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서, 다시 한 번

2025-01-01 0 By 커피사유
2025 을사년의 첫 해. 내가 소박하게 바란 것은 ‘회복’이었다.

을사년의 첫 태양을 가족과 함께 맞이하고 왔다.

2024년의 심란한 연말의 여파가 물론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장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희망은 힘이 세므로’ 작은 소망이라도 빌어 보기로 했다.

산자락 위로 샛노란 광구가 떠오를 때, 나는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하는 경희대학교 교수진의 시국선언문을 떠올렸다.

전쟁과 죽음, 정치적 계산으로 짓밟히는 역사의 아픔, 여성 · 노동자 · 장애인 · 외국인에 대한 박절한 혐오와 적대, 수많은 격노, 공적 · 사적인 것의 경계가 허물어져가는 모습, 신뢰 그리고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규범과 합의. 이 모든 것들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목도했으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거리로 나와 부르짖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오름에 따라 나는 다시 한 번 국회의장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지양해야 하는지 그럭저럭 알 것 같은 지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경희대학교 시국선언문의 일부를 조금 바꾸어 아래에 옮긴다.

나는 하루하루 부끄러움을 쌓는다. 부끄러움은 굳은살이 되고, 감각은 무디어진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하루하루 인간성을 상실한 절망을 보고 있고, 나 역시 그 절망을 닮아간다.

어느 시인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앞자락에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리라는 미약한 소망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두었다.

나는 반성한다. 시민으로서, 그리고 학도로서 나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나는 취약한 사람이다. 부족하고 결여가 있는 사람이다. 당신 역시 취약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취약하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를 낸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인류가 평화를 위해 함께 살아갈 지혜를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역사의 진실 앞에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모든 사람이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갖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서로의 생명과 안전을 배려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이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표현할 권리를 천명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우리가 공부하는 대학을 신뢰와 배움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잘못을 사과하는 윤리를 쌓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신중히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정한 규칙을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서로를 믿으면서 우리 사회의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진실 앞에 겸허하며, 정직한 삶을 연습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존중과 신뢰의 말을 다시금 정련하고 싶다.

우리는 이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만들어갈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일지 토론한다.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