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4. 2025. 3. 1. ~ 2025. 3. 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개강을 앞둔 지금, 지난 28일 에세이에 썼듯 나는 지난 4년 대학에서의 여정이 전부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에 젖어 있다. 졸업 논문을 두 편이나 써야 하기에 가장 냉철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라는 점을 알지만, 주책맞게 감성에 젖어 학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대학 생활과 내내 함께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독서회가 오늘 저녁에 마무리됨에 따라 자연히 떠오르게 되는 저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두 가지 직감이 피어오르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인간의 근본적인 불완전성, 그리고 영원한 부조리가 운명처럼 반복되리라는 바로 그 두 직감.
어쩌면 내가 오늘처럼 수많은 질문과 꼬리를 잇는 무거움들에 푹 잠겨서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가 이 직감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느끼기로는 상술한 두 직감은 예전에 고백한 바 있는 주요한 두 욕구 중 후자의 것,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의 등장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독서회에서 나는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 두 분께 이러한 욕구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를 여쭈어보았다. 두 분께서는 소설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비슷하게 재현하는 이른바 ‘습작의 시기’를 겪는다고 말씀하셨고, 그렇다면 내가 시작하고자 하는 그 소설가는 누구인가 궁금해하셨다. 답은 간명했다. 나는 거의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이미 3년 전부터 점찍어두고 있던 그 이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를.
내 삶이 〈고독〉이라는 키워드로, 도중의 철학적 여정까지도 모조리 포함해서 요약될 수 있음을 인식한 이래로 나는 무언가 카뮈처럼 문장과 문체에서까지도 철저한 고립감이 느껴지는 문학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괴델, 에셔, 바흐》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게임 《OMORI》가 그런 것처럼 최대한 여러 시니피앙들과 암시를 이용해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통상의 시작과는 다르게 텅 빈 방, 아예 무의 배경을 상상했고1고등학교 문학 선생님 한 분께서 보통 처음 소설을 쓰는 경우 일상 생활의 일부, 실제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시작한다는 점에서 내 아이디어가 상당히 특이하다고 말씀하셨던 기억 때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 통상의 시작이라는게 존재하기는 할까? …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그것도 내가 예술적이라며 감탄했던 그 표현 방식을 최대한 비슷하게 내가 재현해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서 단지 그를 대명사로 지칭할 뿐인 내 첫 작품의 스케치를 그려본다.
여전히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라는 당초의 문제부터 소설마다 독자적으로 가지는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고 내가 느낀 가장 예술적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저 중대한 소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소설 쓰기의 첫 단계에 선 나는 그저 눈 앞의 ‘문’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문이 내 테마이며 최후까지 따라붙을 운명임을, 따라서 소설의 제목이 될 수밖에 없을 그런 것임을 안다.
나는 내 구상에 《하얀 문(La Porte Blanche)》 이라는 이름을 붙일 뿐이다.
#2.
우연이 영감을 연속적으로 가져다주는 경험, 앓아오던 요통이 무언가가 탁 치고 지나가자 갑자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치료되는 경험. 번뜩이는 정신, 그리고 상당한 흥분. 오늘 내가 잠깐의 산책 겸 외출에서 얻은 내 철학의 중대한 결과물이다. 문자 그대로 수 시간 동안 나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마침내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으니까.
구성 단계에 진입한 내 야심작, 소설 《하얀 문(La Porte Blanche)》 이야기다. 제목을 떠올린 대략 4일 전의 번뜩임에 이어 미적 구조와 전개의 양상, 궁극적으로는 모든 서사가 그릴 〈하얀 문〉의 구조를 계시하는 오늘의 우연. 그것의 정체는 4년이라는 시간 끝에 마침내 얼마 전에 끝낸 《괴델, 에셔, 바흐》 독서 모임에서 은퇴하신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책, 미셸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였다. 《괴델, 에셔, 바흐》에서 호프스태터도 주목한 르네 마그리트의 〈두 개의 신비〉를 주제로 한 이 논평은 도대체 이 그림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혼란에 빠져드는지를 따져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접한 캘리그램(calligram)과 그 해체의 도식이 자연히 연상된 《괴델, 에셔,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과 결합한 끝에 저 〈영원회귀〉에 대한 직감, 대체 무엇이 ‘문’이냐는 의문 그 모두를 모조리 싸들고서 오늘의 이 기가 막힌 발상으로 된 것 같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세워본다.
