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서관 #3. 일인가, 노역인가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사유 #29.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아 마련한 공간으로,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읽거나 접한 책, 글귀 중 일부를 인용,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주석을 덧붙여가며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자주 가던 어떤 카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내리고 있던 평가를 조금 부정적으로 변동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뉴스를 보았다. 국내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S 기업이 직원들에게 별도의 인센티브를 제공하지도 않고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게 했다는 보도였다.
물론 기사란 1보이며 후속 보도가 나온 것도 아니어서 정확도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보도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 기업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개인적으로 이 기사에 대하여 상응한다고 머릿속에서 제 멋대로 떠오른 글 한 편을 인용해둔다. 도저히 적어 두지 않으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것 같아서, 생각의 강력한 욕망의 표현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 「쓸모 있는 일과 쓸모 없는 노역」 에서
어떤 분들은 이 강연의 제목부터 이상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일이라면 다 쓸모 있다고 가정하고, 대부분의 부유한 사람은 일이란 다 바람직하다고 여기니 말이죠. 부유하든 아니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어쨌든 그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하는 말처럼 ‘고용된’ 것이죠. 또 얼마나 ‘근면한지’ 노동의 신성한 대의를 위해 휴일이나 삶의 즐거움이라고는 전혀 갖지 못하고 살아가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부자들은 대개 행복한 노동자라며 칭찬과 축하를 아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노동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현대 도덕적 신조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는 정말 편리한 믿음이 아닐 수 없어요. 하지만 그 부유한 이들을 자신의 노동으로 먹여 살리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말고 조금은 더 깊이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일단 인류는 노동하지 않으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먹고살 거리를 거저 주지 않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 힘들여 일해 스스로 얻어야 해요. 노동이 아닌 다른 측면에선, 자연이 인간 개개인과 전 종족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행동을 단지 참을 만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주잖아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무적인 노동에는 자연이 어떤 식으로 보상해주지 않는지를 이제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사실, 병들어 아픈 게 아닌 다음에야 특정한 조건에서는 일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데에 다들 동의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언급한 식의, 어떤 노동이건 가리지 않고 칭송하는 위선적인 태도에 맞서서 축복은커녕 저주라고밖에 할 수 없는 노동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지적해야만 합니다. 그러다가 죽은 수밖에 없더라도, 감옥이나 구빈원에 보내지더라도 – 그렇게 될 테니까 – 노동자가 팔짱을 끼고 노동을 거부하는 게 노동자와 사회에 더 나은 일이라고 말이에요.
보다시피 좋은 일과 나쁜 일, 두 종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을 밝혀주는 축복에 가까운 일이 있고, 삶에 짐을 지우는 그저 저주인 일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일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그건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한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이 인간답지만 다른 종류의 일을 거부하는 것 역시 인간답습니다. 이때 일에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그 희망으로 일이 할 만한 가치를 갖게 된다면, 그 희망이란 본질상 어떤 것일까요?
내 생각에 희망은 세 겹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즉 휴식에 대한 희망, 생산물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여기서 휴식이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충분한 휴식을 말하지요. 생산물은 바보나 금욕주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대개 소유하고픈 물건을 가리키고요. 즐거움이란 일하는 동안 우리 모두 의식할 수 있을 만큼의 즐거움을 뜻합니다. 실을 쥐고 부산스럽게 연신 꼼지락거리던 사람이, 실이 없을 때 느끼는 상실감 정도를 주는 한낱 습관으로서의 즐거움이 아니라요.
휴식에 대한 희망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는 데에 어떤 즐거움이 있더라도 모든 일에는 분명 수고가 따르게 마련이지요. 잠자는 우리 몸의 에너지를 깨워 움직이게 할 때의 동물적 고통과, 만사가 편하게 흘러가는데 그걸 바꾸는 것에 대한 동물적 두려움. 이러한 동물적 수고에 대한 보상이 곧 동물적 휴식입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곧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휴식은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 만큼은 되어야 해요. 노동하느라 소진한 에너지를 회복할 딱 그만큼으로는 부족한 것이죠. 또한 걱정에 시달리면 휴식을 누릴 수 없으므로 이런 점에서도 동물적 휴식이어야 해요. 이러한 종류의 휴식을 이만큼 누릴 수 있다면 일단은 동물보다는 못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생산물에 대한 희망입니다.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생산을 위해 일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무언가를 생산하는지는, 적어도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쓸 수도 없는 물건이 아닌 어떤 것을 생산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어요. 우리가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그에 따라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면 일단은 기계보다는 낫습니다.
마지막으로 일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 오늘 오신 청중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는 – 아니 대부분의 청중에게 – 이런 희망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까요! 하지만 모든 생물은 에너지를 행사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 동물조차 유연함이나 속도나 힘을 행사할 때에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일하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힘을 가하여 곧 세상에 나올 어떤 것을 생산하는 인간은 몸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에너지까지 쏟아붓습니다. 기억과 상상력의 도움을 받는 것이죠. 단지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과거 많은 사람의 생각이 그의 일을 돕습니다. 그렇게 인류의 일부로서 창조하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일한다면 우리는 인간다운 존재로 살게 될 것이고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이렇게 휴식하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해서 생산한 것을 사용하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매일의 창조적 기술을 행사하며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무가치한 일이고 노예의 일입니다. 살려고 하는 노역이고, 노역을 하려고 사는 것이죠.
윌리엄 모리스, 「쓸모 있는 일과 쓸모 없는 노역」.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