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0.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I

탐서일지 #30.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I

2026-02-04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햄릿(Hamlet)》 中

잉글랜드의 거필 셰익스피어의 저 유명한 문장은 중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이 삶과 죽음이 대립되는 문제로 옮겨지곤 하지만 ‘be’ 동사의 용례들을 고려하면 특정한 존재로 될 것인지의 여부라던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도 충분히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핵심이 되는 문장은 언제나 중의적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우리의 삶을 언어로 옮기는 일인데, 삶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은 언제나 저 셰익스피어 문장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세계, 용납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저 반대편에서 고함을 외치며 들이닥치는 이 세계 속에 처한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햄릿의 질문과 동일하다.

문학 중에서도 가상의 세계와 그 속에 위치한 인물을 그려내는 소설의 경우, 작가는 따라서 반드시 저 핵심이 되는 물음 앞에서 극 중의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그려내야만 한다. 변용된 물음이 제시되는 과정, 그 물음에 사로잡히는 과정, 물음 속에서 질식하거나 거짓말하거나 버티고 서 있는 과정 모두를 개연성 있게 제시할 책무. 소설가에게 책임이 있다면 바로 이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주인공 강민주는 문제의 문장을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로 쓴다. 이제 남은 일은 그녀가 텍스트의 절망적 성격을 어떻게 규명하는지, 그리고 그 이해 속에서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텍스트 속에서 침몰할 것이냐, 텍스트를 찢어버릴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가 여기에 쓰인다. 소설가와 그 등장인물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이 위와 같으니, 우리에게는 여기 놓인 문장을 곱씹으며 소설을 평가하는 미덕이 요청된다.


“그녀들은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힘, 어떤 거대한 능력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넋두리의 암호를 해독해 나갔다.”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쓰다, 2019. p. 73.

