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

2025-01-27 0 By 커피사유

영원회귀(永遠回歸, Ewige Wiederkunft). 가장 추상적이고 따라서 모호하지만, 니체가 남긴 가장 귀중한 시니피앙(signifiant). 어느 여정이 계속해서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온다고 해서, 그 여정에는 과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모든 여행은 결국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지 않던가. 실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계에서의 여행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대학 위에서 나의 정신적 · 철학적 여정도 다시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나는 니체에서부터 촉발된 욕망이 지난 번 탐서일지에서 언급했듯 수많은 철학자와 문인들을 거쳐 다시 한 번 니체로 회귀하고 있다는 야릇한 감각에 전율한다. 대학 초창기 나는 니체의 망치에 의해 절대성이라는 오랜 키치를 깨 부수었고, 그 폐허 위에서 이를 대체할 수 있을 새로운 질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새로운 질서 자체를 세우는 것을 거부해야 하는 것인지 방황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나는 새로운 건물을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하고 또한 아름답게 쌓아올리게 된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시도가 또 다른 우상에 불과했음을 깨달으면서 다시 한 번 처절한 나의 발자취가 다시 한 번 공허로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폐허의 여명 위에서 이제 나는 이러한 영원회귀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왜 운명애(Amor Fati)를 주장했는지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나는 무너지는 것을, 합리와 논리적 설명 즉 의미가 제공되었던 것들이 붕괴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했다.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서, 길을 막고 있던 바위 하나를 날려버리기 위해서 폭약을 격발시킬 때 특유의 커다란 굉음과 매캐하게 퍼지는 연기들. 니체의 ‘다이너마이트’의 격발 앞에서 나는 그러한 굉음과 연기들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제 니체의 ‘다이너마이트’가 어떻게 폭발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측을 가지게 됨에 따라, 나는 이제 지금까지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바로 그것 ―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신분석학을 조금씩 맛봄에 따라서 인간을 오로지 이성과 합리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나는 그 이유를 반드시 외부의 어떤 것과 연계하여, 선후 또는 인과 관계를 반드시 포함하여 설명하지 않아도 됨을 안다.

오래 전부터 서양 학문의 문화가 고백해왔듯 결국 답은 나 자신 안에 있었다.1여기서 나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를 떠올린다. 그러나 《괴델, 에셔, 바흐》와 프로이트 · 라캉을 읽은 지금, 나는 이 문장의 요구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삶에서 가장 길게 이어질 의문이자 운명임을 짐작한다. 니체 철학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블로그를 만들 당시에 이미 나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은연 중에 내가 치열하게 고민해온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아(我)/타(他)의 영원한 충돌. 이것은 내가 표현해왔듯이 ‘한 사람의 세계’의 차원이기도 하며2그 당시 나는 아주 피상적인 짐작 위에서 이 표현을 채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정신분석학과 함께 나 자신의 가장 심연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의 짐작보다 더 중대한 무게가 이 표현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동시에 우리가 파악하는 ‘모든 것’ ― 즉, 세상의 모든 참과 거짓의 여부, 이 사회 ·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이데올로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의견, 한 사회 내부의 공론, 누군가의 유/무죄의 여부,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소견과 심판 ― 들의 차원이기도 하다. 니체는 일찍이 이 모든 것은 밀란 쿤데라가 지적했듯이 ‘무의미’를 견딜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의미를 궁극적으로 갈구하게 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상을 세우게 되고, 그 우상은 결국 우상의 무게가 증대됨에 따라 삶에 질려버린 인간 자신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 그 영원회귀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그 예언은 니체의 잠언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고, 처음 접한 그의 말들이 나의 내면 속으로 빨려듬에 따라 저 깊은 심연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운명 위의 인간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나는 그 심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는데, 얼마 전 용기 있는 결단에 따라 나는 기꺼이 그 끝없는 어둠(玄)으로 뛰어들기를 선택했고 마침내 떨어져 내린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려왔던 그의 잠언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 나 자신이 말하고 있는 운명, 바로 이것이 가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니체를 비롯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먼저 발견해온 바로 이 치명적인 운명은 끝이 있는 인간은 의미로부터 격리되어 있기에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의미’를 찾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문장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운 밤 속에서도 나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모든 문학 작품이 하나의 별로, 하나의 우상으로, 하나의 키치로 밝게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비극적인 인간의 운명,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과 정신적 갈등 속에서도 결국 끝까지 살아냈고 나름대로의 귀결을 맞은 수많은 삶들을 그려냈다. 나는 키치 위에서 방황했으며 그것을 거부하고 떠나더라도 다시 또 다른 키치 위로 돌아온 이들의 운명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고민해왔던 문제가 비단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이들이 고민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독 위의 인간은 같은 고독 위에 있는 인간을 알아보는 법이다. 지금 내가 바로 그 순간에 서 있다.


Persona 3 OST – The Poem for Everyone’s Soul
“모든 영혼을 위한 시(詩)”. 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모든 영혼, 우상의 생성과 파괴라는 영원회귀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영혼. 음악은 너무 많은 것들을 노래해서, 동시에 너무 적은 것들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 의미는 어디까지 궤뚫어보느냐, 어디까지 연관짓느냐에 따라 바뀐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우상의 생성을 범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여기서 나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를 떠올린다. 그러나 《괴델, 에셔, 바흐》와 프로이트 · 라캉을 읽은 지금, 나는 이 문장의 요구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삶에서 가장 길게 이어질 의문이자 운명임을 짐작한다.
  • 2
    그 당시 나는 아주 피상적인 짐작 위에서 이 표현을 채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정신분석학과 함께 나 자신의 가장 심연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의 짐작보다 더 중대한 무게가 이 표현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