그 영감은 자세히 서술하면 재미가 없을 종류이기에 짓궃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선에서 끝내기로 하겠다. 캘리그램의 핵심은 문장(텍스트)가 그림의 선을 구성함에 따라 그들의 지시 관계가 층위에서 뒤섞여버린다는 점에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두 개의 층위가 섞이지만, 나는 이 이상을 추가하더라도 ― 즉, 이성 푸가에 성부를 하나 더 추가하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하여 몇 달 전《OMORI》에서 얻은 〈하얀 문〉의 이미지와 르네 마그리트의 그 유명한 문장, 마침내 니체의 위대한 잠언이 서로를 구성해버리면서 〈하얀 문〉 모양의 소용돌이를 구성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 그림 솜씨가 부족하여 노트에 그린 스케치는 완벽하지 않기는 하나 아래와 같이 컴퓨터로 그린 이미지까지 기록해둔다면, 적어도 이 소설을 탈고할 때까지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


… 여튼, 나는 뒤섞인 것들이 풀려 나오면서 와장창 무너지고 서로 부대끼는 내면으로 가득한 시간 속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새 학기를 시작하기 좋은, 나아가 글을 쓰기에 아주 좋은 그런 상태 말이다.
#3.
개강일. 그런데 엄청난 아이러니 위의.
한 달 즈음 전에 나는 내가 직감하는 운명에 대해 쓴 바가 있었다. 당시 나는 “물론 이제 내가 비판과 부정이라는 철학의 귀중한 가치를 적극 내면화시킴에 따라 수많은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아가 지금 나 자신이 처한 이 눈폭풍이 더욱 세게, 죽일 듯이 몰아칠 것임을 안다.”라고 썼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다.
정원 외를 아침에 막 신청했을 뿐이지만 5학년이고 졸업을 앞둔 사정이 있으니 교수가 승인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는 희망 위에서 나는 12시 30분에 윗 공대에서 열리는 〈기계학습 개론〉 강좌에 참석하기 위해 기숙사를 나왔는데, 날씨가 상당했던 것이다. 기숙사삼거리에서 윗 공대로 올라가는 그 오르막길, 내가 수백 번 걸어오르고 다시 내려왔던 그 길이 하얀 기억들로 뒤덮였고 그 사이에 이미 지나가버린 사람들의 검은 발자국만이(보도블럭이 눈이 녹음에 따라 젖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진짜 검게 보였다.) 이리저리 흩날려 있을 뿐인 그 길 말이다. 좁은 길을 오르던 도중 나는 풍산마당 언저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생각해보니 정말 웃겼던 것이다. 마치 한 달 전 내가 쓴 문장이 현실로 되어버린 듯한 느낌, 하늘에서 죽은 니체가 내 문장을 보기라도 하고 ‘옛다!’ ― 하며 이 모든 광경을 아래로 던져준 것만 같다는 느낌. 이 모든 생각 ― 아니, 착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드디어 미쳤나 하는 생각들. 그것 모두가 칵테일 잔에 술이 섞이듯 혼합되어 세워진 끝내주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잠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윗 공대로 올라가 교수가 눈길 덕에 조금 늦게 도착한다는 말을 전해들으며 나는 며칠 전에 구매한 파란 가죽 수첩을 펼쳐 《하얀 문》을 위해 끄적거려 둔 여러 생각들과 영감들 뒤에 다음의 대목을 적어두었다. 나는 그것이 수정되거나 내가 완성하려는 이 작품에서 빠질 수도 있음을 알지만, 구태여 여기에 문장들을 그대로 옮기려 한다. 내가 그 순간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겹쳐 보았으며, 어떤 갈등 속에 있었기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름 모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그는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기억들이 소복히 내려앉은 그 오르막에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버려 드러난 보도블럭들이 보였다. 무게로 젖어버린 길들은 실타래가 이리저리 얽혀있듯 종이 위를 이러쿵저러쿵 휘저었고, 이미 갈 길을 가버린 사람들이 한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만을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남자는 공간이 이토록 변모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는 대학의 마지막 해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던 개강일에 이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난리법석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쉬워했었다. 때가 부적절한 것 같기도 했지만 순간 그는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를 붙잡고 잠시만 같이 서 있어줄 수는 없겠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러나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눈은 펑펑 내려치며 얽히고 섥힌 끝에 이제는 누가 누구의 발자국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검은 글씨들을 조용히 덮어버릴 뿐이었다.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가 그의 얼굴 위로 떨어지더니 급작스레 움츠러들었고 결국은 작은 방울들로 흩어져버렸다. 남자는 괜스레 소리내어 웃고 싶어졌다.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들어올려 힘없는 웃음 하나를 애써 그려보는 것 뿐이었다.
Appendix.
주석 및 참고문헌
- 1고등학교 문학 선생님 한 분께서 보통 처음 소설을 쓰는 경우 일상 생활의 일부, 실제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시작한다는 점에서 내 아이디어가 상당히 특이하다고 말씀하셨던 기억 때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 통상의 시작이라는게 존재하기는 할까? …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그것도 내가 예술적이라며 감탄했던 그 표현 방식을 최대한 비슷하게 내가 재현해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