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느린 편지
이메일을 보내다보면, 그리고 SNS와 같은 곳에서 타자(他者)의 소식을 접하다보면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통신 기술의 진보로 이제 사람들은 적어도 몇 초, 몇 분 이내로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일백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수기로 편지를 작성하여 우편 시스템을 이용하여 어떤 의견을 교환하고 소식을 전달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오늘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개인은 더욱 고립화되었고 서로를 향한 불신과 혐오의 의식은 더욱 커져가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럴 때이면 어떤 느린 편지를 생각하게 된다. 왜, 인스타 감성이니 뭐니 하면서 SNS와 웹에서 떠들어대는 것 있지 않던가. <느린 우체통> 그런 느낌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에는 문자와 그림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 이제는 영상과 사진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술의 진보에 무언가 반(反)하는 심리가 개인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우리는 여전히 어디에선가는 ‘느림의 미학’에 대하여 말하고, ‘느림의 미학’을 찾으며, ‘느림의 미학’으로 떠난다.
예전에 지식인들은 편지를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고 하던가. 뉴턴과 라이프니츠, 아인슈타인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사람들… 그들은 이메일을 통해 오늘날처럼 모 연구진에게 그들의 연구 결과나 논문에 대하여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순간들이면 그들의 느린 편지들에 대하여 일련의 회상적 성격의 망상을 가지게 된다.
느린 그들의 편지는 빠르게,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전달되는 오늘날의 의사소통 방식과 정반대되는 바로 그 속성, 바로 느리다, 오래 걸린다, 시간이 걸린다 – 라는 이 속성 때문에 오히려 더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사소통에서 ‘신속성’이 너무나도 강조된 오늘날 우리는 그 ‘신속성’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 라는 사상을 가지게 하는 것은 사실 정보 전달의 ‘신속성’이 아니라, 어쩌면 그 ‘느림의 미학’이라고 불리는 느린 편지들이 쌓인 우체통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