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값어치
… 여전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의 ‘죽음’ 뒤에서까지 세상은 그 ‘죽음’에도 가치를 매기고 싶어 안달인 듯 하다.
…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오래 전의 인류사부터 다른 행성으로 무대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현대의 인류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배우면 배울 수록, 혹은 그 역사 속의 배심원단의 구성원의 일종으로써 ‘세상만사’라는 사건들을 심리하다보면 강력히 느껴지는 한 가지 것이 있는데, 누군가가 죽었을 때 그 죽은 자가 누군가이냐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행위와 그 사후의 절차가 달라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멀리 예시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예전의 나라를 생각해보아도 ‘왕’이 죽었을 때와 ‘가난한 농민’이 죽었을 때 어떻게 그 ‘죽음’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죽음’을 주변이 어떻게 추모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미 우리 주변의 일상이 이를 이미 증명해주고 있지 않던가.
정치계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면 그와 같은 시간을 보냈거나 혹은 그 사람을 좋아했던 누군가들의 애도의 물결이 이어진다. 때로는 그러한 애도의 물결과 그 뒤에 이어지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는 꽤나 잔잔하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 사람의 ‘죽음’이라는 동기가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어떤 행사를 연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 하지만, 만약 어딘가에서 홀로 당신의 힘겨운 세월을 견뎌오셨을 어르신께서, 혹은 당신의 고통을 온전히 인내하여야 하는 길거리에 내앉은 누군가가, 또는 삶의 마지막 가장자리에서 멍하니 도시의 네온사인을 응시하며 어느 대교 위의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자신의 마지막 벼랑에서 버티고자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의 ‘죽음’은, 보도되지도 않고, 주목되지도 않으며, 알려지지도 않고, 그저 잊혀질 뿐이다. 아니, 잊혀질 수조차도 없다. 애초에 잊혀지기 위해서는 ‘잊혀짐’의 이전에 ‘인지’라는 층위를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며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누군가의 생명은 중대히 다루어지고, 누군가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도 못하고 그냥 꺼져버리는 세상.
도시의 네온사인을 누군가가 멍하니 응시하고 있더라도, 그 밤을 밝히고자 하는 도시의 강력한 의지로 하여 한없이 가려지고 도망쳐야만 하는 그 도시의 그림자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그 그림자가 도처에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이 과연 우리의 세상에 관한 진실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