I. 총평

  • “삶이란 신(神)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양귀자의 첫 문장인 것만은 아니다. 이 정의(定義)는 김애란의 첫 문장이기도 하며, 알베르 카뮈의 첫 문장이기도 하고, 니체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모든 문학과 철학은 바로 이 문장에서 출발하며, 고대 그리스1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생각하면서 등을 돌린 이 관찰자에게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만 한다. “잠깐 멈춰서라. 여기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명랑하게 그대 앞에 펼쳐져 있는 이 동일한 삶에 대해서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들어보라.”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동반자인 현자(賢者) 실레노스(Silen)를 오랫동안 숲 속에서 붙잡지는 못한 채로 쫓아다녔다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왕이 마침내 그를 수중에 넣었을 때 왕은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다. 이 마신(魔神, Dämon)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이 강요하자 마침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나에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박찬국 역, 아카넷. 2007. pp. 72-73.
    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든 순간들에서 인간에게 언제나 문제가 된 것이란 도저히 녹록치 않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저 삶이 가져다주는 저 ‘절망의 텍스트’ 앞에서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였다.
  • 인문학의 근간에 자리한 문장이 저 선언인 이상, 소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등장인물이 이 문장 앞에서 취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다. 선택지는 크게 보아 늘 세 가지였다. 첫째,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희망’이라는 빛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드리우는 녹록치 못한 현실의 그림자를 밝혀 없앨 수 있기를 기대하는 쪽이 이쪽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나가사와 선배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프란츠 그리고 그와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행진한 사람들의 행렬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끝내 삶을 이해하지 못했노라 고백하면서 목숨을 끊는다. 《인간 실격》의 요조나 성경의 예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후자의 경우는 ‘희생’이라는 성스러운 후광으로 그 고백을 날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저항한다. 삶이 추함을 덮어씌우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위에서 의미를 직조하는, 스스로의 가치 체계를 창조한다. 카뮈에 의해 재해석된 《시지프 신화》에서의 시지프가 대표적이다.
  • 그러므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도 역시 문제되는 것이란 주인공 강민주가 이 세 부류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판정하는 일이다. 적어도 서두의 노트에서 그녀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고 쓰고 있으며, “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다.”고도 선언하고 있다. 여기까지 볼 때 우리는 그녀를 삶의 고통과 무의미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일종의 화신, 즉 제3부류의 인물로 분류하고픈 욕망을 느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초반부 유명 남성 배우 ‘백승하’를 납치하기까지 그녀는 통상적인 여성상은 물론이거니와 기성 사회의 질서에도 반하는 ‘특출난’ 인사요 ‘이 땅의 여성들’을 대표하여 항거하는 저항자로 그려지고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범행 동기란 여성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저항하지 못하게 한 남성들에 대한 복수라고 명확하게 저술하고 있으며, 특정한 ‘사회적 여성상’의 강요 혹은 내면화의 상징을 백승하로 지목하고 있기에 그를 납치했다고 쓰고 있기도 하다. 강민주는 여성을 대표하여 남성들에게 판결을 언도하는 판관의 입장에서, 유죄 주문과 병치될 첫 번째 이유들을 수화기 저편에서 찾아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강간범보다 더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편이다.’(52쪽)고도, ‘남자는 여자의 등을 밟고 일어서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비열한 존재다!’(53쪽)라고도 쓰고 있다.
  • 그녀는 거리의 파토스에 휩싸이기를 기도하는, 즉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분리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존의 여성들과 다르게 자기 자신은 ‘비굴한 굴복’을 택하지도 않으며(9쪽)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도 아니라고(46쪽) 그녀는 말한다. 오래 전부터 강인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겁도 별로 없고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나는 공포 앞에서 무릎을 꿇어본 기억이 없다. 그것은 내 천성이었다.”고 쓰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강민주다. 거리의 파토스는 ‘차별화’, 즉 같지 않음을 의욕하는 힘이다. 자신에게 씌워져 있었던 저 부자유라는 이름의 멍에를 인식한 인간이 니체가 일찍이 이야기했듯 ‘낙타의 시기’를 벗어나 ‘사자의 시기’로 진입할 때 전형적으로 발휘되는 동인이 바로 이 거리의 파토스다. 강민주는 차별을 기도한다. 다른 여성들과 달리 자신은 어머니의 유산에 따른 충분한 ‘자본’도 가지고 있으며, 거사를 치를 수 있는 ‘사람’도 가지고 있고 또 이러한 일들을 감당할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쓰고 있다.
  • 그녀는 ‘알리바이’를 필요로 하고 또한 쓴다. 단순히 거삿날 전후 그녀가 드라이브를 즐겼다는 식으로 일기에 쓰는 그런 종류의 알리바이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공을 들여서 자신이 왜 백승하를 납치해야 했는지, 그에게 왜 온갖 종류의 책을 읽힐 것이며 그를 왜 자신의 마음대로 꾸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하나의 서사 구조를 저술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쏟는다. 이 시점에서 그녀를 사로잡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식의 저 메시아적 계시이며 독자에게 암시되는 것이란 ‘이 땅의 여성’들을 대표하여 범행을 저지르는 그녀의 모습과 전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십자가에 박힌 예수 사이의 동형성이다.
  • 바로 이 지점이 내가 그녀를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판정하는데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지점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힘과 복수에의 의지가 충만하다고 느낀다며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거짓된 처세술을 거부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그 잣대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인물이 아닐까. 진작에 그녀가 남성들에 대한 유죄 선고를 끝마쳤다면 그녀는 이유를 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의 항거가 진압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으며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추락하는 여정의 끝자락, 자신의 ‘사형’ 집행일에 사람들이 몰려와 고함을 질러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쓰고 있는 이유란 당초부터 타인에게 자신의 행위 동기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항소이유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왜 자신은 여성을 대표하여 ‘십자가에 못이 박힐 수밖에 없는지’를 주제로 기나긴 논변을 이어나가는 그녀는 ‘사자의 시기’에 휘말린 나머지 스스로의 한켠에 존재하는 망설임을 어떻게든 절단하기 위해 애쓰는 위선자, 즉 제1부류의 인물 혹은 제2부류 중 자신의 ‘죽음’을 신성화하는 예수격 인물로 분류될 여지가 충분하다.
  • 그러나 평가는 보류되어야 한다. 오노레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그의 소설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판단하려면 적어도 그가 품은 생각과 그가 겪은 불행과 그가 가진 심상(心想)의 비밀 속에는 들어가봐야 하지 않는가. 그의 삶에 대하여 오로지 물리적인 사건들만 알려고 하는 것은 연대기, 곧 바보들의 역사를 작성하는 것이 아닌가!”2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 이철의 역, 문학동네, 2009. p. 154. 지금까지의 범위에서 독자인 나에게 허락되었던 것은 주인공 강민주가 스스로 서술한 ‘알리바이’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철저하고 또한 맹렬하게 자기 자신의 선고에 영향을 줄 모든 요소들을 독자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장 사이로는 항상 그 뉘앙스로부터 쓰이지 않은 것들이 흘러나오는 법이며, 한 사람에 대한 보다 정확한 표상은 바로 이 흘러나온 것들을 재구축할 때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독자로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II. 인상 깊었던 대목들과 그 이유

II.1. “Le rêve doit-il crève?”

3‘다른 여성들의 우매함’에 유죄를 선고하는 강민주의 거리의 파토스의 정당성은 의심되어야 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듯한 이 위대한 사물들의 배치 관계를 바라보며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7월에 제기된 이 질문을, 강민주가 놓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애쓰는 이 질문을 여기에 달아둘 뿐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신의 배우자로 어떤 남성상을 원하는가.

