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경우
#1.
다수성은 더 이상 ‘일자’의 관할에 속하지 않으며, 생성도 더 이상 ‘존재’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와 ‘일자’는 단순히 그것들의 의미를 잃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제 ‘일자’는 다수성으로서의 다수성(여러 파편 혹은 단편)으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존재’란 생성으로서의 생성으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니체적인 전도란 이와 같은 것이며, 이것이 가치전환의 제3의 형태가 된다. 생성과 존재, 다수성과 일자는 더 이상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이러한 대립들 자체가 니힐리즘의 범주들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다수성의 ‘일자성’을 긍정하고, 생성의 ‘존재’를 긍정한다. 혹은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우연의 필연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도박하는 자다. 진정한 도박사는 우연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우연의 단편들을 긍정하고 우연의 요소들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으로부터 주사위를 던져서 나타내는 필연적인 수가 생겨난다. 사람들은 이러한 제3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영원회귀의 유희다. 회귀한다는 것은 바로 생성의 존재며, 다수성의 일자성이며, 우연의 필연성이다. 따라서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의 회귀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의 회귀’로 간주할 경우에는 가치전환의 형태를 오해하는 것이며, 근본적인 관계 내에서 생긴 변화를 오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것’은 다양한 것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니힐리즘의 범주에서는 ‘동일한 것은 다양한 것 이전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회귀한다는 것은 다양한 것, 다수성, 생성하는 것으로서만 파악되는 ‘동일한 것’의 근원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은 회귀하지 않는다. 생성하고 있는 것의 ‘동일한 것’만이 회귀하는 것이다.
… (중략) …
차라투스트라가 병에서 회복 중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단순히, 이전에 자신이 견디지 못했던 것을 기꺼이 견디게 되는 것일까? 그는 영원회귀를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단지 심리적인 변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영원회귀’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의의가 변화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병들어 있을 때는 영원회귀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하나의 순환이 아니고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며 동일한 것으로의 회귀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영원회귀는 동물들을 위한 진부하고 자연적인 자명성도 아니며 인간들을 위한 슬픈 도덕적 징벌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따라서 ‘영원회귀 = 선택적 존재’라는 동일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회귀가 긍정과 능동적인 생성으로서 파악된다면, 반동적이고 니힐리즘적인 것 그리고 부정적인 것이 어떻게 회귀할 수 있겠는가? 영원회귀는 원심력이 부여된 바퀴, “어떠한 결의도 타격을 줄 수 없고 어떠한 부정도 모독할 수 없는 ‘존재’의 최고의 성좌”다. ‘영원회귀’는 ‘반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하는 ‘반복’이며 구제하는 ‘반복’인 것이다. 해방하고 선택하는 경이로운 ‘반복’인 것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역, 철학과현실사, 2007. pp. 56-57; 62-63.
#2.
――: 예술의 본질적인 면은 어디까지나 삶을 완성시키고, 완전성과 충만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긍정이고 축복이며, 삶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것들을 표현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예술가의 힘과 훌륭함이다: 그는 그것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염세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긍정한다.디오니소스적 예술을 니체는 예술의 본래적 기능을 이행하는 예술이라고 평가한다. 즉 데카당스 예술과 달리 ‘삶의 빈곤이 아니라 삶의 충일로 인해 고통 받는 자의 예술’인 것이다. 이런 예술 개념은 곧 니체가 제시했던 해석으로서의 예술의 정의를 충족시킨다. 어떻게 이런 구조가 가능하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에게 삶은 힘에의 의지의 근원적 활동에 의해 구성되는 투쟁과 모순의 장이다. 약자가 이런 삶에서 고통의 근원만을 보는 반면, 강자는 의지의 근원적 활동력과 생산성을 긍정한다. 그 자신 이런 의지의 근원적 활동과 일체가 되고, 그 활동에 도취하며, 그 활동을 하고자 한다. 그의 창조력은 그의 미적 세계를 창조해낸다. 이 미적 세계는 그의 삶을 상승시키는 수단이 된다. 미적 세계는 그에게 의미의 세계이자 필연의 세계다. 하지만 고양된 삶은 기존의 미적 세계의 파괴를 요구하며, 새로운 창조는 불가결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창조 내용의 유의미함과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의 모순과 파괴를 필연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파괴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 새로운 창조를 요구하며, 새로운 창조에 의해 다시 삶의 고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삶을 위해 파괴시의 고통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삶을 위해 영원한 파괴와 창조의 과정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이것은 곧 삶의 제약 없는 생존욕과 생존의 고통에 대한 인정이자 긍정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제약 없는 힘과 삶에의 의지에 대한 인정이자 긍정이다. 이런 긍정을 통해서 그는 위버멘쉬적 삶을 중단 없이 추구한다. 이런 강자의 모습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이런 인간의 예술을 디오니소스적 예술이자 해석적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 주체에 대해 “그들의 창조 행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감사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디오니소스적-해석적 예술은 니체에게는 ‘비극적 예술’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속성이 곧 비극성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적’과 ‘비극적’은 따라서 니체에게서는 동의어다. 그러므로 니체가 ‘비극은 삶을 긍정하는 최고의 예술’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정당하다. 비극적-디오니소스적-해석적 예술가는 삶의 고통스러운 측면을 공포 없이 바라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상태를 최고의 소망 사항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다.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그 상태를 찬미하는 예술 활동을 한다.
