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era Obscura

2025-09-03 0 By 커피사유

#1.

문학은 사유로 자연을 재현하려는 목적을 가진 만큼 뭇 예술 중에서 가장 복잡하다.

감정을 묘사하고, 색채, 일광, 중간색, 뉘앙스 따위를 생생하게 되살리며, 좁은 공간이나 바다, 풍경, 사람, 건물 따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회화는 이것이 전부이다.

조각은 질료 면에서 이보다 더 제한되어 있다. 조각은 풍부하기 그지없는 자연과 다채로운 형태의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 데 돌과 한 가지 색깔 말고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다. 따라서 조각가는 대리석의 형상 밑에 엄청난 이상화 작업을 감출 수밖에 없고 그것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관념은 한층 더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모든 효과, 모든 속성과 친숙해져야만 한다. 그는 자기 안에 집중 거울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상상을 통해 온 우주를 그 거울에 비출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시인은 물론이고 관찰자 정도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기억해야만 하고, 자신이 받은 인상을 단어의 선택 작업 속에 각인시켜야 하고, 그 인상을 이미지의 도움으로 치장하거나 그 인상에 원초적인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 이철의 역, 문학동네, 2009. p. 15.

#2.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작가나 현학자가 저마다 자신의 작품이나 이론을 위해 끌어쓰는 그 세세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을 굳이 빌리지 않고도, 관찰표현이라는 확연히 다른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문예물을 통해서 지적 수준이 높든 낮든 모든 부류의 사람과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탁월한 사람들 중에서도 관찰의 재능은 갖추었으나 자신들의 생각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재능은 갖추지 못한 사람이 꽤 많다. 그런가 하면 탄복할 만한 문체는 갖추었으나 모든 것을 보고 기록으로 옮기는 그 명민하고 신기한 재능의 도움은 받지 못한 작가도 많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바로 이 두 지적인 성향으로부터 문학적 안목이냐 문학적 솜씨냐 하는 것이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기법이 능하고, 어떤 사람은 발상이 능한 것이다. 기법이 능한 사람이 리라 연주는 뛰어나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사념에 빠져들게 만드는 숭고한 하모니는 단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발상에 능한 사람은 악기를 다루지 못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시를 짓는 사람이다.

그 두 능력의 결합이 완벽한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이 결합만 해도 드물고 운이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천재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좀더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만으로는 아직 예술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만드는 의지를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재능에 필요한 이 두 가지 본질적인 조건을 갖추고 나서도 실질적으로는 철학자나 다름없는 시인이나 작가에게는 어떤 정신 현상이, 과학으로는 해명하기 어려울 만큼 불가해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정신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 속에서 시인과 작가들이 진실을 예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천리안이다. 혹은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 자신들이 있고 싶은 곳으로 그들을 옮겨주는 모종의 능력 같은 것이다. 그들은 유추를 통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이게 만들어내거나, 대상이 그들에게 오든지 그들 자신이 직접 대상에게 가든지 해서 대상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낸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 이철의 역, 문학동네, 2009. pp. 15-17.

#3.

스스로가 생각하는 미학을 온전히 녹여낸 소설 한 편을 자아내고 싶은 욕구는 여전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부터 출발하여 알베르 카뮈까지 거칠다면 거칠게 순탄하다면 순탄하게 돌아온 정신적 여정으로부터 발견한 어떤 인간상이나 세계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자신의 더 많은 자리를 요구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시기에 열리는 《대학문학상》에 단편소설로 응모나 해볼까 생각했지만, 스스로의 기질은 펜을 들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미적인 구도 혹은 기교에 대한 생각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부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거닌 계보를 통해 상당히 구체화되었고 당장이라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지만, 하나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나 자신이 쓰고자 하는 팔레트에 가진 물감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여실하게 느낀다.

발자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에게 부족한 것이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 자신들이 있고 싶은 곳으로 그들을 옮겨주는 모종의 능력”이다. 주로 시간을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립 속에서 이미 세상에 없는 이들과 대화하는데 보낸 나는 내가 실존하는 바로 이 세계를 재구축하는데 쓸 수 있는 재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대학 졸업 이후 곧바로 진학하는 대신 1년 정도 휴식기를 가지겠다고 선언한 것에 이 충분한 양의 색채를 확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영향을 미친 것은 따라서 사필귀정이었다. 사회 문제에 높은 관심을 두어 신문 기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우리 사회와 다른 토양 위에서 벌어진 역사들에 대해서도 간간히 살펴보곤 하지만, 기록은 어디까지나 기록일 뿐 한 사람의 정신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생생한 한 폭의 그림을 언어의 형태로 풀어내려고 한다면 자신의 오감으로 확보한 기초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딱 넷 밖에 없는 나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더 많은 인간의 상들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손을 뻗어본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뜬 세계에서 벌어진 일 내지는 당시의 사람들을 묘사한 기록들을 수집해 부족한 재료라 하더라도 가작들을 속에서 그려내는 일들을 계속하면서도, 스스로의 펜을 날카롭고도 생생한 붓으로 다듬기 위해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자연이 곧바로 튀어나올 정도의 생생함을 안으로 가득 받아들이는 일에도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