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35. 로크와 칸트, 그리고 학문 공동체와 개인

사유 #35. 로크와 칸트, 그리고 학문 공동체와 개인

2021-10-22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학문 공동체와 그 속에서의 각인의 위상에 대하여


I. 로크와 칸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공리에 대하여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존 로크John Locke의 「표상적 실재론」에 따르면, 한 개인은 오직 그가 감각 경험을 통하여 얻은 것만을 인지하고 또한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다. 즉 로크에 따르면, 한 개인이 보유하는 모든 추상과 앎은 그의 모든 과거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한편, 독일의 역시 위대한 철학자였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범주론」, 즉 내가 방금 언급한 로크로 대표될 수 있는 앎에 대한 경험주의적 시각과 그에 반대되는 합리주의적 시각의 절충안으로 그가 제시한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감각 경험을 통하여 얻은 지식을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범주를 통하여 개념들로 산출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로크와 칸트 중 누구의 인간의 앎에 대한 모형 또는 이론이 더욱 세상 속의 각 인간 주체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는지를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여기에서 지금 지적하고 싶은 것이란 칸트의 「범주론」이든 로크의 「표상적 실재론」이든 인간의 앎과 추상, 개념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그 유일한 원천은 곧 그 개인의 경험 뿐이라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위대한 철학자가 주장하고 또한 제시한, 모든 인간은 그가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하여 그 스스로의 앎을 구성한다는 것은 그 두 철학자의 후세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아도 아무래도 옳은 말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므로, 나는 이들의 주장을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이 인간에 대하여 고민한 끝에 발휘한 중대한 통찰, 즉 귀납적인 공리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며 이제 그 공리를 대전제로 약속해두고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자 한다.


II.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앎은 오직 세상의 일부만을 포함할 수 있을 뿐이다

한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앎은 결코 세상의 전부를 포함할 수는 없으며 오직 세상의 일부분을 포함할 수 있을 뿐이라는 통찰은 귀납적 관찰을 통하여 얻어진 두 번째의 공리로 두어도 될 정도로 아주 명백하다. 우리 모두가 발휘할 수 있는 감각 경험과 그 경험들을 지성이 처리하여 발견하는 바들에 의하면 “한 개인의 생활 반경은 세상의 모든 장소이다”와 “한 개인이 교류하는 사람들과 문화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문화권이다”라는 두 문장은 분명히 거짓 명제이다. 우리는 매 순간 조금씩 다른 상황에 놓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색다른 상황과 맥락, 사람들과 환경 사이에 놓인다. 만약 한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앎이 세상의 전부를 포함한다고 한다면, 그 개인에게 이러한 새로움의 지각 경험은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는 이미 자신이 아는 것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움의 감각은 그의 마음으로부터 유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앎에 세상의 전부가 포함되는 것은 일체 불가능하고, 오로지 세상의 어떤 일부만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내려져야 될 결론이다.


III. 세상의 기본 질서나 원리는 존재한다면,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거나 지각된다

다음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어떠한 종류의 질서나 근본적인 원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특정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관찰되거나 지각될 수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이란 곧 질서나 원리라는 명사(名辭)에 상응하는 추상이 속한다고 널리 인정되는 ‘근본성’이라는 범주를 위배한 것이거나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가 지각하는 ‘세상’이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과거의 인류와 현재의 인류, 그리고 미래의 인류가 함께 생활하는 공동의 시공간선을 지시하는 용어로서의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 것, 이 두 경우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혹자가 이러한 세상을 움직이는 어떠한 종류의 통일된 질서나 근본적인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나의 논증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그러한 믿음 하에 구축되어 온 오늘날 거의 종교화된 것과 다름없을 과학이 인류에게 가져온 기술의 진보의 결과물을 다시금 돌아보라고 나는 말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문제를 이 이상으로 자세히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대해 존 로크가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종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이 지성론은 태어났다. 인간의 마음이 매우 향하기 쉬운 약간의 탐구를 만족시키는 첫걸음은, 우리의 지성을 조사하고 자신의 능력을 검토해서 어떠한 사물에 지성이나 능력이 적응하는가를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지않는 한 우리는 잘못된 자락에서 착수한 것이 되며, 마치 우리의 지성은 존재자의 한계가 없는 범위를 모두 (그 본성으로 해서) 자연히 의심하지 않고 내 것으로 삼아, 그 가운데에는 지성의 결정이 면제된 것, 또는 지성의 이해를 벗어난 것은 마치 하나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사유를 사물의 드넓은 대양에 풀어놓으면서, 우리와 가장 관련이 있는 진리를 조용히 단단하게 지니는 선에서 만족하려고 헛되이 모색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능력 이상으로 탐구를 확대하여, 확고한 발판을 찾을 수 없는 심연으로 사유를 방황하게 할 때에는,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토의를 거듭해도 이들 의문이나 토의는 결코 뚜렷한 해결에 이르지 못하고, 다만 의혹만이 이어져 이를 증대시키고, 마침내는 사람들의 완전한 회의론을 견고하게 할 뿐이라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우리의 지성의 능력을 잘 고찰해서, 인지(人知)의 범위를 일단 발견하여 사물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경계선을 찾아낸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비교적 망설이지 않고 어두워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밝아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사유하여 그 논의에 이익과 만족을 한층 더하게 될 것이다.

