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itas Morbus Mea”

2024-09-01 0 By 커피사유

아래의 글은 2024. 8. 31.에 진행한 2024. 경남과고 36기 독서모임 〈날적이〉의 보충자료 4번, 『’금욕주의’ 별과 ‘다이너마이트’ 니체』를 작성하면서 니체가 이야기한 ‘초인’에 대해 붙인 주석 17번의 전문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주석을 이해하는데 있어 부언해야 할 사항은 원문에는 없지만 이 글에서 각주를 통해 부언하였습니다.


아래의 해석에 의하면 서울대학교의 모토는 사실 위와 같이 바뀌는 것이
더 ‘참’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니체의 〈초인〉을 이해할 때는 니체가 비판한 그리스도교(금욕주의) 그리고 허무주의(능동성의 제거, 해석의 결여)에 합치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바로 그 기성적 가치질서 아래에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과 반대되는 ‘초인’은 그리스도교가 《도덕의 계보》의 세 번째 논문에서의 ‘금욕주의’인 이상, 그리고 이 ‘금욕주의’의 가장 세련되고 정제된 정수가 오늘날의 ‘진리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진리1여기부터 ‘진리’ 혹은 진리와 같이 볼드체 혹은 따옴표를 통해 낯설게 사용되는 진리 개념은 전통적인 ‘진리’를 가리키지, 니체가 ‘참’이라고 지각하는 바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덕의 파괴자지만, 바로 이 점에서 동시에 진리의 파괴자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나의 빛 (Veritas Lux Mea)’이라는 문장은 부적절하거나 불쾌한 소리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가장 건전한 문장이란 ‘진리는 나의 병 (Veritas Morbus Mea)’이라던가 ‘진리는 나의 독 (Veritas Venerium Mea)’, 또는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Veritas Non Est Veritas)’일 것이다. 금욕주의의 가장 나중에 등장한 최고의 ‘꽃’이 바로 이 문장에 따라 그에게는 반-사실2Semi-factus가 아닌, Contra-factus로의 의미이다. 즉, 半-사실이 아닌 反-사실이다. 나는 이 용어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의 제19장에서 사용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로 인식되기 때문에, ‘초인’은 동시에 과학을 비판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학문 일체를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비판할 것이다. 그는 모든 허구를 폐기하는 인간이다. 그는 오직 존재하는 것만을 지각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실증주의자3여기서 실증주의자는 오늘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자 전체라기보다는, 2020년에 아카넷에서 나온,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도덕의 계보》의 각주 121에서 설명하는 ‘콩트식의 실증주의자’를 가리킨다. 그 주석은 다음과 같다: 「나중에 보겠지만 콩트식의 실증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들 사이의 기능적인 연관만을 밝히려고 한다. 니체는 이들을 “사실적인 것, 즉 적나라한 사실 앞에 서 있으려고 하는 ‘작은 사실들’의 숙명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과는 다르다. ‘초인’이 실증주의자와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니체의 비판대로 그들이 여전히 ‘금욕주의 최고의 열매’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동시에 실증주의자들이 견지하는 ‘객관성’이 가지는 거세적 성격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무엇이 그들에게 거세되었는가? 실증주의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기술하기 위하여 해석을 포기한다. 세계에 대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본성, 세계에 대한 인간의 폭력(기본적으로 모든 가치 평가, 또는 ‘사물에 대한 지배’는 기본적으로 폭력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이 보충자료의 2번으로 제시된 카뮈의 글 중에서 6절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4보충자료 2번의 6절에 나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의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했다. 내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통일한다든가 어떤 대원칙의 얼굴로 겉모습을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보는 방법,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며, 자신의 의식을 인도하여 생각 하나하나, 영상 하나하나를 프루스트처럼 특권적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특권적 지위를 가진다. 사고를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극단적인 의식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47-49. 사물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탈락, 추상화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사물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이며, 동시에 사물을 왜곡하는 것이며 날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찰로부터 결코 ‘인간은 사물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라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다시 한 번 반복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을 포기하는 것이다. 능동성, 니체에게 있어 인간 본성의 가장 건강한 측면이 제거된 인간이 그가 말하는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일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잘못 이해된 바와 같이 ‘초인’을 단순히 자기 자신을 극복한 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우선 부정하는 자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에 긍정하는 자다. 그는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긍정하는가? 그는 오랫동안 인간 정신에 뿌리내린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런 뒤에 그는 유일하게 있는 것, 거짓도 아니고 기만도 아닌 가장 솔직하고 있는 것 그것으로서의 세계, 흔히 ‘육체’의 세계로 견지되었고, 끊임없이 변화하여 우리에게 혼란 그리고 고통을 주었기에 ‘불완전한’ 세계로 지각되었던 바로 저 세계를 긍정한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들, 도피하려는 자들, 기만하려는 자들, 절망 속에서 여전히 희망을 찾으려는 자들 모두를 거부한다. 카뮈의 말대로 그는 희망하지 않는 법을 배운 인간이다.5여기서 나는 보충자료 2번의 8절에 수록한 다음과 같은 《시지프 신화》의 구절을 고려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외치며 경고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모든 사물의 근저에 오직 어두침침한 열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것과 하찮은 것 등 모든 사물을 생산해 내는 원시적이고 격렬한 어떤 힘밖에 없다면, 만약 세상 만물의 저 뒤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바닥없는 공허가 숨어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외침은 부조리의 인간의 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낼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65-66.

주석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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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부터 ‘진리’ 혹은 진리와 같이 볼드체 혹은 따옴표를 통해 낯설게 사용되는 진리 개념은 전통적인 ‘진리’를 가리키지, 니체가 ‘참’이라고 지각하는 바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 2
    Semi-factus가 아닌, Contra-factus로의 의미이다. 즉, 半-사실이 아닌 反-사실이다. 나는 이 용어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의 제19장에서 사용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 3
    여기서 실증주의자는 오늘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자 전체라기보다는, 2020년에 아카넷에서 나온,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도덕의 계보》의 각주 121에서 설명하는 ‘콩트식의 실증주의자’를 가리킨다. 그 주석은 다음과 같다: 「나중에 보겠지만 콩트식의 실증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들 사이의 기능적인 연관만을 밝히려고 한다. 니체는 이들을 “사실적인 것, 즉 적나라한 사실 앞에 서 있으려고 하는 ‘작은 사실들’의 숙명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 4
    보충자료 2번의 6절에 나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의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했다. 내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통일한다든가 어떤 대원칙의 얼굴로 겉모습을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보는 방법,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며, 자신의 의식을 인도하여 생각 하나하나, 영상 하나하나를 프루스트처럼 특권적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특권적 지위를 가진다. 사고를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극단적인 의식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47-49.
  • 5
    여기서 나는 보충자료 2번의 8절에 수록한 다음과 같은 《시지프 신화》의 구절을 고려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외치며 경고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모든 사물의 근저에 오직 어두침침한 열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것과 하찮은 것 등 모든 사물을 생산해 내는 원시적이고 격렬한 어떤 힘밖에 없다면, 만약 세상 만물의 저 뒤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바닥없는 공허가 숨어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외침은 부조리의 인간의 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낼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6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