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동(混瞳)
대학에 입학하던 그 날의 명료함과 자신만만함은 이제 없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관문 앞에 섰던 그 날의 기대감과 충만한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철이 없을 적의 나는 그래도 교실에서 내가 배웠던 기본적인 상식과 법치가 통하는 것이 세상일 줄 알았다. 이과의 길을 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률과 사회 제도에 내가 남다르고 깊은 관심을 가진 이유도 그 상식과 법치를 낱낱이 익혀두어 후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때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눈이 점차 뜨임에 따라서, 교실에서의 이야기들은 모두 동화에 불과했음을 나는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나라의 사법제도와 시스템에 대해 예전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다. 이익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했던 정치 집단들은 하나같이 나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정치는 민주사회의 근간이며 시민으로서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의사 결정 과정이지만, 나는 대중이 이제 정치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먼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를 매우 잘 이해하게 된 것만 같다.
나는 정의, 즉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당위’와 ‘이상’으로 무장하고 싶지 않다. 나는 ‘현실’을 기반으로 ‘정의’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싶다.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 하는 그러한 가치관을 나는 오직 현실에서만 찾고 싶다. 아아 ―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여전히 이상주의자의 늪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모양이다. 현실의 냉혹함은 나에게 너무나도 역한 냄새로 다가와서, 나는 고개를 돌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역질을 참는 것도 몹시 힘들다.
대학에서의 철학 · 사회학 강좌와 각종 고전들은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제각각 다른 대답을 내 놓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현실과 맞지 않다.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그들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론을 세우므로 그들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순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방향성이 아니라 이론이다. 이론,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 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며 그것을 나의 가치관에 참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 나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근현대 문학이 오랫동안 비판해온 황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이 모든 사람들의 가치라고 결론짓는 결말로 귀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냉혹한 현실주의자라면 이러한 결말이 자명하다고 할 것이지만, 나는 여전히 현실적이지 못한 대학생이라 괴로워한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윤리학의 오래된 질문은 오늘도 나를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