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13. 오이디푸스의 두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보는 자유에 대한 답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 학부 신입생 글쓰기 평가의 주제 ‘나는 자유로운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은 글로써 쓰여졌음을 알립니다.
“…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 하군. ‘개인의 자유 의지’가 쌓아 올린 결과물이 그 창작자를 덮쳐 결국 그 미래마저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시문을 모두 읽고 난 뒤 내가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 과학이 자유주의 질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제시문 [다]>의 내용은, ‘복잡계를 예측하겠다는 야망’이라는 선뜻 보기에는 까마득한 꿈을 올려다보며 의지를 다지는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 치명적 딜레마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잡한 어떤 것이어도, 결국은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2년 전, 나는 ‘가능성의 나무’라는 것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나무’라는 단편 모음집에 등장한 그 개념에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가능성의 나무’는 ‘인류의 다음 수’를 예측하는 일련의 프로그램, 혹은 모든 ‘다음 수’들을 모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인류가 중대 국면에 맞서 결정을 내릴 때, ‘가능성의 나무’의 내용을 참고하여 보다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에서, 나는 조금 더 나아가 인류가 미래에 대해 내리는 선택의 자유의 폭을 넓히는 데에 ‘가능성의 나무’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론으로, 나는 분명히 거대할 이 과업에 내 삶을 모두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제시문 [다]>로 인해 초래된, 나의 이러한 꿈과 확신의 실현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자유’를 부정할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이러한 나 자신을 제대로 흔들어 놓았다. 딜레마라고 하는 것이 – 만약 내가 ‘가능성의 나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가능성의 나무’는 당연히 사회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사회의 흐름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은 내가 믿어오는 ‘나는 자유롭다’라는 선언 자체가 전면으로 부정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2년의 힘든 고등학교 생활을 버티게 해준 이 꿈을 나는 포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회피하려고 싶었지만, 그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 이러한 비극적인 모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탈출할 수 있는 환기구를 열어준 것은 전혀 생각치도 않은 곳이었다. 다름이 아닌,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읽었던 ‘오이디푸스’였다.
읽은 지 조금 되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대략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부왕을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출생 그 즉시 버려지고 만다. 그는 다행히도 그 주변을 지나던 목동에 의하여 목숨을 건지고 이웃 나라의 왕자로 입양되어 성장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신탁이 두려워 도망치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친 후에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테베에 역병이 창궐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이 신탁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실천해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그의 의심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진술을 통과하며 점차 선명해지기만 한다. 어렴풋이 그는 그가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음을 느끼지만, 여전히 그는 ‘아버지의 살해’에 대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자신의 양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가져온 사자의 단언에 그의 희망은 산산히 흩어져 부서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신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음을, 자신은 ‘친부의 살해범’이자 ‘모친과 결혼한 근친상간자’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문득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서사 내용이 지금 나 자신이 처한 모순과 동일한 구도 양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 모든 행동들은 역분사되어 그 자신의 근간을 흔든다. 결정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가능성의 나무’라는 꿈도 그 과정에 있어서의 ‘예측’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역분사되어 나 자신의 ‘자유’에 관한 근간을 흔든다. 오이디푸스는 점차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정해진 운명을 결국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지금, 나도. ‘자유의 부재’라는 것이 결국 정해져 있던 결말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으며 괴로워 한다. 만약 이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우리가 바라지는 않더라도 서사의 결말이라면, 나는 이 결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지만 작중의 오이디푸스의 절규를 담은 한 대목이 이 치명적이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듯하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 분이시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허나 이 두 눈은, 이 두 눈만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
오이디푸스는 작품의 말미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이 운명에 대하여 아폴론과 예언자 그 누구도 예언하지 못한 행동인 자신의 눈을 황금 브로치로 찔러 스스로를 단죄하는 행위로 반발한다. 스스로가 믿어 오던 세계가, 행복하던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도 그는 끝까지 그 운명에 대해서 일말의 저항이라도 해 본다.
나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른다. 21세기 과학이 밝혀낸 대로, 나 스스로의 모든 판단, 심지어는 이 글을 쓰면서까지 내리고 있는 모든 결정과 판단들이 사실을 예측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나의 자유 의지’ 따위는 없다는 결론이 불가피하더라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애써 그 결론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까. 나 스스로가 믿어 오던 ‘나 자신의 자유 의지’가, 그리고 그것이 부정됨으로써 무너지는 나의 세계관, 나의 꿈이 눈앞에 확실히 보이더라도, 나는 끝까지 ‘나는 자유롭다’라는 이 선언을 거부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도 안다. 이러한 저항으로 나의 ‘자유 의지’에 관한 참된 결론은 결코 바꾸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이디푸스의 사례를 참고하여 단 한 가지는 분명히 선언해둘 수 있다. 과학이 상기시키는 ‘자유 의지’의 부재라는 결말과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저항 사이 어딘가에 ‘나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진정한 주소가 있다고 말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오이디푸스의 그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그저 한없는 어둠만을 보지 않듯이,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에서 우리가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