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반대로서 니체 그리고 도가(道家)
지금으로부터 대략 반년 전이었다. 여름 방학 기간이었고, 한참 잘 풀리지 않는 연구실 일로 모종의 정신적 환기를 위한 새로운 토양을 찾고 있던 때였다. 2023학년도 2학기 때 들어두었던 〈철학으로 예술 보기〉 강좌에서 게임의 예술성에 관한 미학계의 가장 선두에 있는 논의들을 직접 확인하고, 나름대로의 주장을 정리하여 소논문까지 써 본 참이어서 그랬는지, 당시 나는 그 이전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몇 가지 게임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물론 직접 플레이하는데는 일말의 재능이 없는 나로서는 (그리고 실제로 한다고 해도 절망적인 운동 · 반사 신경 덕에 난이도를 아주 극단적으로 낮추지 않는 이상은 클리어할 수도 없었을 것이지만) 주로 게임 리뷰를 하는 사람들의 평가를 찾아보고 어떤 연출적 장치들을 사용해, 어떤 서사를 풀어냈고 따라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쪽에 주로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인 솔즈(Nine Sols)》라는 게임 플레이와 리뷰 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 때 처음으로 피어오른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을 〈Nine Sols · 도가(道家) · 니체〉라는 글에 정리해두었다.
그 당시 내가 던진 주요한 질문 중 하나는 도가(道家) 사상에서의 주장이 니체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지의 여부였다. 다음의 구절을 보자.
다자이 오사무와 불교 그리고 도가 사상 일체를 전적으로 ‘하강은 물론이고 상승 국면에서도 하강을 기도하거나 택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타협과 이해의 여지 없이 거부하려고 했던 나의 고집이 꺾이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다. 지금 나는 도대체 선과 악은 애초에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한 도가 사상과 다자이 오사무가 심취했던 불교, 즉 동양 철학 일체에서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어떻게 규정했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호기심이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선과 악이 구분될 수 없다는 사상이 니체가 주장한 주지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에서부터 ‘놓는다는 것’이 ‘포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고집과 편견의 벽이 무너짐에 따라 밀려들어오는 물음표의 파도 위에서 나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다.
커피사유, 〈Nine Sols · 도가(道家) · 니체〉 中
이 궁금증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2024학년도 2학기, 그러니까 지금 학기에 〈동양철학의 이해〉라는 과목을, 더 들을 필요 없는 교양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수강하는 결단을 내렸었다. 기말고사 기간, 즉 이제 학기가 마무리에 접어드는 지금, 나는 이제 그 과목들에서 내가 살펴본 여러 제자백가들의 사상과 도가의 대표 주자인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대표 사상들을 돌아볼 때 이제 당초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었음을 알게 된다.
“니체와 도가 사상은 반대이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며 내가 〈동양철학의 이해〉 과목의 기말 보고서로 제출하려는 「니체와 《장자》의 ‘자기 극복’ 대조」라는 글의 전문을 보이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지만, 아직 제출되어 평가되지도 않은 보고서이므로 지금은 공개할 수 없다. (물론 나중에 학기가 끝나고 성적이 모두 나온다면 기꺼이 공개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주요한 몇 가지 구절 정도는 여기에 달아두어서 내 생각의 주요 논점들만은 밝혀둘 수 있지 않을까?
니체와 도가 사상이 반대된다는 나의 견해는 적어도 《장자》의 경우 니체와 세계를 달리 지각하였고, 또 인간의 사물 · 가치 판단 능력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관점을 가졌다는 해석으로부터 비롯한다. 물론 내 해석이 《장자》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고, 또 니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도가에서 ‘극복’을 말할 때, 그것은 판단 중지의 경지를 지향하는 반면 니체가 ‘극복’을 말한다면 그것은 적극적 판단과 기성의 전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두 철학은 서로 다른 철학이다.
즉, “선과 악이 구분될 수 없다는 사상이 니체가 주장한 주지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입장 그리고 세계를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로 지각했다는, 지극히 헤라클레이토스의 연장선에서는 일맥상통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이미 나 자신이 질문에서 예견하였듯 “‘놓는다는 것’이 ‘포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면, 도가 사상이 말하는 ‘놓는 것’은 ‘포기하는 것’, 즉 사물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지만, 니체가 말하는 ‘놓는 것’이란 기독교적 질서가 음험하게 속삭이는 ‘무의미’에 대한 마취제를 거부하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변화로서의 세계를 기꺼이 마주하면서 이른바 〈멋진 부조리와의 대결〉1여기서 물론 나는 다시 한 번 알베르 카뮈를 떠올리고 있다.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아래에 이제 이번 〈동양철학의 이해〉 과목의 기말 보고서로 제출하는 「니체와 《장자》의 ‘자기 극복’ 대조」의 몇 구절을 슬쩍 옮겨둔다.
#1.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니체와 장자는 사람의 시비 판단, 사물 및 가치 평가 능력에 대해 서로 반대 입장을 취한다. 장자의 경우 물자체에 대한 왜곡이라는 점에서 이 능력들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어떤 관점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중립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 가치 체계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내리는 가치 평가와 판단을 강조한 니체는 사람의 판단 · 평가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장자에 반대된다. 이러한 차이점은 니체와 장자가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서로 다르게 지각한 결과이다. 장자와 달리 니체는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는 물론 상이한 힘과 해석들의 경쟁 및 병존까지도 세계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절대적 중립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장자의 도(道)가 어떠한 해석에도 휘둘리지 않는 절대적 중립 혹은 평화 상태를 말한다면, 니체에게 있어 도(道)가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기꺼이 그 해석들의 병존에 동참하는 상태라 할 것이다.
#2.
니체와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은 ‘자기 극복’의 경지를 다르게 정의한다. 《장자》는 자의적으로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대상 · 가치 판단에서 벗어나 대도(大道)에 입각하여 만물의 동일함을 지각하는 것을 ‘자기 극복’으로 보는 반면, 니체는 기존 질서 · 가치를 넘어서서 경쟁과 병존으로서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따라 주도적이고 의욕적으로 가치 창조를 행하는 것을 ‘자기 극복’으로 본다. 두 철학에서 ‘극복’은 기존의 세계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변화로서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장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극복이란 판단 중지의 상태를 일컫는 반면 니체의 경우 다원성을 부정하는 일원론적 가치들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기에 이른 상태를 진정한 극복으로 보는 것이다.
#3.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가치 판단을 니체와 장자는 반대 방향으로 평가한다. 장자는 중립적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중시했기에 사물을 특정 관점으로 재단하는 판단 · 가치 평가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니체는 해석과 관점들의 병존성을 중시했기에 완전한 중립적 시각의 존재를 부정하고 기성 가치 체계를 전도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행하는 창조적 판단 ·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두 철학의 사물 판단 · 평가에 대한 견해차는 이상적 인간상의 차이로도 투영되었다.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인 ‘진인’은 판단 중지의 상태에서 모든 사물이 ‘하나’인 차원을 지각하는 것을 중시하지만,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인 ‘위버멘쉬’는 기성의 체계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판단을 만들어내는 것을 중시한다. 장자 철학에서의 ‘자기 극복’이 사물에 인위적인 판단 잣대를 들이대는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라면, 니체 철학에서의 ‘자기 극복’은 세계의 다원성을 부정하는 기성 가치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여기서 물론 나는 다시 한 번 알베르 카뮈를 떠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