니체의 예술생리학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디오니소스적-비극적-해석적 예술관의 도출에 있다. 예술생리학의 이런 핵심을 아래의 인용문보다 더 잘 반영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술이고 예술일 뿐이다! 예술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대단한 자, 삶의 대단한 유혹자이며, 삶의 대단한 자극제다.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 pp. 672-675.
삶을 부정하는 온갖 의지들을 능가하는 유일한 대항력으로서의 예술, 안티크리스트적인 것으로서, 안티불교적인 것으로서, 안티허무적인 것의 전형으로서의 예술.
인식자의 구원으로서의 예술 ―― 삶의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성격을 직시하고, 직시하기를 원하는 인식자의, 비극적-인식자의 구원으로서.
행위자의 구원으로서의 예술 ―― 삶의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성격을 단지 바라볼 뿐만 아니라, 살아내고 살아내고자 원하는 행위자의, 비극적-전투적 인간의, 영웅의 구원으로서.
고통 받는 자의 구원으로서의 예술 ―― 고통을 원하고, 미화하고, 신성시하는 상태에 이르는 길로서, 고통이 거대한 희열 형식인 상태에 이르는 길로서.
#3.
이렇듯 나는 내가 사고에 요청했던 것, 즉 반항과 자유와 다양성을 부조리한 창조에 대해서도 요구한다. 부조리한 창조는 그다음에 그것 자체의 본질적인 무용성을 드러낼 것이다. 지성과 정열이 서로 혼합되어 서로를 열광케 하는 나날의 노력 속에서 부조리의 인간은 그의 힘들의 핵심이 될 어떤 규율을 발견한다. 거기에 필요한 열성과 집요함과 통찰은 정복자 같은 태도와 결합된다.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인물에게 있어 그들의 작품은 적어도 그들에 의해 작품이 정의되는 만큼 그들을 정의한다. 배우는 이미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 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 이 모든 것에는 현실적 의미가 없다. 자유의 길에서 아직도 한 걸음 더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혈족의 정신들인 창조자나 정복자에게 요구되는 최후의 노력은 자신들의 기도(企圖) 그 자체로부터도 스스로를 해방할 줄 아는 일이다. 즉, 그들의 작품 자체 ― 그것이 정복이건 사랑이건 창조이건 ― 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개인의 삶 전체의 근본적인 무용함을 완성하는 것 말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깨달음이 그들로 하여금 과도할 만큼 열광적으로 삶 속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하듯이,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들은 보다 용이하게 작품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남은 것은 운명이다. 오직 그 출구만이 숙명적인 운명이다. 죽음이라는 그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이건 행복이건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를 얽매어 놓던 것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 재도약하는 것이다. 그것은 ― 아마 신화에서 ― 인간의 고통의 깊이 외에는 다른 깊이가 없는 신화, 따라서 인간의 고통처럼 다할 길 없는 신화에서 전개된다. 그냥 재미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눈멀게 만드는 신들의 우화가 아니라 도달하기 어려운 예지와 내일 없는 정열이 요약돼 있는 지상적 얼굴, 몸짓, 연극에서 말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175-176.
#4.
그렇게까지 오래 되지 않은 과거, 나는 후배에게 내가 글쓰기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함축해 보냈다. “언어라는 형식체계에서 자신만의 합계를 내는 것, 단어와 단어 사이의 배치 관계, 문장과 문장의 배치 관계, 문단과 문단의 배치 관계 이들 모두를 통해 뒤엉켜 있는 머릿속 인상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것.”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나는 하나의 통일성 부여로 보고 있는 셈인데, 실로 그러하다. 어느 글이든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기호들은 단일하게로는 별다른 함의를 가지지 못한다. 이 문장에서 만약 ‘문장’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텅 빈 종잇장 한가운데에 따로 떼어 놓고 본다고 상상해보자. 그 광경은 나름대로 강한 인상을 남길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얻는 종류의 의미는 태동하지 못한다. 단어가 지시하곤 하는 현실의 사물들이, 구체적인 실재자들이 추상화되어 탄생하는 개념들이 으레 그러하듯 어떤 것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존재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존재는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있음을 세계에 보이는 것이다.
… (중략) …
그러므로 이 모든 경험에 비추어 나는 글쓰기를 과거와 동일하게 의식의 지속, 일상적 사건들을 나름의 술어로 되짚는 바로 그 의식의 지속이라 쓰면서 그렇지 않다고도 동시에 쓴다. 글쓰기란 그 재료가 한 사람이 겪은 일들과 그것에 대한 인상 및 추론들로 구성되지만, 작가는 글에서 사건 · 정동 · 이야기의 배치를 선택함으로써 과거와 경험을 다시 한 번 새로운 관계 속에 세운다. 하나하나로 분해된다면 의미를 상실해버릴 기호들을 하나의 실로 연결하며 그는 “언어라는 형식체계에서 자신만의 합계를 낸다.” 삶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인간은 그 몸짓을 글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모조리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운명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을 직시하는 인간은 글쓰기 일체를 통해 이 위대한 인간의 몸부림을 그려내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 말 그대로, “문단과 문단 사이의 배치 관계, 문장과 문장의 배치 관계, 단어와 단어 사이의 배치 관계” 이들 모두를 통해서.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산정에서 시지프는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응시한다. 밀어올렸던 바위는 이제 그가 출발했던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세계는 당초의 위치로 회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는,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기꺼이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돌아가는 이 영원회귀, 세계는 변한 것 없으면서도 모두 변했다.
커피사유, 〈사유 #54. 부조리한 글쓰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