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사회 변화의 선후관계, 새로운 음악의 탄생 조건에 관한 논고

2025-10-28 0 By 커피사유

이하의 내용은 2025학년도 2학기, 청강으로 듣고 있는 서울대학교 《음악론입문》강좌의 〈새 시대를 연 음악〉에 대한 학생 발표에서 제시된 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토의 이전에 기록해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I. 음악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가, 아니면 반영하는가?

  • 개인적으로는 음악과 사회 변화의 선후 관계에 관한 이 질문에 대해서는 두 방향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① 음악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기도 하고(i.e. 음악이 먼저 제시되고, 사회 변화가 뒤따라오는 경우), ② 사회 변화를 음악이 반영하기도 한다는 것(i.e. 사회 변화가 먼저 제시되고, 음악이 뒤따라오는 경우)이 나의 입장이다.
  • ‘① 음악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경우’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선동하는 음악’의 사례들을 보면 충분하지 않을까. 종교적 음악부터 전쟁 프로파간다에 사용되는 음악에 이르기까지 사례는 차고 넘치지만, 여기서는 그 중 하나인 1960~70년대의 포크송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 간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 이 시기 대학가를 중심으로 청년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유통된 포크송이 민주화 세대를 결속시키는 아교 역할을 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김광석의 이미지가 대표하듯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표되는 이 시기 청춘의 상(狀)은 가깝게는 김민기의 〈아침 이슬〉부터 조금 멀게는 미국의 원 포크곡을 번안한 영사운드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와 같은 포크송들이었다. 음악은 시위 현장에 늘 등장했다. 오늘날의 집회에서 음악이 하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운동 시기 포크송은 집회 · 시위 참가자들의 단결감을 고조시켰으며 그 공간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같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조직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포크송은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먹고 자란 피들이 흘렀던 저 현장으로 사람들이 계속 나올 수 있었던 감정적 · 실천적 동기를 제공해주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 그러나 포크송은 단지 우리나라에서만 집회 · 시위에서 결사자들의 단합을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다. 포크송 자체가, 특히 ‘프로테스트 포크(Protest Folk)’라고 불리는 장르의 음악은 애시당초 집회에서 불리는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졌기에 가사와 멜로디가 기억하기 쉬우며,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작곡되었다. 프로테스트 포크 음악들은 동시기 미국에서 일어난 반전 운동, 즉 베트남 전쟁에 파견된 미군의 참상이 공개된 결과로 초래된 사회적 반발의 전개에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의 기여를 했다. 즉, 집회 참가자들은 ‘We Shall Overcome’부터 ‘Blowin’ in the Wind’에 이르기까지의 곡들을 ‘Stop the War Now’나 ‘We Support Nixon on Vietnam’에서부터 ‘No Vietnamese Ever Called Me Nigger’와 같은 구호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물론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를 담은 메시지를 적은 피켓을 들고서 함께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고, 그 합창은 참여자 사이에서 연대 · 단결감을 제공해줘 더 많은 이들이 집회 · 시위에 참여하도록 했다.
  • 이 같이 포크송은 참여자들을 더 끌어모으고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 미국에서는 반전과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내건 시위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6 · 29 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회복, 제6공화국의 수립이 이루어졌으며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의 철수, 흑인 민권 운동으로 인한 (적어도 법제적으로의) 차별 폐지 등이 달성되었다. 포크송과 시위가 맺는 이 관계는 전형적으로 ‘음악이 사회 변화를 주도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② 사회 변화를 음악이 반영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기술적 · 인식적 변화에 대한 반영을 고려해볼 수도 있으나, 이전 사례에서 ‘사회 · 정치적 변동’과 음악이 맺는 관계를 고려했으니 이번에도 같은 부류를 고려해보기로 하자. 이 경우는 일본의 개항 과정에서 소비되는 음악이 어떻게 변동되었는지를 고려해보면 충분할 것 같다.
  • 개항기, 즉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에 일본 사회가 서양 문물을 널리 수용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이 시기에는 서양 음악이 교육, 의례, 대중 음악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으로 도입되었다. 서양식 음악 학원이 세워져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음악가들이 일본인들에게 서양 음악을 가르치고 또한 공연했으며, 각급 학교에는 서양식 교가가 도입되었고 또한 군악대의 행진이나 국가 의례 등에는 서양식 행진곡이나 의례곡이 작곡되어 사용되었다.
  • 이 이전 시기 일본에서는 샤미넨, 고토, 비와, 사쿠하치, 시노부에, 타이코 등등의 전통 악기를 사용한 제례악이나 민속 음악들이 주로 연주 및 향유되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 전통 음계는 5음계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피콜로, 바이올린, 피아노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 악기의 도입과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7음계로의 전환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당대의 사회 · 정치적 격동기를 음악이 반영한 사례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 요컨대 상기 두 가지 사례, 즉 포크 음악과 집회 · 시위가 맺어온 관계에 대한 역사적 계보와 메이지 유신과 일본 음악의 변천사를 생각해보면 ‘음악’과 ‘사회 변화’의 선후 관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향이 모두 성립한다고 해야 한다.