존 로크(John Locke),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추영현 역. 동서문화사. (2011). pp. 34-35.

IV.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것은 그 모든 영역들을 관찰하여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것은 그것이 나타나는 모든 영역들을 관찰할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은 더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지각한다는 대전제를 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대상의 어떤 성질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지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또한 ‘보편성’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사물 또는 관념의 속성은 그러한 사물의 속성이 복수 개의 영역에서 지각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명히 위 문장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가 명백한 진리에 다름 아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관찰된다는 어떤 사물의 속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오직 경험한 것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인 인간은 반드시 모든 영역을 관찰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누군가가 어떠한 사물이 보편성에 상응하는 속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성’과는 다른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던지, 혹은 성급하게 판단하는 오류를 저질렀던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V. 따라서 세상의 기본 원리와 질서는 여러 개인이 얻을 수밖에 없다

앞선 항들에서 논의한 바를 종합하면 세상의 기본 원리와 질서는 만일 존재한다면 오직 한 명의 개인이 얻을 수 없고 여러 개인이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은 오로지 그가 살아가는 세계의 전부를 표상할 수는 없고 단지 그가 경험한 세계의 일부만을 표상하고 또한 추상화한 앎을 가질 뿐이다. 그가 가진 앎에 속하는 것, 즉 그가 가진 사상, 가치관, 세계관은 모두 그의 세계의 일부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산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상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원리나 질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각각의 하위 집합격 영역에서, 즉 세상의 각 일부분들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므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모든 세상의 부분들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은 결코 세상의 모든 부분들을 그의 내부로 표상할 수 없으므로,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이 세상을 운용하는 기본 원리와 질서를 홀로 통달하였다고 소리지른다면 그의 주장은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분명히 우리 곁에는 각기 서로 다른 세상의 일부분을 표상한 앎을 가지고 있는 복수의 개인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한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표상의 이러한 상한 내지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이 비록 우리 스스로가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아주 단단히 틀어막는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인들과 협력하고 또한 연대한다면, 그러한 우주를 기본적으로 운용하는 질서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가능성이 분명히 열릴 것이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다소간에 불완전할지는 몰라도,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표상들로 유일하다는 것, 즉 우리는 외부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하여 안에 자연히 세우게 되는 재현물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알 수 없으며 또한 그것들을 알 수 있을 여타의 방법 또한 전무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방법은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하며, 너무나 혼동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이 세계의 그 다채로운 모습들 중에 혹여 공통되는 질서가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VI. 또한 이로써 모든 개인은 학문 앞에서 동등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앞서 논의한 그 유일의 방법이 곧 논의 · 이성 · 합리에 의하여 엄격하게 규명되지 않고서 무비판적이고 관습적으로 수용되어 온 사유의 태도 즉 Mythos적 사유에서, 논의 · 이성 · 합리를 통하여 인간이 이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나마 알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사상적 태도인 Logos적 사유로 나아가는 사상의 움직임인 학문(學問)에 다름 없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유일의 방법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지각과 앎에 대한 방법론적인 한계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불확실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발명한 가장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어느 한 개인이 그 단신(單身)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할 세계의 기본 질서 또는 운용의 원리를 파악하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원대한 꿈과 목표를 품었다면 그에게 있어 모든 타인들이란 곧 각인이 다름 아닌 세계의 일부에 대한 상이한 표상들을 가지는, 즉 중대한 학문 논의의 출발 단서를 가지고 있는 개별적이고 유일무이한 존재자로 마땅히 비추어질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학문을 논하고자 하는 어떤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 공동체 내에서 각 개인은 바로 이 세계의 혼돈 속에서 모종의 질서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 앞에서, 바로 이 문명이 시작된 이래 계속 내려져 온 인간의 지칠 줄 모르고 끈질긴 노력과 사유의 움직임 앞에서 마땅히 동등하게 대해져야 하며 또한 동등하게 환대받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에는, 즉 그 스스로가 감각적 경험들을 통하여 안에 세운 표상 일체를 제외한 모든 것 이외에 대하여서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타고 난 존재자이므로, 즉 영원히 세계의 오직 일부분만에 대한 표상들을 끝없이 형성하게 되는 공동의 운명자에 다름 아니므로 모두가 동등한 지위와 위치, 처지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한편으로 그러한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은 바로 그 점,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은 세상의 전부에 대한 것이 아닌 오직 일부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로부터 말미암아, 그가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모든 종류의 앎은, 즉 그가 가지는 모든 추상과 관념, 사상들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결코 안 된다. 그 어떠한 개인도 결코 세계에 대하여 완벽하게 알 수 없으며 또한 그 수명이 무한한 것도 아니므로, 만약 한 개인이 그가 세계를 구성하거나 운용하는 모종의 질서나 원리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것에 그가 어떻게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죽고자 한다면, 누구이던지 간에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여야 하고 또한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한 타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