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0. 시작하며
…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모두가 시간이라는 동등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거의 경험만큼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만큼 자명하지는 못하다.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과거를 떠올릴 때 어릴 적의 골목길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이들은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의 해맑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아련하고도 밝은 모습 말고도 자신의 어두웠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하염없이 스마트폰을 내리고 또 내려보던 때, 극심한 혼돈에 빠져 모든 세계가 그 색을 잃은 것만 같은 때, 그런 때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모든 과거는 예전의 자신이 통과한 관문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규명하게 해 주는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분명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는 일련의 지시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제안하고 싶어진다. 그 주장이란 즉, “과거의 아픈 경험들이야말로 그 사람을 가장 잘 이야기해준다.”라는 것이다. 나는 심각한 오류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이 주장을 신용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아픈 경험들을 들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상황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도래해 있었다. 대학(大學)에 온 이후 제대로 발병해버린 무기력증이 조금씩 심각해진 탓에 나는 이미 이번 제1학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등록금의 상납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대학의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그 심리 상담 중에 나 자신의 과거 경험들이 문제의 근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은 꽤 시간이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과거 경험이란 아마도 주로 고등학교 때 나 스스로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상담사와 이야기하던 도중, 나는 스스로가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강력한 트라우마나 회상에 대한 거부감을 피력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생각보다 뼈 아픈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는, 솔직하게 말해 처음에 상담사가 고등학교에서의 경험을 회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문제의 해결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나를 설득할 때 일련의 거부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은 나 자신이 책이나 뉴스 기사 등, 수많은 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다른 사람들의 심리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심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생각의 방향을 돌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의 상처를 드러내고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를 덮어두어서는 진정한 자기 초극(Overcome)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글을 통해 확인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과거를 살피고 들추어내어 이를 글의 형태로 추적하는 과정을 과감히 시작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강력한 트라우마와 회상에 대한 거부가 확실히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그렇게 긍정적인 감정을 도식한 얼굴이란 별로 없을 것이리라. 그래도 나는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당한 얼굴을 마주볼 때, 그 얼굴이 지르는 비명일지라도 소중히 들어야 한다. 과거의 나 자신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나 자신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명백히 알고 있다. 과거의 나 자신의 얼굴의 일그러짐이 그 얼마든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오히려 뇌리에 명백히 새겨넣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선언한다. 이것이 “회상(懷傷)”의 시작이라고. 나는 나아갈 것이며 과거는 이제 마주보아야 할 어떤 것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두려워할 수는 있어도 결코 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