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41. 지성인(地省人)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개미와 인간, 그리고 지성인(知性人)의 변증법적 관계
이 글은 2022. 1. 15.에 작성한 Chalkboard의 〈개미, 인간, 공동체 그리고 ‘지성인’〉를 다듬어 완성한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개미와 인간, 그리고 지성인(知性人)은 모종의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왜 갑자기 ‘개미’를 말하는 것인가, 혹자는 내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중 누군가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등단작인 《개미》를 읽어본 경험을 되살려, 나에게 인간과 개미라는 지구의 두 종(種)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집단생활’과 복잡하게 엮인 일련의 유사성 또는 동질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들은 마치 하나의 집을 짓고 군집을 이루어 서식하는 개미들처럼 사회 속 한 마리의 구성원으로서 의식주를 포함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각종 사물들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기술을 배우며, 무언가를 상상하고 만들어내거나 발견하는 존재라는 점도 개미와 인간의 비교에서 주목할 수 있을 부분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의 출발점은 개미와 인간의 공통점보다는 개미와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있다.
개미와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개미》와 같은 작품들, 그리고 개미 군집에 대한 기존의 곤충학자들의 연구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지중 동물인 개미는 개미대로, 지상 동물인 인간은 인간대로 제각각인 지성을 발휘하여 각자 나름의 문명을 구축한 것만 같다. 장애물에 맞닥뜨리면 구조물을 세우기도 하고, 필요에 의하여 다른 동물들을 사육하기도 하면서 지구 곳곳에 자신의 발자취와 역사를 남겨온 것은 개미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읽으면서, 어쩌면 인간과 개미의 차이점 중 하나 정도는 바로 ‘지성인’이라는 단어와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개미들과는 달리 우리 인간들 중에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움직임과 현황, 즉 공동체라는 광활한 대지 전체를, 공동체의 빅 픽쳐(Big Picture)를 파악하고 그릴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무리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 전체가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전체를 볼 수 있는’ 혜안(慧眼)과 통찰력을 가진 이들 즉 다름 아닌 ‘지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 무리의 존재가 인간과 개미의 지성을 구분하는 하나의 유효한 차이점이 아닐까? 어쩌면 그러한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들이 모여 이루어진 소모임, 이를테면 ‘독서 모임’과 같은 소모임을 구성하면서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행하는 노력과 행위들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지능과 사회를 개미들보다도 더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개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지금으로서는 개미와 인간의 지성에 대한 차이점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생각할 수 있지만 개미는 그렇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 즉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모종의 답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의 유무가 인간과 개미의 지능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차이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사상만큼은 오류의 여지가 있더라도 간직해보고 싶다. 물론 개미들의 지성이 인간보다 우월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그저 인간이라는 한 종에 속하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이 소유할 것을 금하는, 자칫 인간 우월주의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이 같은 위험한 추단을 조용히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혜안을 가진 자, 즉 ‘지성인’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볼 때마다 나는 ‘지성인’이란 어쩌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긴다. ‘지성인’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에는 오직 ‘지성인’에 가까워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들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존 로크의 경험론에 따르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다. 사회 전체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가 속한 공동체, 즉 사회 전체를 경험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경험이 개인에게 있어 항상 완벽한 내적 표상 또는 관념의 정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사회 전체에 속한 사물과 현상들은 그 개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 없을 것만 같기도 하다. 한 인간이 그의 유한한 수명을 바쳐서 거의 무한해 보이는 모든 세계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주어진 시간의 일부를 사용해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본들, 탄광에서 석탄을 캐 본들 여전히 그 개인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무궁무진한 영역은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이 즈음의 생각에 이르면 개미와 인간의 차이점에 대하여 내가 생각했던 ‘전체를 보는 눈’은 결국 인간과 개미 모두에게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개미가 볼 수 없을 땅 전체의 모습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개미보다는 지성인(地省人)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개미가 땅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미가 그가 속한 군락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모르는 채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금까지의 곤충학자들의 관찰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이 속한 사회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운명, 즉 지성인(知性人)은 될 수 없으며 오직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인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
그러나 ‘지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좌절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리라. ‘지성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만큼은 아직 열려 있으며 지금 우리 스스로가 그 가능성을 가슴속에 품고서 여전히 새로운 도전과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남아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가 속해 있는 공동체, 즉 나와 주변 모두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개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류 속에서도 답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부류들은 영원하리라. ‘지성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따라서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앞선 위험한 추단 또는 나의 소망에 따르면 그것이 개미와 달리 인간이 가진 지성에게 주어진 속성이며, 또한 그 특성으로 하여 지금 우리 자신이 특징지어지는 것일지도 모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