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을 위한 작문

2025-07-16 0 By 커피사유

근래에는 작문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동안의 여러 글쓰기를 점검한 결과, 나는 스스로가 카뮈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에서 글로 예술을 빚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는데, 그의 문장들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문체를 갈고 닦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글과 철학 자체가 일치하는 지경을 갈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글쓰기의 미학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나는 그의 〈부조리〉 철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나의 사유가 걸어온 발자취들이란 스스로가 세계가 더할 나위 없이 낯설어지는 순간, 한때 내가 습관에 의해 칠해왔던 저 캔버스에 칠해온 빛깔들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무채색의 형상들만이 남아버리는 순간들을, 아니면 그 잃어버린 빛깔들을 어떻게든 다시 마련해 칠해보려는 욕망의 흔적들이었으니 말이다. 아(我)와 타(他), 즉 나 자신과 세계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형상화한 여러 문장들을 짚어보면 글쓰기의 미학이란 다름아닌 이 〈부조리〉를 온전히 녹여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합리를 바라는 인간이 세계의 비합리적인 침묵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의미를 직조해내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본다. 문장 하나를 잘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이율배반적인 문장들을, 단어들이 그 발음 또는 의미에서 미약하게 파열하여 잔흔들을 남기는 구조들부터 아예 문법적으로 비문이 되는 배치들까지 써내려봐도 여전히 부족하다. 글에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이 명징한 장면을 포함하는 것에서 만족하고 싶지는 않다. 문단의 배치와 구분에서도, 글의 제목과 본문과 곁들이는 이미지와 음악 등에서도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주제가 모조리 녹아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종 실험을 해 보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미술 · 음악 등 전통적인 예술(Fine Arts)과 글을 엮어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과 같은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알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대적인 예술(Modern Arts)과 철학적 분석을 병기해보기도 하며, 단락과 단락 사이를 의도적으로 끊어내어 단절을 구현하는 이 모든 문학적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뮈의 수준에 비하면 한참 멀었음을 느끼는 것이다.

미학적 문제만이 나를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의 윤리학도 나에게 조명과 응시를 요구한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스스로의 실존적 위기를 자전적으로 고백하는 글들을 여러 편 썼다. 그 글들을 발표한 직후에는 그닥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7월 독서 모임에서 《시지프 신화》를 3주 동안 안내해야 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모임 계획서를 쓰고 나니, 그동안 행해온 작문의 방향이 《시지프 신화》를 비롯한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혹은 그 뿌리에 있는 니체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뿌리부터 뒤흔들어놓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골병이 드는 것”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는 글쓰기에서 하나의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자신이 경험한 바를 독자에게 타(他)로써, 즉 의도적으로 감각적으로 절제되어 있는 문체를 사용해 주로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제시하는 데서 그칠 것인지, 아니면 아(我)로써, 쓰인 것 이상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감각과 정동들까지 동원하여 한 사람의 존재를 격렬히 공명시킴으로써 그가 인간이 직면하는 실존적 문제를 직접 느끼게 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카뮈가 찾은 저 적절한 시어대로 사유가 한번 ‘사막’에 진입하고 나면 인간은 그가 그 어떠한 문제의식도 없이 덥석 그려내었던 ‘오아시스’의 기억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이 갈증은 뙤약볕으로 달아오른 모래를 기약없이 걷는 길 잃은 영혼에게 절실한 만큼이나 끔찍하기에, 이 사실을 실존적 동굴을 통과함으로써 체득한 작가는 독자에게 꿈(rêve)을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crevé)을 제공할 것인가하는 윤리학적 딜레마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섵불리 단 하나의 결론을 택해서는 안 된다. 세계가 아무리 본질적으로 내가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해서 무채색의 광경을 표현해야 한다는 귀결로 모든 것을 종착짓기에는 다채로운 삶의 광채들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논리적 함정 속에 빠진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흑백의 세계에서 인간은 한 가지 믿음을 택하고, 믿음은 영혼에게 한 판의 팔레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세계를 자신만의 빛깔로 칠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붓질들은 언젠가 닳아져 없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세한 진동 하나만으로도 안료가 수많은 조각들로 비산해버릴 그런 몸짓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몸짓을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슴에 담고자 하는 하나의 화폭이란 바로 그렇게 그림을 그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이 그려내는 수많은 세계들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또 한 가지의 문학을 나는 욕망해본다. 다그치지 않고, 속단하지 않으며,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고 잘못 윽박지르지도 않는 그런 문장들을 꿈꾼다. 그런 모호한 캔버스가 준비되어야만 독자와 글 사이에는 하나의 거리가 발생하는 것 같다. 이 거리가 요청하는 바를 나는 거절하기 힘들다.

아무래도, 근래에는 작문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단순히 쓴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지, 그리고 글쓰기의 양쪽에 놓인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