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나는 공부를 왜 하고 있을까
어느 날 나는 독백했다.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음에도 아는 것이 많다고 스스로 착각하곤 한다. 일상 속에서 이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부끄럽다. 나 자신의 행동도 그럭저럭 설명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님에도 불구한 나 자신이 자연이라는 더 복잡한 계를 설명하겠다고 과학고등학교에 앉아 정석을 풀고 물리 문제를 풀고 있는 것, 세계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도 못하면서 세계를 알아보겠다고 달려드는 나의 무식하고 무모한 태도에 한 편으로는 그저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쯤하여 나 자신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면 또 다른 나는 쓸데없는 회의라며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하고 다가오는 시험 기간이나 준비하라고 마구 비웃는다. 마치,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러면 나는 변명한다. 그래,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쓸데없는 회의는 나에게 있어 ‘탈출구’라고. 네 딴에는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비겁자와도 다름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도피’는, 적어도 그 현실이 괴롭다고 생각하고 도피하려고 마음먹는 것은 아직 ‘나’의 생각이 죽지는 않았다는 증거이니까.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은 나에게 또 다른 나는 이렇게 타이른다. 공부를 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수십 년 동안 교육열로 후끈하게 달아올라 좋은 대학에 가야 인생이 펴진다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인들,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하여 논문 제1저자로 이름을 등극한 딸이라던가, 어머니의 자본을 이용하여 독일로 유학을 가서 승마나 하는 딸의 사례를 보면 공부라는 행위가 가지는 절대적인 위치는 상당하지. 나 또한 중학교 때까지는 그렇게 믿어왔잖아. 할 줄 아는 것은 스스로 하는 공부가 전부였고, 나에게 떨어지는 모든 지식들을 다 흡수할 양 열심히 복습하고 또 잡아먹을 듯양 달려들었잖아.
그러면 나는, 하지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글들은 견고할 것 같았던 그 믿음의 세계를 흔들었는 걸,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는 특히 결정적이었어. 경제학은 결국 ‘선택’의 학문이라고, 어떤 선택이 가장 그 선택의 주체에게 있어 가장 이익을 많이 안겨주는가를 고려하는 것이 경제학이라는 유시민 작가가 소개하는 ‘합리적 인간’ – 즉, 자신의 이익은 극대화하고 손해는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가진 인간 – 을 소개할 때, 문득 나의 ‘우반구의 순간’이 찾아와 다음의 질문을 남기고 떠났다고. 그 놈 때문이라고. 그 놈. 그게 혼란의 시작이었다며 애써 핑계를 대어본다.
합리적 인간은 공부를 할까?
한 놈이 까고, 다른 한 놈이 변명하면 남은 것은 혼란이다. 그 혼란은, 공유해야 한다. 과연 합리적인 인간은 공부를 할까. 모영화 선생님 수행평가의 독후 활동으로 진행한 모둠 토론에서 나는 이 질문을 던졌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나의 말에 모둠의 친구들도 혼란스러워했다. 공부를 하는 행동이 합리적인 행동인지, 즉 이 공부가 나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지는 당연한 명제로 받아들였지, 한번도 의심해보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게, 과연 공부가 ‘나’에게 이익이 되던가? 모둠에서 나온 여러 가지의 의견으로는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공부’라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나 또한 함으로서 얻는 심리적 동질감으로서의 이익이라던가, 좋은 대학에 가서 더 많은 기회를 보장받는다는 믿음에 부합함으로서의 심리적 안정감의 이익 등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곧바로 그 놈이 부정했다. 이것들은 ‘진짜’ 이익은 아니라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성공’은 이처럼 불공평한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한다고 반드시 성취되지 않음은 매스 미디어에서 줄곧 떠들어대는 그 신물나는 주제 중 하나잖아.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나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쓸모’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현대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생각해볼 때, 나 자신은 ‘공부’라는 행위가 나 자신에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그렇지만 웃기게도 나는 이런 혼란 속에서, 여전히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공부’라는 행위를 하고 있다. 사회 시스템이 강제하고 있는 것에 나 자신이 지금 누렁소 코 꿰어 끌려가듯이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분명 든다. 예전에는 나 스스로가 미래의 성공을 위해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고 느꼈던 ‘공부’라는 행위는 이제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 제시된 사회적 의무와 주체성에 관련한 논의에서 완전히 그 느낌이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이 행위를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사적인 자리에서나 간신히 나는 공부를 왜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를 뜯어먹은 이들에 대한 ‘복수’나 괴로워 미처버리고도 남을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목적으로서 하고 있다는 예전의 나의 말도 이제는 먼지들이 그러하듯이 뿌옇게 떠 바람에 흩어지는 듯 하다. 믿음의 색으로 칠해져있던 세계는 그 빛을 잃고 그저 죽은 듯한 회색으로 보일 뿐이고, 순간의 확신은 그저 허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지금. 그 놈이 말한다. 그러게, 나는 공부를 왜 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아마 이러다가 조금 있으면 이런 나 자신의 행위를 애써 설명하기 위한 변명거리를,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 나름의 변명으로서의 목적을 설정할 것이다. 그 변명은 잠깐 동안 나의 삶에 거짓된 생기를 불어넣다가 다시 바람이 빠지고 나는 지금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공부를 내가 왜 하는지, 그 근본적인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한다면 나의 공부에는 사망을 선고할 수 밖에 없다. 세계는 회색이고, 나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다시,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