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lip Glass – Etude No. 6
20일 오전에 피아니스트 이루미 선생님을 초청해 진행된 서울대학교 〈음악론입문〉 강좌 특강, ‘실험과 해체, 다양성의 시대: 서양음악의 모더니즘’에서 소개받은 음악 중 하나가 대단히 인상깊었던지라, 잊어버리기 전에 아래와 같이 기록해둔다.
Phillip Glass의 연습곡(Etude)들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미학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의 두 가지 특징 때문이다.
첫째. 하농 · 체르니의 경우와 유사하게 피아노 연습곡의 특성상, 같은 선율 · 전개 · 리듬이 반복된다. 그러나 반복은 동일하지 않다. 악보는 동일한 화성 조합을 반복하면서도 그 리듬과 음의 개수, 무게, 강약을 달리하여 계속해서 곡을 밀고 나간다. 선율의 뉘앙스에 변형을 주는 것은 악보뿐만은 아니다. 연주자가 도돌이표를 만나서 다시 Figure를 연주함에도 댐퍼 페달이나 터치에 변화를 주어서 악보 상으로는 완전히 동일한 부분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곡은 다른 감각을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같은 악보임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별로 아예 다른 스타일로 해석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둘째. 화성의 종지음으로 안정감 있게 끝내는 보통의 곡과는 달리 음악이 갑작스럽고 불완전하게 끝나버린다. 예상할 수 없는 순간 전원이 나가는 것처럼, 조금씩 변형되는 반복은 감상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 다음 반복이 있을 것만 같았던 바로 그 순간에 종결되어버린다.
상기 두 가지 특징은 내가 스스로의 미학으로 삼고 있는 ‘부조리의 미학’과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만 같다. 카뮈의 ‘부조리’란 결국 침묵하는 세계와 이에 대해 대답을 요구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를 조형하는 인간의 대결이라는 저 이항 구도인데, 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히 반복된다. 정확히 이는 니체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를 생각나게 하는데, 나는 카뮈와 니체가 동시에 지적하는 이 구도를 ‘무의미한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그 세계 위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세우고 의미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반복은 들뢰즈가 지적한 것처럼1이 글의 #1을 보라.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이 아니며, ‘동일한 것으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도 아니다. 그의 말대로 인식되는 회귀란 “다다양한 것, 다수성, 생성하는 것으로서만 파악되는 ‘동일한 것’의 근원적 형태이기 때문”에, “생성하고 있는 것의 ‘동일한 것’만이 회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저 ‘동일한 것’이 인간이 삶으로 행하는 저 생성과 소멸, 즉 가치를 부과하거나 가치를 파괴하는 저 활동의 무한한 반복이라는 구도인 이상 들뢰즈의 말대로 “‘영원회귀’는 ‘반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하는 ‘반복’이며 구제하는 ‘반복’인 것이다.”
곡의 반복은 우리의 끝, 즉 죽음의 정확한 시점을 알지 못하는 운명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볼만하다. 부조리의 인간은 세계의 무뚝뚝함과 두꺼움과 대결하는 삶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하는지 세지도 않고 그저 그 반복이 매번 제공하는 고양감과 충만함에 몸을 맡긴다. 그에게 반복의 횟수란 의미가 없으며 어느 순간 그에게 선고된 사형이 집행될 때 그 반복은 급작스럽게 중지한다.
Phillip Glass의 연습곡들은 나에게 오늘 이상과 같은 해석을 획득했다. 따라서 내가 다음과 같은 카뮈의 문장들을2이 글의 #3을 보라. 저 작품에서 본다고 해도 그렇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죽음이라는 그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이건 행복이건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를 얽매어 놓던 것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 재도약하는 것이다. 그것은 ― 아마 신화에서 ― 인간의 고통의 깊이 외에는 다른 깊이가 없는 신화, 따라서 인간의 고통처럼 다할 길 없는 신화에서 전개된다. 그냥 재미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눈멀게 만드는 신들의 우화가 아니라 도달하기 어려운 예지와 내일 없는 정열이 요약돼 있는 지상적 얼굴, 몸짓, 연극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