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0. 2024. 9. 8. ~ 2024. 9. 1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0. 2024. 9. 8. ~ 2024. 9. 19.

2024-09-26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반드시 가까움이 물리적 거리와 연관된 개념인 것은 아니다. 서울과 진주라는 수백 km의 거리에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때가 있고, 반대로 바로 곁에서 삶의 일부를 같이 하더라도 가장 멀게 느낄 수 있는 때도 있으니 말이다.

대학 새내기의 코로나로 얼룩진, 그러나 다시 볼 때 어떤 측면에서는 감사한 나날들,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심적으로도 가족과 가장 가까운 시간들을 보내고 마침내 관악의 땅 위에서 동기들과 부대끼기 시작한 나날들. 그 나날들을 지낸 1년만에 나는 독서 모임을 같이 하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께 스스로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L’Étranger)》의 주인공 ‘뫼르소’가 된 것 같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카뮈의 작품에서, 재판받고 사형까지 언도받은 이 뫼르소는 완벽한 섬이요, 홀로 울부짖는 가장 솔직한 자였으니까. 소리를 질러도 듣는 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었던 뫼르소.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대학의 문을 들어오면서 느꼈던 기대감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그 자리에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하는 그 문장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민족주의에, 그리고 학벌주의에 반기를 들었으나 외롭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술하였듯이 수백 km 떨어져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는 못하더라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책을 보내며 새로운 관점의 지평을, 누군가는 인사를 건네며 고향 친구와의 추억을, 누군가는 오랜만에 다시 연락을 해 오며 오래 전의 기억들과 향수들을 전해주는 그런 순간이 있다. 일상이고 또한 이미 약속된 일이더라도 함께 온라인으로 모여 도서의 문장과 그 속에 담긴 뜻 그리고 올바른 해석, 철학 · 시 · 문학에서부터 물리학과 생명과학, 인공지능과 예술 · 음악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지적 동반자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지각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오랜만에 본 중학교 후배, 그리고 이제는 대학 같은 과 후배가 된 그 사람이 생각치도 못한 것, 즉 책을 누르는 무게추와 케이크를 선물하고, 그리고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모든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들어주는 그런 고마운 순간들이 있다.

오늘 같은 날 가장 찬사와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할 두 분은 나에게 오히려 축하를 보내셨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세계에 태어나 수많은 우연의 틈을 뚫고서 나름의 철학과 사상을 가지게 될 때,1여기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에 등장하는 다음의 구절을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p. 91-92.
그가 현재에 있게 된 것은 그 뒤에서 언제나 기다리고 응원해준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을 내어주더라도 진정한 의미로 끝까지 나를 사랑하실 것이 분명한 두 분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당신께서 오히려 삶이 단지 한 번 뿐이기에 “엄마도 처음이라 미숙했을 수 있다며 서운했던 것이 있다면 이해해주고 잊어달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그 때 가장 가까움을 느낀 것이며 대학의 첫 해, 코로나로 대학이 봉쇄되어 함께 집 옆의 강변을 걸었던 그 때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다.

