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13′. 오이디푸스의 두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보는 자유에 대한 답 (修正稿)

사유 #13′. 오이디푸스의 두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보는 자유에 대한 답 (修正稿)

2021-02-09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 학부 신입생 글쓰기 평가의 주제 ‘나는 자유로운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은 글로써 쓰여진 사유 #13. 오이디푸스의 두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보는 자유에 대한 답을 수정한 수정고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My Wife and My Mother-in-law”, Originally Illustrated by Anonymous illustrator in late 19th century Germany, and re-produced by William Ely Hill (1887 – 1962), a British cartoonist.

“…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 하군. ‘개인의 자유 의지’가 쌓아 올린 결과물이 그 창작자를 덮쳐 결국 그 미래마저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시문을 모두 읽고 난 뒤 내가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 과학이 자유주의 질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제시문 [다]>의 내용은, ‘복잡계를 예측하겠다는 야망’이라는 선뜻 보기에는 까마득한 꿈을 올려다보며 의지를 다지는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딜레마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나무(Baum)” 55 x 18(h) x 10 cm Video, LCD, Plexiglas, Speaker 2011, by 류호열.
Image from 네이버 블로그 ‘김성호의 미술비평 Sung-Ho KIM’

“아무리 복잡한 어떤 것이어도, 결국은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2년 전, 나는 ‘가능성의 나무’라는 것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나무’라는 단편 모음집에 등장한 그 개념에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가능성의 나무’는 ‘인류의 다음 수’를 예측하는 일련의 프로그램, 혹은 모든 ‘다음 수’들을 모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인류가 중대한 국면에 맞서 결정을 내릴 때, ‘가능성의 나무’는 보다 합리적인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 ‘가능성의 나무’는 보다 합리적인 결정은 물론이거니와, 인류가 미래에 대해 내리는 선택의 자유에 대한 폭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론으로, 나는 분명히 거대할 이 과업에 삶을 모두 투자할 가치가 있겠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은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 <제시문 [다]>로 인해 초래된, 나의 꿈과 확신의 실현이 결과적으로는 나 스스로의 ‘자유’를 부정할 것이라는 의심이 싹이 제대로 텄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가능성의 나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가능성의 나무’는 당연히 사회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의 흐름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행동을 당연히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개인의 행동을 완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보여진다면, 전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대한 불확실성’에 근간을 두고 있는 개인의 ‘자유 의지’는 전적으로 부정될 수 밖에 없다. 즉, 내 꿈의 실현은 결과적으로 오래 전부터 지켜온 믿음인 ‘나는 자유롭다’라는 선언 자체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2년의 힘든 고등학교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꿈을 포기할 수도 없고, 더욱이 이 ‘가능성의 나무’가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각종 효과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해결된 딜레마들이 제3의 해결법을 찾아내었듯, 나에게 이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해결할 어떤 단서라도 주어지면 좋겠건만, 나는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이러한 비극적인 딜레마에 대하여, 가능성 있어 보이는 탈출구를 나에게 보여준 것은 전혀 생각치도 않은 곳이었다. 심지어 그리 나에게서 멀지도 않은 곳이었다. 다름이 아닌,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읽었던 ‘오이디푸스’였다.

읽은 지 조금 되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대략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Oedipus and Antigone being exiled to Thebes”, 1843, Orleans, musee des Beaux-Arts. by Eugene Ernest Hillemacher (1818 – 1887, France)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부왕을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그 즉시 버려지고 만다. 그는 다행히도 목숨을 건지고 이웃 나라의 왕자로 입양되어 성장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며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버린 바로 그 도시, 테베에 창궐한 역병을 계기로 자신의 비극적인 처지를 깨닫게 된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이를 찾아내면 역병이 물러갈 것이라는 신탁에 따라, 그는 사건을 조사하나 점점 모든 증거는 오이디푸스 그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이 신탁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실천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그의 의심은 불행하게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진술을 통과하며 점차 선명해지기만 한다. 어렴풋이 그는 그가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음을 느끼지만, 여전히 그는 ‘아버지의 살해범’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한 사자의 단언에 그의 희망은 산산히 흩어져 부서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신탁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음을, 자신은 ‘친부의 살해범’이자 ‘모친과 결혼한 근친상간자’임을 깨닫게 된다.

마치 최근에 읽었던 ‘괴델, 에셔, 바흐’에서 등장하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술잔’과 같이,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 모든 행보는 역분사되어 오이디푸스 그 자신의 근간을 흔든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흔들림 속에서도 <살인자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살인자 찾기>가 자신을 처참히 파괴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진실을 향해 끝까지 파고 든다. 계속 자신은 <살인자>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자신의 운명은 실현되지 않았다고 여전히 믿으면서.

나는 문득, 이러한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계속 찾아나간 오이디푸스>라는 서사 구조가 지금 나 자신이 처한 모순과 동형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결정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가능성의 나무’라는 꿈은, 그 과정 때문에 필연적으로 역분사되어, 나 자신의 ‘자유’에 관한 근간을 흔든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불안함 속에서도 ‘가능성의 나무’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 꿈이 나의 ‘자유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자유 의지’와 ‘가능성의 나무’는 양립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기술이 나에게 내미는 일말의 가능성도 애써 부정하면서.

만약, <‘가능성의 나무’의 서사>가 필연적으로 ‘자유 의지의 부재’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정답이라면, 이것이 진실이라면. 결코 이것이 참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나라도 이 결말을 정녕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각중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나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는 듯 하다.

“Oedipus and Teiresias”. 1883. Woodcut engraving. by Asmus Jacob Carstens (1754 – 1798, German)

그는 자신의 근간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자신이 파멸로 치닫고 있음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중에도 멈추지 않는다.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그는 <살인자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은 스스로에게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측은, 결국 오이디푸스를 멈추지 못한다. 끝까지, 그는 결론을 부정하고, 다른 희망을 품고, 다시 비극적인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다.

… 나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상상하는 ‘가능성의 나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의 ‘자유 의지’라는 소중한 가치를 파괴해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멈출 수 없다. 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이 가치를 상실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꿈을 향한 여정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21세기 과학과 나의 모든 노력이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결론으로 <살인자>의 범위를 점차 좁힌다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애써 그 결론을 부정하려 할 것이다. 나 스스로가 믿어 오던 ‘나 자신의 자유 의지’, 그리고 나의 꿈과 세계관이 나의 도전으로 하여 전적으로 부정되고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나는 자유롭다’라는 이 선언을 거부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도 안다. 이러한 나의 <거부>는 ‘자유 의지’에 관한 참된 결론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운명이 아무리 나 스스로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라고 속삭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것을 부정할 수는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과학이 상기시키는 <자유 의지의 부재>라는 결말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나 자신의 <거부> 사이 어딘가의 바로 이것이, ‘나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진정할 주소이지 않을까. 여전히, 나는 <부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을까.

오이디푸스는 작품의 말미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이 운명에 대하여 아폴론과 예언자 그 누구도 예언하지 못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단죄한다. 자신의 눈을 황금 브로치로 찔러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이렇게라도 반발하려고 했던 것일까. 스스로가 믿어 오던 세계가, 행복하던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도, 그는 끝까지 그 운명을 <거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의 마지막 절규가 들린다. 이것은, 치명적이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 대한, 그의 마지막 <거부>라고, 일단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 분이시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허나 이 두 눈은, 이 두 눈만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

오늘날, 우리 모두가 오이디푸스의 그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그저 한없는 어둠만을 보지 않듯이,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에서 우리가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