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 ‘이야기’

2025-04-26 0 By 커피사유

이야기는 정보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 속에 있다. 이야기를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참여함으로써 이야기 위에 삶의 집터를 짓는다. 이야기의 영토를 쇄신하고 이야기에 비추어 제 삶을 반추한다. 상상도, 신성도, 균형도, 반성도, 이야기를 거울삼음으로써 유추되는 인간 경험의 양상들이다. 최초의 이야기인 신들의 이야기가 성스럽다고 할 때, 그것은 신들의 성스러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말해야 한다. 신들이 인간의 이야기 속에서 성화했다고 말이다. 이야기의 무한성이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신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인간 지성이 무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끝없는 영토로 개방된 이야기의 신비, 잡히지 않는 아우라 속에 신들이 거주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는 멀리 있는 것의 가까운 현존이다. 어떻게 멀리 있으면서 동시에 가까울 수 있는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발화되지만, 그 얘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언제 끝나는지도 모른다. 발화된 이야기는 잉여와 결핍으로 인해 명확히 규정되지도 않는다. 무기원성, 무확정성, 미지성(未知性)이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하게 만들며, 이야기의 이야기를 또 이야기하게도 만든다. 멀리 있는 이야기를 여기로 불러들였으나, 그러므로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석’이라고 부른다. 아우라는 해석을 부르며, 해석을 통해 이야기에는 다시 아우라가 깃든다. 이야기들의 탄생과 전승을 통해 이야기들은 신성해진다. 신화의 시대는 끝났지만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이상, 신성한 이야기는 종결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무한성은 해석의 무한성이다. 이것은 삶이 종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크레온의 법정이 안티고네에게 요구한 것을 일종의 ‘정보’였다. 크레온은 임금의 법, 국가의 법, 산 자들의 공동체 법에 대항하는 너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고 안티고네에게 묻는다. 크레온은 명확한 출처, 변형되지 않는 확정적 문자, 공동의 이익이라는 계산가능한 효과를 묻는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거꾸로 응수한다. 그녀는 나의 법은 누가 만들었는지 출처를 알 수 없으며, 언제 만들었는지 기원을 알 수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법은 미래에도 남을 것이며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크레온의 법과 맞서고 있는 자기의 법이 현재를 넘어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과거가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시간과 닿아 있으며, 앞으로도 무한한 시간으로 열려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가 “산자보다 죽은 자를 섬길 시간이 더 길다”라며 ‘시체-죽은자’를 애도할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녀의 법이 영원성에 닿아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안티고네의 법은 과거-현재-미래에 ‘지속’한다. 크레온의 법이 ‘정보’라고 한다면, 그녀의 법은 ‘이야기’이다. 지속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녀의 법이 미래에도 존속하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인 해석을 낳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삶이 무한성의 차원으로 개방되어 그녀의 법이 끊임없이 숙고될 사유의 대상이며, 사유를 낳는 텍스트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그녀의 법은 현실 속 크레온의 법정에서 무력하다. 명확한 출처와 공리주의에 기초한 크레온의 법정에서 안티고네가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모호하며, 수수께끼이며, 그 말뜻의 범위와 속내는 확정되지 않으며, 협소한 실용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산 자들의 세계는 실용주의를 요구한다. 협소한 실용주의에는 모호함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실용주의는 모든 것을 아마존사이트 도구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함돈균, 「이야기의 끝과 새로운 ‘사상-계’」, 《사상계》 창간 72주년 특별기념호(2025년 봄). pp. 92-93.

주석

학문을 지속하다보면 일종의 ‘시지프스 신화’의 주제를 인식하게 된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떨어져내릴 바위를 또다시 한 번 밀어올리는 그와 인간은 결코 다르지 않다. 도가(道家)와 니체가 만나는 지점에서 두 철학이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결국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일정한’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구분하여 이것과 저것을 논하곤 하니까. 따라서 장자가 비판한 것처럼 크레온의 법은 단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관통하는 단 하나는 ‘이야기’, 명징하게 의미 구역을 획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모호한, 그러나 따라서 열려 있는 경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는 바로 그것이니까. 인류의 역사 내내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에 의해 덧붙여지거나 생략되면서 그 오묘함을 지속해왔다.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꿈을 꾸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기꺼이 그렇게 한다. 물론 어른들의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것과는 달리 훨씬 교묘한 정치 · 가치 · 세계관의 형태로 뿌리내린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글쓴이의 지적대로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의 신화 혹은 믿음, 또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우상’ 위에서 사는 존재이기에 ― 즉,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자신의 존재로 그 이야기를 갱신하는 존재이기에 ‘삶을 논의하다’가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와 같은 뜻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