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16. 체제(體制)는 안으로부터 재창조될 수 있는가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대중
일러두기
이 글은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로 작성되었습니다.
In the 17th chapter of St Luke it is written: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men” – not one man nor group of men, but in all men! In you! You, the people have the power – the power to create machines, the power to create happiness! You, the people, have the power to make this life free and beautiful, to make this life a wonderful adventure. Then – in the name of democracy – let us use that power – let us all unite!
Charlie Chaplin, “The Great Dictator”, 1940.
지금으로부터 대략 두 달 그리고 조금 더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날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중, 나는 늘 그렇듯 외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때, 스크롤을 내리던 나의 눈에 어떤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버마(Berma)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분명히 군부 쿠데타의 내용, 그리고 그 이후 버마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의 짧은 기사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어떠한 것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각이 출발점이 되어 나는 버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날 이후로 종종 찾아보게 되었다. 일주일 간의 검색 결과로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지금 버마에서는 한 때 역사 교과에서나 본 적이 있던 대한민국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 끔찍한 시간들과 동일한 순간들이 매 순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환경과 배경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시가지 곳곳에 쌓인 가구들로 구축된 바리케이드, 그리고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는 군인들. 그리고 AAPP와 버마 시민들이 SNS로 공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고문의 흔적.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아는 1980년의 광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주변에서는 다소 회의적인 듯 했다. 주변의 회의적인 시각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생각들은 나를 괴롭게 했다. 그들은, 늘 수많은 죽음이 잊혀지듯, 그들의 죽음 또한 잊혀지고 변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1980년의 광주의 죽음이 우리나라의 현재로 이어진 것도, 결국 당시에 반미감정이 사회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미국마저 군사 정권에 등을 돌려버렸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니었냐고, 그리고 광복 또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보다는, 세계 제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미국 등의 승전국이 식민지 해제를 명한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1988년에 버마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과 그리고 지금의 민주화 운동의 되풀이되는 양상을 지적하면서, 이번에도 비슷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결국은 제3자의 개입이 없다면 이러한 교착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그 ‘주변’ 중의 하나였음은, 나에겐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문열 소설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는 내내 그가 나의 귓전에 속삭이는 어떤 말을 계속 애써 부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속삭임은 어떤 명시적 문장의 형태로 나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 그 존재는 다름이 아닌 6학년 담임 선생이 엄석대를 매질하여 꿇려 앉힌 이후, 아이들이 담임 앞에서 엄석대의 잘못을 낱낱이 고할 때에 한병태가 느낀 환멸의 대목, 즉 다음의 대목을 읽을 때 아주 강렬하게 그 스스로를 과시했다.
한 인간이 회개하는 데 꼭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느닷없는 그들의 정의감이 미덥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갑작스러운 개종자나 극적인 전향 인사는 믿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 앞에 나서서 설쳐 대면 설쳐 댈수록. 내가 굳이 석대를 고발하려 들면 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끝내 입을 다문 것은 아마도 그런 아이들에 대한 반발로 오기가 생긴 때문이었다. 내 눈에는 그 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이 대목은 한병태가 같은 엄석대의 압제의 피해자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스스로는 엄석대에 대항하지도 못하다가, ‘6학년 담임’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여 기존의 권력인 ‘엄석대’라는 질서를 파멸시켰을 때야 비로소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때 ‘침묵자’들이 그의 딴에는 ‘변절자’로 둔갑하였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이해의 바탕이 기반이 되었을 때, 마침내 그제서야 저자의 속삭임이 비로소 문장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체제는 외부로부터의 트리거(trigger)가 없으면 결코 재창조될 수 없다.’ – 이것이, 내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는 내내 시달려야 했던 속삭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한병태와 저자의 그러한 문장으로서의 속삭임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겠던 것은 아니었다. 독재에서의 탈피라는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이 결국 일련의 ‘지식층’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에게 가져다주는 무기력과 회의주의적인 측면이 있었을 것임을 나는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엄석대의 패망 이후, 새로운 ‘일그러진 영웅’인 6학년 담임에게 달려가는 급우들, 그리고 그와 동일한 현실에서의 양상을 지켜보면서, 저자는 우리의 현대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겠고, 그저 괴로울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라고,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속삭임은 분명한 진실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속삭임이 너무 ‘혁명’이라는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그리고 한참 앞선 우리나라의 광복까지 모두 우리의 저항은 ‘혁명’의 성립에 결정적 동기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나는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체제의 내부로부터의 재창조 가능성’을 끝까지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시도가 실용성의 측면에서 의미가 상실된다고 하더라도, 잊혀진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적 투쟁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러한 작은 투쟁들, 그리고 작은 가능성이 모여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전환한 역사적 사례가 적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2017년 3월의 헌법재판소에서, 당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낭독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그리고 그 때의 광화문 광장, 그리고 전국의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11시로부터 시작한 이 선고의 실시간 생중계를 보던 끝에 지르게 된 환호성은, 작은 투쟁들이 모였을 때 즉 수많은 ‘알’들이 모였을 때 ‘벽’이라는 체제가 그 안으로부터 충분히 붕괴할 수 있고,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또한 이들 소시민들의 투쟁이 결여되었을 때는 그 어떠한 변화의 초석도 마련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주변이 5.18. 민주화 운동의 뼈아픈 기억에서 군부 정권이 퇴진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압력도 결국은 시민들의 저항으로부터 촉발된 국제 사회의 여론 변화이며, 광복 또한 우리 선조들의 적극적인 저항으로 독립 의사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저자의 관점과 같이, 전적으로 ‘외부’의 개입이 있을 때, <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개혁과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즉 ‘체제는 결코 내부로부터 재창조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의 논거로부터 나는 이제 과감하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속삭임을 거부하려고 한다. 체제는 안으로부터 붕괴되고, 재창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변절자가 그리고 수많은 선동가가 보여도, 그 뒤에 너무 효율적이지도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이 우리를 끝까지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러니함을 탓하기만 하는 속삭임에 대하여 무용(無用)이라는 선고를 내리려고 한다. 그러한 측면은 분명한 진실이고, 우리가 유념해야 될 부분은 맞지만 그것이 ‘독재의 붕괴’,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사람들, 소시민들의 힘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버마의 뜨거운 봄으로 다시 돌아와서, 나는 그들의 가능성을 이제 끝까지 응원할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마의 지금 상황 또한 나의 주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그러진 영웅’이 기다리고 있는 교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들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으려고 한다. ‘일그러진 영웅’ 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 그리고 수많은 잊혀진 목숨과 순간들, 그리고 투쟁들이 지나가는 지금의 시간대에서도 나는 끝까지 희망을 보고 싶다.
이문열 소설가의 속삭임과 다르게, 아직 세상에는 아이러니함을 보면서도, 그 아이러니함 너머의 가치를,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끝까지 믿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