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비평이라는 소일거리
방학 중에 인턴십 계획은 물론이거니와 각종 독서 모임, 그리고 나아가 (사실상 내가 강의하는 〈학생 강의〉에 가깝긴 하지만) 학부 프로그래밍 스터디 세미나까지 모두 감당해야 하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일을 결국 맡기로 했다.
다름 아닌 아직 쓰이고 있는 소설에 대한 비평이다. 친구의 소설이고, 장르는 판타지 소설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은 현실에 대한 도피로서의 성격이 강한, 따라서 전적으로 데카당적이며 오사무적인 이들의 향유물이라고 판단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현실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던 유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다른 세상에서의 ‘비유’로서 이해되는 소설이 바로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하는 직감이 떠올랐던 나는 결국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우는 아직 미완성인 소설이긴 하지만 문체나 서술 위주로 비평을 요청했고, 아주 긴 소설이 되겠지만 어느 정도 완성된 부분들은 다듬어서 계속해서 방학 동안 보내주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 일을 붙잡게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든 나는 클리어 화일을 하나 만들어 그의 지적 노동의 산물에 대한 비평을 모아둘 수 있을 공간을 마련해두기로 했다. 컴퓨터와 태블릿으로 전자 문서 위에 주석을 달 수도 있는 오늘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펜으로 주석을 다는 것에 전자 주석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일전에 소설이란 인간의 삶의 〈상승〉과 〈하강〉 중에서 특히 〈하강〉 앞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보이는 예술이라 정의한 바가 있었다. 과연 앞으로 친우가 보여줄 산물이 나의 이러한 ‘소설’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는 소설일지 아니면 나에게 ‘소설’의 정의를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산물일지, 아니면 그저 기계적인 비평만을 연발하도록 만들 안타까운 산물이 될지 지켜봐야 할 듯 하다. 비록 아직 읽은 소설이 많은 것도 아니며 또한 판타지 장르에 대한 전문가도 아닌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가치 평가 기준 하에서 누군가의 작품을 비평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히 하나의 행운이라 할 만하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