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하지 않은 죽음
조금 전 영국 여왕 고(故)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State Furneral)을 BBC 라이브로 보았다. 식민지 지배의 흔적으로 얼룩진 대영제국, 그리고 식민지 지배의 흔적으로 얼룩진 우리나라 역사의 한 획이 마치 거기 보이는 듯 했으나, 엘리자베스 2세는 그래도 기품 있고 또한 자신의 의무를 다한 여왕으로서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나 또한 진심어린 애도를 보냈다.
BBC 생중계 화면으로 보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은 오랜 국왕제의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답게 아주 화려하고 엄숙했다. 교회 성가대와 파이프 오르간, 그리고 추도 미사.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 고(故) 엘리자베스 2세를 위한 것이었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 제1세계의 국가수장들은 물론이고 제3세계에서도, 그리고 나처럼 화면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이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여왕은 그렇게 떠났다. 그러나 여왕의 그런 화려한 마지막 모습만큼, 나는 반드시 그 뒤에 숨겨진 것을 기억해두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캔터배리 대주교는 여왕의 장례식에서 만인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며, 이는 여왕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설교하였지만 그것은 대주교의 거짓말이자 종교의 아주 오래된 거짓말이다. 죽음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면 여왕의 장례식에 쏟아진 세계의 관심과 애도만큼이나, 여왕의 장례식에 쏟아진 시간과 생각들, 그리고 자원들만큼이나의 사물들과 사람들은 마땅히 그 어떤 다른 누군가의 경우에도 똑같이, 바로 그곳에 그 때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은 오직 모든 사람의 삶은 생물학적 죽음이라는 결말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만 유효하다. 그러나 그 이외의 점들, 즉 ― 죽음 이후 그가 묻히는 곳,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죽음 이후 고인을 보내는 그 모든 모습과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결코 유효하지 않다. 죽음 앞에서 이러한 말이 공공연히 설교되고 전파되는 것은 그 말 속에 숨어있는 자기모순의 심각성만큼이나 끔찍한 위선이자 기만이며, 또한 그 말 속에서 비추어지지 못한 수많은 고인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한 시대를 대표했고 이제 떠나는 여왕의 죽음 앞에서 나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장례식의 주인공인 여왕이 아닌, 여왕이 받은 전세계적인 애도와 추모와는 정반대에 있는, 잊혀지는, 그리하여 여왕의 죽음과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대비되는 그러한 죽음들을. 70여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군주’라는 의무를 다했던 여왕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속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여왕이 받은 것에는 한참 모자라는 존경을 받지 못한 그러한 죽음들을.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화려하고 엄숙한 장례식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점을 나는 기억해야 한다. 떠나는 여왕의 모습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리하여 정말로 기억되어야 하지만 기억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