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극의 상실, 해석의 상실

2025-04-27 0 By 커피사유

코믹스 세계관 시대1이하의 글에서 밑줄은 원문 중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그어둔 것이다.

현대적 미디어의 출현이 사물의 신비를 소거해 버렸다는 지적은 이미 낡은 것이다. TV가 출현하는 순간, 옛날이야기로, 전승된 민담으로 추측되던 사물들의 실체는 눈앞으로 불려 세워져 낱낱이 발가벗겨졌다. 사물들의 포르노화는 현대 미디어 시대의 본질이며 최종적 목적이다. 아마존의 어떤 어둠 속 동굴에서부터 인간의 침실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누구와 만나 어떤 아침 식사를 했는지, 인간 정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가려진 곳, 숨겨진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기술적 시각화와 매스미디어화는 거리의 폐지와 관련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다. 발가벗겨졌으므로 이러한 시각화는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석’은 사물과 인지 사이에 난 간극을 메우는 지성의 활동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간극이 존재하기에 해석이 가능하다. 니체는 해석을 ‘관점(perspective)’이라고 말했다. 사물과 인지적 주체 사이에 난 간극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떤 신비적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으면 해석은 불가능하다. 여지가 있어야 관점의 공간, 시각적 각도도 열린다. 경험은 사물의 직접 체험이 아니라, 사물과 주체 사이의 여백이 생성하는 잉여적이며 구성적인 지각 체험이다. 이 잉여성과 구성성이 하나의 사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다시 사물들에게 신비를 부여한다. 이 신비는 사물을 향한 인간의 해석적 경로를 여러 층으로 개방한다. 하나의 사물은 그러므로 하나의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물은 세계이다. 사물의 상실은 그러므로 세계의 상실이다. 해석의 여지가 없는 시대에 비평가의 역할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유튜브의 ‘크리에이터’들이 스토리를 요약해 주게 된 것이다.

어벤져스, DC유나이티드, 웹소설에 대해 ‘크리에이터’들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이 ‘세계관’이라는 것은 지금의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역설이다. 역사를 갖지 못한 아메리카 이주민들이 ‘뉴-요크’ ‘뉴-잉글랜드’를 만들고 스타워즈의 건국서사를 스토리텔링 하듯이, 오늘날 OTT 영화플랫폼에서 언급되는 ‘세계관’만큼이나 세계 상실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단어도 흔치 않다. 세계가 상실되었으므로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해석도 불필요하다. 대신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야기가 사라졌으므로 이야기를 가공-조작해야 한다. 사물-세계에 기초한 이야기가 아니라, 허상을 가공하는 이야기가 스토리텔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물-세계를 반영하지도, 경험하게도, 추론하게도, 사유하게도 하지 않는다. 사물-세계와 무관한 생각의 몰입, 그것을 공상이라고 하고, 공상이 실제 삶을 먹어버리는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의 필연성은 역설적으로 실현된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군중컬트적 열광, 할리우드 세계관으로의 몰입, 그것을 이용한 엔터테인먼트산업의 글로벌화는 오늘날 사회체제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며, 삶의 완전한 매트릭스화를 증언하는 단적인 예시이다.

함돈균, 「이야기의 끝과 새로운 ‘사상-계’」, 《사상계》 창간 72주년 특별기념호(2025년 봄). pp. 94-95.

주석

4년 전 즈음, 그러니까 대학에 입학한 첫 해 가을 중에 나는 〈사유 #32. 라디오와 함께 몰락하는 것〉에서 ‘가까움’의 소멸에 대해 썼다. 불성실한 독자라면 이 글에서 ‘가까움’이 정서적 유대를 의미한다고 잘못 해석하겠지만, ‘해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간극의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가까움의 상실’이라는 점을 손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글쓴이의 문장 중 “사물과 인지적 주체 사이에 난 간극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떤 신비적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으면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나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 대응된다: “하지만 시각적 정보가 결여된, 오직 음성만에 대한 청취는 오히려 바로 그 정보의 결여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정보 · 통신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더 온전하고 생생한 재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을 더욱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은 늘 낯섬이었고 낯섬은 항상 대상과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으로부터 왔다. 자신이 채워 나가는 이야기의 시대로부터 단순히 제공된 자극에 순응하는 허상과 망상의 시대로의 전이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나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표어를 되새긴다.

“몰락하고 있는 것은 라디오인 것만은 아니다.”

주석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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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의 글에서 밑줄은 원문 중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그어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