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인 ‘건강’과 ‘삶’의 긍정
아버지께 전화가 왔었다.
어제 한창 물리학을 풀다가 시험 기간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머니께 전화 드린 것의 연장선이었다. 괜찮냐고 그러셨다. 더 나아질 것은 없다고 말씀드렸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아버지는 건강이 우선이라며 스트레스를 그렇게 받아가면서 정신과 몸을 모두 상하게 하면서 공부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면서 하라고 충고하셨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 건강은 가장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건강은 나에게 있어 당연히 필요한 조건이지 목적이거나 삶 자체의 원동력이 될 수는 없었다. “몸 자체의 편안함과 정신 자체의 편안함, 그로부터 오는 긴장 없는 상태”라는 통상적 정의의 건강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오직 실존하고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건강이란 나 자신의 합리에의 향수와 세상 사이에서의 부조리를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정의는 몸과 흔히 말하는 정신적 건강 모두를 아우른다. 만약 내가 심한 감기에 걸려 몸져 눕게 되었을 때,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잠을 지속해서 자는 것이라면 나는 건강하지 않다. 만약 내가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피폐해져서 내가 나 자신을 둘러싼 모순이나 내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궁리하지 못한다면, 나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러나 통상적 의미와는 달리 나에게 있어 ‘건강하지 못함’은 곧 ‘고통 없음’과 동치가 아니다. ‘고통 없음’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의 행복을 위하여 ‘고통 없음’의 상태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인간 실존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부조리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비겁한 행동이다. 잠시 그 부조리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숨을 고르는 것은 괜찮더라도, 부조리와의 투쟁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나 고통스럽다며 싸움을 포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노예적인 태도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장학금이라던가 아니면 성적이라던가 하는 숫자들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며 물어오셨지만, 그것은 아직 아버지께서 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셨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뿐이다. 숫자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란 내가 나 자신을 극복하고 있느냐는 것, 합리와 비합리 사이의 이 모순적 감정, 투쟁에서 매일 나아가고 있느냐 아니냐 그 여부일 뿐이다.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나는 도피하고 있는 것이지 전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인간 자신으로서의 운명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통에 맞섬으로써, 도피하지 않음으로써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영원한 무지와 무능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결코 정복할 수 없음을 명확히 알지만, 가능한 한 많은 곳들을 정복하기 위한 정복자로서, 그리하여 그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치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의 안으로 그것들을 끌어들이는 입법자가 되기 위하여 나는 매일 멈추지 않고 스스로와 씨름하는 것이다.
자유는, 나의 사상과 나의 존재, 나의 의지 그리고 나의 삶은 전적으로 세상과 나 자신의 대립, 그리고 투쟁, 그리고 화해에의 노력 그것에 있을뿐이다. 대학은 이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짧은 인생사의 어느 순간 중에서도 가장 극명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얻은 어떠한 귀결보다도 가장 소중한 이 귀결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도피하지 않을 것이다. 맞서 싸울 것이다!
이처럼 어떤 날들에는 시지프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산을 내려오지만 그는 또한 기쁨 속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또한 그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시지프를 상상해 본다. 그것은 고통으로 시작되었다. 대지의 영상이 너무나도 기억에 생생할 때, 행복의 부름이 너무나도 강렬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 슬픔이 고개를 쳐들기 마련이니 그것은 바위의 승리요, 바위 그 자체다. 엄청난 비탄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무겁다. 이것은 우리가 맞이하는 겟세마네의 밤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짓누르는 진리들도 인식됨으로써 사멸한다. 이렇듯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이 세상에 비끄러매 놓는 유일한 끈은 한 처녀의 싱싱한 손이라는 것을 안다. 이때 기가 막힌 한마디 말소리가 울린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과 나의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부조리의 승리에 대한 경구를 제공한다. 고대의 예지가 현대의 영웅주의와 만난다.
부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모종의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라고! 이처럼 좁은 길들을 통해서……?” 그러나 세계는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행복이 반드시 부조리의 발견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이 오히려 행복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내가 판단하건대 모든 것이 좋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납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 울린다. 또 모든 것이 밑바닥까지 다 소진되는 것은 아니며 소진되지도 않았음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불만과 무용한 고통의 취미를 가지고 들어온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한다. 그 한마디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부름이며 모든 얼굴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代價)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인간을 능가하는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그가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행위들이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이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183-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