이것은 자주 등장하는 여론조사 중의 한 질문이다. 물론 남자들은 어떤 여성상을 원하는가와 함께 실시되는 조사이다. 이 조사에서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이는 백승하였다. 그는 앞으로도 여성들이 가장 호감을 느끼는 연애인 1위의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할 것이 확실하다. 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일하며, 여전히 부드럽고 섬세한 웃음을 지을 줄 아니까.

이 땅의 여자들은 부드러움을 사랑한다. 특히 결혼해서 사는 거의 모든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사라진 부드러움의 결핍증상으로 호되게 앓고 있다. 그녀들은 남루한 일상에 실망하고, 두터워가는 감정의 굳은살을 부끄럼 없이 내보이는 부부생활에 아득함을 느낀다. 드러나는 갈등이 없어도 이유 모를 배신감으로 삶이 우울해지기만 할 때 백승하의 부드러움은 꿈처럼 여겨진다.

3살짜리 아들, 활짝 웃고 있는 세련된 외모의 부부, 백승하 가족의 인터뷰 사진은 여자들이 환상 속에서나 그리는 꿈의 가족사진이다. 백승하는 여자들에게 있어 현실이 아니다. 그는 꿈이고 환상이다.

과연 그런가. 그는 환상처럼 완벽한 인물인가.

나는 스크랩북을 덮으면서 스스로 되묻는다. 그리고 홀로 대답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환상이란 절대 존재하지 않음을 내가 보여주고 확인시켜줄 것이다.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種)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아까의 그런 여론조사 따위에 참여해본 일도 없고 그 여론조사 결과에 동의한 적도 없다. 나는 단지 참고할 뿐이다. 진실을 말하면 나는 오히려 여론조사 결과와 정반대의 견해를 품고 있다. 나는 백승하를 싫어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와 동성인 여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를 증오한다.

여자들을 교란한 죄,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한 죄, 자신이 택한 남자가 나빴던 것은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기며 여자들을 운명주의에 빠뜨린 죄. 그것만으로도 나는 백승하를 용서할 수가 없다.

하물며 보여지는 백승하의 모든 것이 다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인기인들의 처세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진실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모두 추악한 진실일 뿐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아름다움은 잘 보지만 그 이면의 추악함에는 의외로 어둡다. 나는 백승하가 뒤집어쓰고 있는 환상의 너울을 벗겨내고 싶은 욕망에 몸이 떨릴 지경이다. 그의 처세술이 완벽하면 할수록 나의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백승하. 그는 나와 붙을 만한 적수이다. 그야말로 이 강민주와 대결할 만한 상대인 것이다. 맹장들은 상대가 강할수록 전의를 불태운다. 나는 지금 맹렬하다. 이렇게 심장이 뜨거울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살아 있다는 실감을 얻는다. 나는 맹맹한 것은 정말 못 견딘다. 그런 점에서 백승하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pp. 45-47.

II.2. II.2.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꿈꾸는 복수의 화신으로서의 ‘유다’

4이 대목에서 나는 강민주의 이중적 태도로부터 다자이 오사무와 그가 예수와 유다 간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쓴 단편 〈직소〉에 관해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과 나눈 다음의 대화록을 상기하고자 한다. 강민주는 복수에 대한 신성화, 정당화를 과도할 정도로 기도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녀는 시지프가 아닌 유다와 예수 사이에 위치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나흘 전.

맑다, 이 계절은.

하늘이 어찌 푸른지 마치 다른 별에 와 있는 것 같다. 가을에서는 맑디맑은 실로폰 소리가 들린다. 두 귀를 기울이면 또르르 굴러가는 이슬 같은 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내 귀가 듣는 소리는 가을에도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을 앓는 여자들의 눈물 배인 한숨이다. 그녀들에게는 가을도 없다. 그녀들의 계절에는 색깔이 없다. 색깔 없는 세월을 살아온 한 여자가 전화선 저쪽에서 이렇게 묻는다.

“골목에서 남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심장이 마구 뛰어요. 구멍이 있으면 어디라도 감쪽같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지요.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서 못살게 굴는지 그저 숨이 막히도록 겁만 나는 거예요. 신혼여행 다녀온 날부터 술에 만취해서 들어왔어요. 하나씩 둘씩 고약한 술주정이 나타나던 그때 일찌감치 포기하고 내 갈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설마하니 평생을 저렇게 살까 했던 내가 바보지요. 이십 년이에요. 이십 년을 알코올중독자하고 살았어요. 술만 먹으면 이유도 없이 식구들을 두들겨 패는 사람하고 이십 년을 살았더니 얻은 것은 관절염과 심장병뿐이에요. 이제 딸들 결혼시킬 때도 되었는데 자식들 혼인길 막을까 봐 이혼도 못 하겠고, 죽어도 함께 살고 싶지는 않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도 해답도 없는 넋두리 같은 상담이 많아지는 때가 가을이다. 용케 참고 있다가 스산한 가을 날씨에 정신의 추위가 갑자기 버거워지면 여자들은 전화기를 붙잡고 맺힌 한이나마 털어놓는 것이다.

