하나를 복습하고 각종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데에 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를테면 〈인간생활과 경제〉라는 강의가 약 1시간 정도 진행된다고 하면, 이 강의 1시간 분량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노트에다가 대략 2시간 ~ 8시간 동안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단지 끄적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기는 하다.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 교수에게 필요한 경우 질문도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면 그것을 또 끄적거리면서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또는 갸웃거리면서 다른 질문이나 답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 과정은 시간이 더럽게 많이 들기 때문에, 이제 학부 연구실 인턴십까지 같이 하자니 시간이 별로 안 남아돌아서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 공부 방법의 효율성을 조금 더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그런데 나는 ‘효율성을 올린다’고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방법이 자칫하면 ‘학습의 심도’를 저해시킬까봐 걱정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학문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가자고 이 대학의 땅 위에서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것이라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던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내가 저 텍스트의 맥락과 내용, 그리고 교수의 강의 내용 – 그리고 그와 연계된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들의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나에게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의 공부 방법이 가장 효율이 좋은 방법인가, 하고서 묻고 있지만 이는 동시에 심도 깊은 공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심도 깊음’ 속에서도 모종의 개선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 하고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지금 이 글을 적게 된 계기란 1시간 15분짜리 경제학 강의를 듣고 4시간 동안 그 내용을 정리하다가 지쳐버렸기 때문에 연구실 인턴 활동의 과제인 IPCC 6th Asessment Full Report Chapter VII를 읽다가 그것마저도 지쳐버렸기 때문 아니었던가.
인턴 활동과 대학의 강의는 나에게 스스로의 무능과 무지를 끊임없이 증명하게 해준다. 인턴 활동을 하면서 대학원생분들, 그리고 교수님들과 담화를 나누다 보면 나는 학부생에 불과한 나 자신이 아는 것이란 거의 없다는 것을 매번 깨닫게 되면서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겨우 참아낸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알아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아니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는 위로 차원의 격언도 있기는 하지만 –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아니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다. 무능도 부끄러운 것이다. 애초에 나의 이상이 그리는 자아, 그리고 현재의 자아 이 두 가지의 불일치는 나에게 있어 크나큰 고통의 원천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호기심이라는 하나의 욕구에 이끌려 무지와 무능 그리고 시간의 얽매임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려고 한다. 고통과 허무는 이제 나에게 있어 니체가 말하는 〈자기-초극〉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 광활한 무지와 무능의 영역에서 아주 일부에 불과한 것들을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 모든 것을 다 사진찍듯이 기억하지 못해서 여러 번 되풀이해줘야 겨우내 기억할까, 말까 하는 그러한 쓰레기통에다 냅다 버려버리고 싶은 기억력, 그리고 바보같이 여러 번 보고 또 배워야 겨우내 이해하는 역시 최악의 이해력으로 – 앎과 할 수 있음의 영역으로 전환해가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사실 무지와 무능의 영역은 거의 무한하기 때문에 나의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라 속삭이는 허무가 분명히 존재함을. 그러나 나는 결과로 계속 향하려는 나의 눈을 과정으로 돌려야만 한다. 내가 비효율적으로 나아가고 있어도 그 더럽게 느린 전진으로부터 나는 아직까지 살아있음을, 나의 삶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역동적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하니까…….
젠장할. 언제쯤 나는 스스로에 대한 변명과 불평불만을 중단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나의 학문은 아직도 멀었다. 지천에 널려 나를 미칠 듯 끌어당기는 무지와 무능의 손아귀, 그리고 시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삶이 더 비틀거리며 나아가야 하는 그 거리보다도 더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