가장 고독한 뫼르소가 비록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해도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언어와 도로 그리고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거리감 속에서도, 그리고 나의 사상이 도달하고 정복해나가는 영역의 광활함을 사이에 두고서도 그는 그의 가장 옆에서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평생 그렇게 하실 것이 분명한 사람을, 어머니 당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가까움이 물리적 거리와 연관된 개념인 것만은 아니다. 매몰차거나 짖궃어보이더라도 시간을 내어 상대를 생각한 끝에 클랜징 오일과 썬크림을 선물한 동생이 있듯, 뫼르소, 가장 절규하는 뫼르소에게도 그를 생각해줄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가 아무리 멀더라도, 설령 이제는 너무 한쪽이 달라져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속을 내보이지 않게 되어 진정으로 심오한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2여기서 나는 류츠신(劉慈欣)이 쓴 소설 《삼체(地球往事)》의 제2권: ‘암흑의 숲’에 등장하는 다음의 대목을 떠올리고 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위 후보생으로 함대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들아, 넌 아직 멀었다. 지금도 나는 네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여. 그건 네가 아직도 생각이 단순하고 깊이가 없기 때문이야. 내가 네 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너는 내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어야만 네가 진정으로 성장한 거다.” 나중에 제가 정말로 아버지의 말대로 성장한 뒤에 아버지는 당신 아들의 속마음을 쉽게 알 수 없었죠. 아버지가 그걸 쓸쓸하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정말로 아버지가 기대를 걸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었죠.」 ― 류츠신(劉慈欣), 《삼체(地球往事): 제2권 – 암흑의 숲》. 허유영 역, 자음과모음, 2020. pp. 83-84.
그럼에도 그에게도 가장 가깝게 사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이다.

조용하고 평범했지만,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생일이여, 안녕. 잊을 수 없는 오늘이여, 안녕히.

#2.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알베르 카뮈의 문장,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나 자신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던 문장.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은 뒤 나는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과 그가 데카당인지 아닌지를 토론하면서 질 들뢰즈가 말년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니체 철학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던 나는 물었다: “그는 왜 자살했는가?” 나는 〈자살〉이란 결국 데카당이라고 주장했다. 고통으로 가득찬,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이라도 대결하고자 하는 용감함을 버리고, 세계로부터, 비록 우연의 산물이더라도3여기서 나는 최근 읽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을 생각하고 있다. 그 삶의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어떤 식이든지 〈적극적〉 선택이 아닌 〈수동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그 때 문학 선생님의 반론은 “자살도 〈적극적〉 선택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 가장 극도의 상황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자의〉로 선택한 죽음이라고 말할 때 그건 자의가 아니라 일종의 〈타살〉, 그가 살아온 환경과 사회 그리고 타인이 그가 죽음을 선택하도록,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살해〉가 저질러지도록 교사한 것은 아닌가? 과연 자의적인 죽음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맞는가?

… 지금에 이르러 나는 내가 왜 그런 질문들에 천착했는지 알고 있다. 어릴 적 밤에 눈을 감을 때마다 나는 〈잠〉이란 결국 일종의 짧은 죽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과학 시간 때 지구 상의 물질은 모두 항성의 핵융합에서 탄생했으며 결국 내가 있는 행성도 언젠가는 적색 거성이 된 태양에 삼켜져 다시 별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들은 이후, 나는 내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자각했고 밤마다 때때로 무지와 미지, 〈죽음〉의 미지에 대한 공포에 떨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존재인 이상, 그 어릴 적의 본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안다. 내가 〈자살〉은 도피라고 소리칠 때, 한편으로 나는 두려웠던 것이고, 어쩌면 스스로의 내면 한 구석에 존재하는 고통, 삶 일체로부터 도피하고 싶다는 바로 그 생각으로부터, 스스로의 가장 치명적인 속삭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철학은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던 18일 어제 저녁에 버스로 올라온 뒤, 다시 재개된 대학에서의 여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추석 때 부모님과 많은 것들을 이야기했지만 느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22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직감이고, 둘째는 이제 두 분에게는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을 지경에 내가 도달했다는 것이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이야기를 조금 했다. 지금의 계획대로라면 아마도 내년에 2개의 초과 학기를 끝내고, 대학을 ―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될 이 대학을 ― 졸업한 이후에 곧바로 대학원에 가기 보다는 6개월 ~ 1년 정도의 쉼, 즉 여행을 다니거나 몇 가지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느낌은 상당히 미묘하다. 한편으로는 류츠신의 《삼체》의 2부에 등장한 ‘심연의 눈’을 생각나게 하면서도 18일 올라오는 버스에서 읽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4장. 이해받지 못한 말들’에서 사비나가 가진 태도 즉, 〈모든 것을 공개하지는 않는 태도〉가 생각나기 때문이다.4전자인 류츠신의 《삼체》에 대해서 나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후자, 즉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4장에서 내가 염두에 두었던 대목은 밝힐 필요가 있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 188.

