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화인(修己和人)
관계의 시작은 관심이다. 농익은 관계는 설익은 관심으로부터 발전된다. 남태령에서 촉발된 돌봄은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해 번져나갔다. 나 역시 전태일 의료센터에 기꺼운 마음으로 연말 성금을 보냈다. 반세기 전의 전태일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우리의 분노가 좌우 아닌 생사에서 비롯되었듯, 전태일 역시 노동 현장에서 죽음을 몸으로 감각했다. 그의 저항은 생명의 위협에 분노하는 생의 주체로서의 외침이었다. 거기에 좌우는 없었다. 생명의 고귀함을 가장 잘 알았던 이가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생명을 부르짖었다. 그가 성자여서, 그가 비범해서, 그가 유별나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기를 돌볼 줄 알았다. 스스로의 불우한 과거에 매몰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세울 수 있는 이는 타인의 아픔을 살필 여력을 가지게 된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트라우마가 곧 사회의 트라우마임을 알게 된다. 품을 넓히고 품을 수 있게 된다. 전태일이 노동운동가를 넘어 생명운동가로 읽혔다. 그는 돌보는 자였다. 44년 전의 5 · 18 주먹밥, 54년 전의 전태일, 잊고 있던 돌봄의 역사다.
양애진, 「계엄에서 움튼 계보」, 《사상계》 창간 72주년 특별기념호(2025년 봄). pp. 66-67.
주석
고사성어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이 있다. “자신을 닦아서(수기, 修己)”, “타인을 다스린다(치인, 治人)”는 뜻이다. 공자는 오래 전부터 자기 자신을 닦아 덕을 오롯이 체득한 이만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으며 사회에 나아가 공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준비된 공직자’가 아닌, 자신을 충분히 닦아서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관심을 주고 그리하여 농익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민이다. 그러므로 나는 원래 고사성어에서 단 한 글자를 바꾸기로 한다. ‘다스릴 치(治)’에서, ‘어울릴 화(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