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 #3. 너 자신의 사유가 싹트도록

편지지 #3. 너 자신의 사유가 싹트도록

2025-02-19 0 By 커피사유

편지지(編志誌)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쓴 편지들을 모아 기록하여, 과거에 품었던 뜻과 마음들을 정리해두는 공간입니다.


아래 글은 2024. 10. 2. 필자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동생에게,

네게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구나. 까마득히 먼 유년기, 우리 둘 모두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네 생일날 쪽지를 써 건네주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니 말이다.

네 오빠가 평소에 별로 쓰지도 않는 손 편지를 쓰는데에는 나름의 철학이 있단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해 줘야 하는 말이 있지만 단편의 문장들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나는 종종 글을 쓰곤 하는데, 그 대상이 이번에는 네가 되었고 따라서 편지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 단지 “네 생일을 축하한다”하는 그 짧은 문장만을 전달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단다. 네가 갓 스물을 넘겼고 대학에서 이제 반년 정도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새내기로서, 그리고 한 명의 성인으로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너를 지켜보고 있으면,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해야 할 나 자신이 과연 지난 4년 동안 어떤 시간들을 보내왔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단다. 그러고는 깨닫게 되지. 나 자신이 가졌던 고민들을, 내가 겪어왔던 수많은 밤들을 너도 비슷하게 겪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너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지금의 너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 대학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다양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네 속에서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될 거란다. 그런 질문은 부분적으로는 네가 양친에 의한 가정이라는 보호막에서 벗어나 네 스스로 세상에 부딪치고 나아가는 과정에 있기에 떠오르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네가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각 3년 즉 총 12년의 시간 동안 제도권 교육 아래에서 배웠던 바에 대한 반례들,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지식과 신념들에 대한 반대 경험들에 노출되기 때문에 떠오르는 것이기도 하겠지. 사람들과 어울려보기도 하고, 갈라져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배신당하면서 너는 어느 날 밤에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고, 다음 날 밤에는 깨달음에 잠시 기뻐했다가도 이튿날 밤에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될 거란다. 물론 너는 나름대로 확고한 진로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 진로에 대한 것이 아니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학이라는 공간은 너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게 하는 공간이라는 점이지.

대학에서 지난 6개월을 보내면서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단다. 그러나 적어도 지난 몇 년 동안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니, 내 경우에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는 질문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질문들을 마주했던 것 같구나. 질문들이 너무 추상적이지 않냐고? 물론 그렇지. 하지만 사랑하는 내 동생, 너는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니? 쓸모없는 질문이 아니냐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곤 하지. 그러나 단 한 번뿐인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지향하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세상이란 어떤 곳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을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꼭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성공’하게 되는 것일까? 많은 돈을 벌어야만 ‘좋은 삶’이 가능할까? 애초에 ‘좋은 삶’이란 뭘까? ‘삶’이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사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너무 많거나 깊은 생각은 몸에 해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한지 3년이 된 지금, 나는 대학에 입학하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이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끊임없이 시달려온 경쟁이 대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다리를 오르려고 하고 남을 사다리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고, 대학의 수많은 학생들은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기 보다는 그저 당장의 숫자에 급급해서 교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고는 수업 마친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모두가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다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지. 나는 질문들을 통해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당연하게 넘어갔거나 실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인간 그 자신과 사회의 여러 면모들을 곱씹고 나름대로 해석해볼 수 있었단다.

내가 너에게 평소에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말하는, “네게는 교양이 부족하다”라는 문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란다. 이 말은 곧 “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니?”라는 물음이기도 하고, “너는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니?”라는 물음이기도 하지.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독립해서 주체적인 하나의 개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단다. 나는 대학에서 질문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탕이 없는 공중누각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것을 고집한 끝에 서로를 오해하거나, 헐뜯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상처까지 받는 모습을 너무 많이 목격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들처럼 아둔하게 ‘우물 안에 갇혀’ 허우적대는 삶을 살기보다는 그래도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너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단다.

이 편지와 함께 내가 건네 준 포장지에는 책이 두 권 들어 있을 게다. 둘 다 알베르 카뮈라고 하는 프랑스 문학인이 쓴 책인데, 하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수필이지. 두 권 다 네가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소설 속의 등장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너 자신도 한 번 대입해보고, 소설 속의 등장 인물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실은 네 오해나 편견에서 근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보고, 그렇게 너 자신의 사유가 싹트도록 조금씩 전진해보렴. 그런 뒤에 수필, 즉 〈시지프 신화〉를 읽어보면 (아마도) 1년 반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 자신도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의 해악’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네가 지금 내가 말하는 바에 공감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단다. 네가 네 오빠가 쓸데없고 아주 장황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이 편지지에 지껄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또 네가 책 두 권을 책장 한 켠에다가 박아두고 장식품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단다. 하지만 하나뿐인 내 동생에게 내가 선물해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이란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고, 내가 범했던 실수와 정확히 같은 실수들을 네가 범한 끝에 혼란과 고통에 빠지는 것을 볼 수는 없기에, 내 동생마저 다른 사람들처럼 우둔하게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서 내가 느꼈던 바들을 이렇게 적게 된 거란다.

그러니 못난 오빠가 책 두 권 따위를 생일 선물이랍시고 줬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그 두 권 뒤에 숨어 있는 내 회한과 실패 그리고 좌절을, 그리고 그들로부터 출발하는 내 소망을 다시 한 번 살펴주려무나. 생일 축하한다, 대학이라는 두 글자 아래에서 홀로 서기를 시작하는 네 앞길이 나보다는 순탄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빠가.

추신. 시간이 난다면 고 김윤식 교수가 쓴 『살아 있는 정신에게』라는 글을 한 번 살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