나의 깊이가 깊어지고 질문이 점차 치명적으로 됨에 따라 나는 이제 나의 어머니에게조차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 오해의 여지 없이, 자살을 실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는 오해 없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는 나의 철학적 사유의 현재를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뿐만이 아닌 것이, 솔직히 나는 여기에 끄적거리는 것 외에 내가 말할 수 있는 방법,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안다. 내가 아는 친구들과 동료들, 교수들 중에 나를 이해할 정도로 사상이 깊은 이들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독서회를 하고 있는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 두 분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없다.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이 여기도 있다. 침묵 속에서 나는 염세주의적인 일본의 보컬로이드(Vocaloid) 곡과 정신 분열이 일어날 듯한 〈Needy Girl Overdose〉의 OST, 그리고 주인공의 자살 장면에 삽입된 〈OMORI〉의 ‘My Time’으로부터 위안, 아이러니, 질문을 느낀다. 할 일은 많고 밀렸지만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 그가 바로 여기에 있다.


Appendix.

#1.

サツキ – Mesmerizer (feat. Hatsune Miku & Kasane Teto) ― 염세주의적이다. 데카당스럽다고도 할 수 있다. 통용되는 의미에서도, 니체가 사용하던 의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들었을 것이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여기서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키치(Kitsch)〉를 본다.

#2.

Aiobahn – INTERNET YAMERO (feat. KOTOKO | Theme for NEEDY GIRL OVERDOSE) ― 음악은 몽환적인 전개와 거칠고 분열적인 쪼개기 사이를 위태위태하게 걸어간다. 경우에 따라서 아방가르드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보다 정확한 표현이란 사이키델릭(Psychedelic)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란 결국 기댈 수 있는 것을 찾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것이 허상이더라도. 현대 문명 사회의 〈인터넷 중독〉 문제란 바로 이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더 복기될 필요가 있다.

#3.

Bo en – My Time (Theme for OMORI, Cover by Kikuo, feat. 初音ミク): Animated by RAMDARAM ― 다시 한 번,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다. 트라우마, 죽음 그리고 자살이라는 가장 내밀하고 진지한 문제를 다루는 《OMORI》에서 주인공의 자살 장면에 이러한 곡이 삽입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잠〉은 죽음의 은유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그러한 짧은 죽음 앞에서의 공포를 상기하면 수많은 감정과 심연 속에서 표정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조금 더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주석 및 참고문헌

  • 1
    여기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에 등장하는 다음의 구절을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p. 91-92.
  • 2
    여기서 나는 류츠신(劉慈欣)이 쓴 소설 《삼체(地球往事)》의 제2권: ‘암흑의 숲’에 등장하는 다음의 대목을 떠올리고 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위 후보생으로 함대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들아, 넌 아직 멀었다. 지금도 나는 네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여. 그건 네가 아직도 생각이 단순하고 깊이가 없기 때문이야. 내가 네 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너는 내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어야만 네가 진정으로 성장한 거다.” 나중에 제가 정말로 아버지의 말대로 성장한 뒤에 아버지는 당신 아들의 속마음을 쉽게 알 수 없었죠. 아버지가 그걸 쓸쓸하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정말로 아버지가 기대를 걸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었죠.」 ― 류츠신(劉慈欣), 《삼체(地球往事): 제2권 – 암흑의 숲》. 허유영 역, 자음과모음, 2020. pp. 83-84.
  • 3
    여기서 나는 최근 읽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을 생각하고 있다.
  • 4
    전자인 류츠신의 《삼체》에 대해서 나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후자, 즉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4장에서 내가 염두에 두었던 대목은 밝힐 필요가 있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