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5. 2025. 3. 10. ~ 2025. 3. 3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니, 며칠 전 후배에게 썼던 편지에서 진술한 그런 종류 말고. 그것은 문학이 어떤 것인지를 기술할 때 ‘나’의 이야기들을 저 아래에 두고 온 형태의 기술이었다. 나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결론이야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3월 첫 주부터 지금까지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면서 나는 수많은 자신을 작품 속 서사에서 발견한 것 같다. 과거의 나, 두려워하던 나, 깊어지기 시작한 나, 마침내 문을 거세게 닫고 귀를 막아버린 나, 흰색 방에 혼자 있기를 택한 나, 그리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나. 책을 읽는 과정은 따라서 과거와의 대면이요 홀로 그 가운데에서 쭈그려 앉아 울고 있던 유년기, 그러나 지금까지 쭉 내 정신의 한가운데서 지냈던 그를 알아차리고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어쩌면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무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을 닫고 있으면 방 안에 사람이 흐느끼는 소리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화가 나서 겉잡을 수 없는 사람의 발질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싫어했고 아버지를 싫어했으며 대학을 싫어했고 사람을 싫어했던 것이다. 제대로 듣지 못했고, 늘 안쪽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거나 ‘잊기로 결정해버렸다’.
인간은 평생 솔직해지려는 여정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에게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소설이 지적하듯 그 거짓말들이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 사물의 인식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비틀기 시작한다. 상처는 덮이고 우리는 단절을 택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방 안에서 울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계속된다. 그와의 이별은 택할 수 없다. 상당히 늦게 깨달은 것 같지만, 결국 거기 있는 것도 나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대학에서도 책을 놓지 않은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실제로도 거의 수도원 같았던 대학 생활 속에서 독서 모임은 언제나 하나의 창이었다. 바람이 들어오는 창, 바깥의 저 햇빛을 한동안 들여다볼 수 있는 창. 어느 날에 내가 상담사에게 고백한 바 있듯 그것이 없었으면 나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것이 내가 폭풍우 속에서 붙잡은 판자였고, 이제 나는 거기에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언제나 쓰여 있었음을 안다.
문학과 사상, 책들, 글이 관통하는 저 핵심. 즉 배제된 타인들 덕에 나는 어쩌면 문을 열고 들어가 이제는 눈물 자국이 눌러붙어 마치 지워지지 않을 흉터처럼 남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울고 있다. 흐느끼고 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다가 이윽고 끌어안는다. 그에게는, 아니, 나에게는 이런 품이 필요했을 뿐인데. 나는 16년이라는 방황 끝에서야 겨우 깨달은 것이다.
나는 다시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저 시간선들을 모조리 거쳐서, 그 끝에 마침내 도달한 나 자신을 토닥이면서.
#2.
오늘은 어느 길에 대해 써볼까 싶다.
아니, 〈샤로수길〉이니 〈메타세콰이어길〉이니 하는 그런 이름 붙은 길, 사람들이 한 번 이름에 혹해 걸음을 청하지만 또 다시 가지는 않는 그런 길 말고. 내가 이야기하려는 길은 매번 내가 올랐다가 내려오는 그 길, 기숙사에서부터 윗 공대에 이르는 그 길이다.
강의 30분 전 항상 기숙사 문을 나서며 나는 생각한다. 오늘도 올라가는구나, 몇 시간 뒤면 다시 내려올 길을 또 다시 한 번 올라가는구나. 기숙사삼거리에 이르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들에도 불구하고 굽이친 언덕을 돌아 오른다. 풍산마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늘 뒤에서 부웅-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의 ‘관악02’ 버스 안에 수많은 학생들이 서 있는 모습이 앞질러간다. 그때마다 나는 이 길을 걸어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편하게 올라가고 싶지 않다는 것, 다리가 저려오더라도 내 힘으로 올라가겠다는 첫 번째 다짐을 상기하는 것이다. 조금 더 속도를 내서 걸으면 보통 아무도 없는 은행나무 아랫길을 지나는데, 그때마다 장딴지가 조금씩 아려온다. 그러나 멈추기에는 풍경이 너무 가슴 깊이 스며든다. 앙상한 나뭇가지, 굽이친 고갯길 위로 보이는 하늘, 저기를 넘으면 약간의 내리막이 있으리라는 희미한 짐작,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숨이 가빠지는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한다.