II. 새로운 음악은 항상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한다고 볼 수 있을까?

  • 이 질문에 대해서는 발제자가 그 의도에 대해 “〈새로운 음악〉에는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 외의 것이 있는가?”라고 부연한 바 있으므로, 아래에는 이 의미에 따라 답변한다.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새로운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 ‘음악이 새로이 구분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그냥 또 다른 앨범이나 곡과 같이 말 그대로 ‘신곡(新曲)’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발제자의 진술 중 ‘질서’에 대한 언급이 있는 이상 의도된 바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 해석이란 여기서의 ‘음악’을 새로운 ‘장르’와 같이 어떤 곡들의 스타일 · 부류로 해석하는 것뿐이 아닐까 싶다.
  • 만약 〈새로운 음악〉에서 ‘음악’을 곡이 아닌 장르로 해석한다고 한다면, 새로운 ‘음악’ 즉 새로운 ‘장르’는 항상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 · 부정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르’란 기본적으로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하는 곡들의 집합이라고 본다. 그 집합을 명쾌하게 정의하는 것, 즉 그 장르이기 위한 필요 조건들을 정의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지만, ‘모든 조건들을 만족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 열거된 조건들 중 상당수를 만족한다면 예술이다’와 같이 예술을 정의하는 모리스 와이츠(M. Weitz)의 〈개념 개방성 이론〉과 비슷한 시도가 어떤 장르를 정의하는데 있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클래식 음악을 정의하는 경우 가능한 조건들로 ①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 등과 같은 전통적인 서양 악기를 사용할 것. ② 소나타, 교향악 등 알려진 악곡 구조를 준수할 것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두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만 현대 클래식 음악 중 어떤 것은 둘 중 하나만을 만족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둘 모두를 만족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특성을 ‘클래식’이라는 장르 조건에 포함한다고 하면 Weitz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르의 경계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또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그런데 상기에서 논의한 바란 어떤 곡의 장르는 이와 같이 다소 그 경계가 불분명하더라도 어떤 조건들의 집합을 가져와, 음악이 이 조건들의 상당수를 만족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장르들은 그를 규정하는 ‘열린 조건들’ 혹은 ‘유사성의 망’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곡이 있을 때 이 음악이 기존의 장르들에 속하지 않고 새로운 장르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장르’들을 규정짓는 조건들의 상당수를 모두 만족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존의 ‘장르’를 규정짓는 조건들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까지의 음악적 전통 · 계보 · 특징들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치가 아닐까? 이 음악적 전통 · 계보 · 특징들이야말로 우리가 ‘기존 질서’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새로운 ‘음악’ 또는 새로운 ‘장르’는 기존의 ‘장르 문법’, 즉 전통적인 질서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탄생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III. 새로운 음악은 대중성을 반영하는가?

  • 이 질문에 대해서 발제자는 그 의도가 “새로운 음악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판정은 소수의 평론가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대중에 의한 것인지를 묻는 것”에 있다고 했으므로, 아래에는 이 의미로 질문을 해석하여 답변한다.
  • 이상의 질문에서 애매모호한 표현인 ‘새로운 음악’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기 II.의 질문의 해석을 계승한다. 즉 나는 여기서 ‘새로운 음악’을 ‘기존의 것과 구분되어 제시된 또다른 장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 이 경우 II.에서 제시한 입장에 따라, 나는 어떤 음악이 ‘새로운 장르’에 들어가는지 ‘기존의 장르’에 들어가는지의 여부,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어떤 곡이 어떠한 장르에 속하는지의 여부는 장르마다 규정된 ‘유사성의 망’, 즉 제시된 조건들을 그 곡이 충분히 만족하는지의 여부를 통해 판정된다고 본다. 이를테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① 전통적인 서양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며’, ‘② 교향곡이라는 전통적인 악곡 구조를 지키고 있으며’, 그 외의 여러 ‘클래식’에 대한 조건들을 상당수 만족하므로 ‘클래식’으로 판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애매한 작품들에 대해 사람들이 여러 장르에 동시에 속한다고 판정하는 것도 합리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Chicago Band의 ‘A Hit by Varese’의 경우 재즈와 록 음악 모두에 속한다고 여겨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재즈록’이라는 독립 장르를 개척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이 음악이 즉흥 연주, 텐션 코드와 같은 재즈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일렉트로닉 기타, 블루스 리듬과 같은 락 음악의 특징 또한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i.e. ‘재즈’ 장르의 조건들 중 상당수를 만족하며, 동시에 ‘록’ 장르의 조건들 중 상당수를 만족하므로 이 곡은 두 장르 모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만약 곡의 장르에 대한 구분이 기존 장르의 조건들을 해당 곡이 만족하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판정된다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이 판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프리 재즈와 같이 대중에게는 난해한 장르가 있으나, 누구나 약간의 시간을 들여 해당 장르로 분류된 음악을 찾아 듣는다면 이 음악이 그 장르와 비슷한지 아닌지의 여부 정도는 손쉽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하더라도 모차르트의 곡이 방탄소년단의 곡보다는 하이든의 곡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 않을까?
  • 그런데 새로운 ‘음악’, 즉 새로운 ‘장르’에 대한 판정이란 필연적으로 상술한 곡의 장르에 대한 구분 판단을 내포하게 된다. 어떤 곡이 새로운 ‘장르’로 판정되는 것은 즉 이 곡이 기존에 알려진 그 어떠한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판정들을 모두 획득하는 경우가 아니던가. 그런데 위에서 논증한 바란 어떤 곡이 특정 장르에 속하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판정은 그가 누구든지, 즉 그가 전문가이든지 대중이든지와 무관히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장르’에 대한 판정 역시도 이 판정에 수반되는 행위들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이상, 그의 전문성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 따라서 나는 새로운 ‘음악’ 또는 ‘장르’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판정은 그 판단자의 전문성과 무관하다고 본다. 즉, 그 여부는 소수의 평론가든 대중이든지와 무관히 그 음악을 듣는 모든 이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