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질서
지난 4년 동안의 대학 생활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직감은 늘 순간적으로 찾아온다. 왜 하필 그때인지, 왜 하필 그렇게 찾아오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2주 뒤에 있을 〈대기물리 II〉의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다시 살펴본 ‘예측가능성’의 문제 덕분에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자를 꿈꾸면서도 철학과 인문학, 예술과 역사 전반에 걸쳐 강력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들을 일일이 확인하려 했던 이유가 사실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임을.
오늘날 사람들은 과연 종종 그들이 사용하는 ‘나비 효과’라는 용어의 배경이 기상학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1960년대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츠(Lorenz)는 미국 기상 학회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선에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실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는 이 질문은, “우리의 날씨가 예측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담고 있다. Lorenz 방정식계를 통해 로렌츠는 비선형 미분방정식계의 해는 초기 조건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초기 조건으로 사용하는 관측장은 필연적으로 오차를 포함한다는 사실 그리고 기상을 예측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체 흐름의 지배 방정식은 Lorenz 방정식계와 별 다를 바 없는 비선형 (심지어는 편미분인) 미분방정식계라는 사실로부터 장기 예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리면서도 여전히 ‘예측 가능한 범주’를 논하고 탐했다. 여기서 나는 성급할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이 의문, 그리고 이 의문 앞에서 로렌츠가 보인 태도야말로 인류사의 관통이며, 내가 지난 4년 동안 따라다닌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다닌 과정을 요약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리학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뉴턴이 《프린키피아》 를 통해 입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정립한 이래, 물리학자들은 입자의 초기 위치 및 속도 그리고 입자에 작용하는 힘들이 모두 주어진다면 그 입자의 운동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기조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수많은 수식과 기호 위에서 자연과학자들은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세계의 궁극적인 진리, 어지럽도록 변하는 이 세계를 산출하는 질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거기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 것이다. 미시 세계에서는 관측 자체가 입자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고찰로부터 그들은 결정론적 리(理)에 대한 신화를 무너뜨렸다. 코펜하겐 해석 이후 물리학자들은 대립했고, 한쪽은 확률론적으로 전자의 위치를 기술하면서 신은 주사위를 던진다고 비유했지만 다른 한쪽은 고집스럽게 그것을 거부했다.
그렇다. 신화다. 그대로 향유하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다양한 이 혼돈, 그 혼돈 속에서 인간이 질서를 찾는 것은 일종의 본능일 수밖에 없었다. 생존하기 위한 지능의 필수 조건이란 반복을 지각하는 능력, 즉 규칙성을 찾는 능력이었고 수천년의 역사 동안 인류는 그 본능에 철저히 충실했다. 그러나 규칙 속에서도 혼돈이 탄생하는 것을 역사 속의 수많은 이들은 목격해왔다. 영원불멸하리라고 믿었던 이집트 제국이 무너지고, 중국 주나라가 무너진 춘추 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제후들이 전쟁을 벌였으며, 이는 계속 반복되어서 결국 몇 천년 뒤 유럽에 평화가 달성되었다고 믿었던 네빌 체임벌린에게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안겨주는 일까지 이어졌다. 질서를 갈망한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 자신의 변화무쌍한 성질을 보여줌에 따라 인간은 좌절했고 다시 한 번 질서를 갈망했다. 그렇다. 질서는 신화였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신화, 인간 지성의 본질이자 가장 내가 사랑하는 그것.1여기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질서’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질서를 고집스럽게 찾는 인간’ 그의 모습이다.
그러한 신화는 인문학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찾는 여정으로 표현되어왔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그리스도교 그리고 죄의식, 금욕주의적 이상을 비판하는데,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가 비판하는 것은 종교나 도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안 즉 현실과 분리된 ‘의미 세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혼돈과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독일의 철학자는 혼돈을 견딜 수 없던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가 인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듬은 물론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대차게 비판했다. 그의 문제 의식을 이어받은 밀란 쿤데라는 ‘키치(Kitsch)’라는 미학적 용어를 자신만의 단어로 재창조하였고, 그리하여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말하면서 질서로서의 무거움과 혼돈으로서의 가벼움을 대립시켰다.
“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는가?” 내가 어제 새벽에 한 편의 글을 써 내리면서 염두에 두었던 이 질문을 상기해보자. 질서와 혼돈이라는 새로운 구도 아래에서 나는 이 질문을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술이나 연극, 문학에서 이 질문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인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간”이라는 말로 표현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논의한 바, 이 두 가지 단어가 자연과학사와 인문학사에도, 그리고 심지어는 역사 그 자체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로렌츠가 보인 그 태도가 정말로 인간적인 것이라는 나의 결론은 아마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렌츠가 보인 태도가 정말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나는 끝없는 의문 속에서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기댈 곳을 찾는 나 자신의 태도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제 새벽의 글에서 사용한 표현, 즉 키치 속에서 사는 것 그리고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상기하자. 나는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 질문은 “희망을 가지지 않는 법을 배운 인간”에 관한 질문이다. 이는 치명적인 질문인데, 왜냐하면 앞에서 나는 절망과 희망이라는 이항 대립이 혼돈과 질서라는 이항 대립과 같은 것임을 밝혔고 이는 궁극적으로 학문 일반에 대한 가능성, 다시 말해 예측가능성의 질문, 로렌츠의 질문, 나비 효과라는 표현이 출발한 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기록과 언어 속에 뒤덮여 나아간 지난 4년의 여정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가장 인간적인 본능에 따라 스스로의 서사와 지금껏 읽고 써왔던 수많은 기록 속의 서사 사이에서 동질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이 동질성이야말로 나 자신의 태도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모순이라는 점을, 그러나 바로 그 모순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아름다운 나 자신의 운명임을 지시해주고 있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의 한 구절을 조금 더 정확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조리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에 기반을 두는지 안다.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 나는 이 상태에서의 삶의 규범을 묻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게 내놓는 제안은 그 기반을 무시하며, 고통스러운 대립의 항목들 중 하나를 부정하고 나에게 기권을 요구한다. 나는 내 것임을 인정하는 이 조건이 어떤 귀결에 이르는지 묻는다. 이 조건이 어둠과 무지를 전제로 함을 나는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무지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며 이 어둠이 나의 빛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 열광적 서정이 역설을 보지 못하도록 내 눈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러니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외치며 경고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모든 사물의 근저에 오직 어둠침침한 열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것과 하찮은 것 등 모든 사물을 생산해 내는 원시적이고 격렬한 어떤 힘밖에 없다면, 만약 세상 만물의 저 뒤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바닥없는 공허가 숨어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외침은 부조리의 인간의 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 낼 것이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65-66.
주석 및 참고문헌
- 1여기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질서’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질서를 고집스럽게 찾는 인간’ 그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