약간의 내리막이 나올 때면 나는 윗 공대로 올라가는 마지막 고개, 그 악명 높은 경사를 생각하게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 그 경사를 오르는 유일한 보도의 아랫자락에서 나는 까마득한 경사를 올려다본다. 수백 번 넘나든 길이지만 늘 하나의 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대학 3년차 비가 오던 어느 날의 장면을 회상해본다. 기억 속에서 나는 희뿌연 회색의 시야 가운데 곧게 위로 솟아오른 침침한 길을 본다. 사람들은 총총거리며 급히 길을 간다. 그 순간 나는 이 길 저 위를 바라보며 《천로역정》과 ‘좁은 문’을 생각한다. 오르막길과 함께 내 숨이 가빠질 것이라는 사실, 버스를 타면 너무나 쉽게 오를 것이라는 사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오게 되리라는 짐작을 하면 나는 항상 길을 오를 용기를 얻는다.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늘 내 두 발로 굽이친 그 길을 따라 나아간다. 이름도 없는 길이지만, 인적도 드문 길이지만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들을 되새기게 해주는 바로 그 길을 따라서.
#3.
지난 3월 한 달 동안 독서회에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회복의 달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자기 자신을 물고 뜯는 저 치명적 철학, 그 종말에 이른 달이었다. 도서 선정은 고교 친구가 자신이 군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으나, 수많은 우연들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들 속에 있는 나로서는 마치 내가 필연적으로 이 책을 알맞은 시기에 읽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세 번에 나누어 쓰고 블로그에 공개한 독서 노트에 썼듯, 나는 소설을 〈삶〉과 〈죽음〉이라는 두 요소 사이에 위치한 〈인간〉이라는 구조로 읽었다. 이 구조 자체는 물론 전혀 특이하지 않다. 모든 소설은 인간의 삶을 다루기에 삶과 죽음은 항상 등장하여 대립을 이룬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2년 전에 읽을 때에도 나는 소설에서 정확히 이런 틀을 뽑아냈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첫째, 〈죽음〉과 〈삶〉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혼합되어 있는 관계라는 사실. 둘째, 그 두 요소보다 더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 가운데 위치한 인간의 심연, 그러니까 〈우물〉이라는 사실을.
〈우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인간이 그곳으로 빨려들어간다는 데에 있다. 이 공간에서 사람은 자신의 숙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무시해온 〈죽음〉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너무나도 깊은 공간에서 과거를 마주하는 인간은 치명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오랫동안 따라다닌 저 질문. 이제 나는 그 질문이 내가 이제 막 뛰어 올라온 〈우물〉 속의 질문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제 3월이 지나고 4월로 들어간다. 내가 교수에게 선언한 ‘한 달의 회복기’도 이제 1주일 정도 남았다. 근래의 수많은 악재들로 세계는 혼란스럽고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지만, 나는 적어도 이러한 길 잃음 끝에 펼쳐지는 초원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나타내는 〈숲〉을 오랫동안 방황하면 반대편의 〈초원〉을 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니체는 “병들어있는 것이 삶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자극제다.” 라고 썼던 것이다.
무의미를 재발견하고 자신의 불완전성 · 유한성 · 상처들을 모조리 발견함에 따라 끝을 모르고 밀려오는 어둠. 나는 이 어둠이 내가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기꺼이 모조리 끌어안아야 할 대상임을 안다. 그렇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나오코를 생각한다. 그러곤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애타게 미도리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