처음엔 이런 식의 해답도 없는 상담 전화가 가장 비위에 안 맞았다. 오지도 않을 행복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살아온 여자들의 그 끝없는 인내가 나는 조금도 가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그 바보 같음은 이미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 한결같은 끝말들, ‘죽지 못해 살지요’에 이르면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죽지 못해서 살다니, 그런 삶의 변명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녀들이 수행하는 복수는 겨우 그 철저한 자기 학대뿐이란 말인가.

내가 받은 전화 대부분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담이란 허울을 쓴 자기 고백이며, 더욱 잔혹하게 몰아붙이면 은근한 자기 자랑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고 세상은 나를 이렇게 유린했으나 나는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훌륭하게 잘 견디었다는 것.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분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억압에 대해서 말하라면 세상의 반절인 여자들이 당한 수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해자는 세상의 또 다른 반절인 남자들이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해도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난로와 책상 같은 물건에 불과했다. 여성해방의 선진국처럼 인식되는 미국에서도 여자의 선거권이 인정된 때는 겨우 1920년이었으니 더 무엇을 말하랴.

아니, 나는 지금 여성 수난사에 대해 길게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도 아니다. 나는 사실 초월, 혹은 응징에 대해 말할 참이었다. 내 주위의 많은 여자들, 전화 상담으로 목소리만 기억되는 여자들, 바로 그녀들이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강자들에게 짓밟히는 약자들이 끝없이 소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힘. 언젠가는 힘으로 다시 너를 누르리라. 내게 힘이 있다면 반드시 지금 당한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리라.

그 많은 불행한 여자들이 모두 희생이나 인내를 진실로 미덕이라고 믿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다. 생각해 보라.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희생과 인내를 감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 두꺼운 역사책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약자가 택할 길은 희생이나 인내밖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넋두리에 후렴구처럼 달려오는 ‘죽지 못해 살지요’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그녀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들은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힘, 어떤 거대한 능력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나는 서서리 넋두리의 암호를 해독해 나갔다.

힘이라면, 그것이 돈을 말하면, 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어머니가 남겨준 유산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저 혼자 불어나고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번 부자면 영원히 부자다. 저 혼자 꿈틀거리며 새끼를 치는 것이 돈이니까.

힘이란 다름 아닌 능력을 뜻하는 것이라 해도 역시 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사물을 분석하는 능력과 추진하는 실천력에 대해서 말하라면 나는 조금도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힘이 곧 물리적인 에너지를 뜻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황남기를 소유하고 있다. 그의 단단한 근육은 틀림없는 내 것이다. 남기의 억센 주먹은 오로지 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분노와 한도 힘이 된다면, 슬픔도 힘이 된다면, 그 증오의 힘 또한 철철 넘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이미 몇 마디 언급한 바가 있지만, 나의 유년은 나날이 지옥이고 눈물이었다.

도박과 술, 계집질과 남 등쳐먹는 사기, 밤낮으로 휘두르는 주먹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 나의 어머니가 택한 남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는 걸핏하면 본처라는 여자한테 팔뚝을 물어뜯기는 수모를 당했다. 멀리 도망가서 숨어 살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가 쳐들어와 주먹질로 앞풀이를 하고 뒤이어 본처가 달려들어 뒤풀이를 했다.

우리 모녀는 내 나이 열한 살이 되어서야 그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남자에게 새로운 먹이가 나타난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로 도망 왔다. 그때 이미 나는 내 방 서랍 속에 과도 하나를 숨겨놓고 지냈다.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면 아마도 나는 그 과도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랬다. 나는 그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비로소 내가 초월자라는 것을, 응징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전화 속의 고뇌에 찬 음성들이 새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그렇지요?’

pp. 70-75.

주석 및 참고문헌

  • 1
    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생각하면서 등을 돌린 이 관찰자에게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만 한다. “잠깐 멈춰서라. 여기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명랑하게 그대 앞에 펼쳐져 있는 이 동일한 삶에 대해서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들어보라.”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동반자인 현자(賢者) 실레노스(Silen)를 오랫동안 숲 속에서 붙잡지는 못한 채로 쫓아다녔다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왕이 마침내 그를 수중에 넣었을 때 왕은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다. 이 마신(魔神, Dämon)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이 강요하자 마침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나에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박찬국 역, 아카넷. 2007. pp. 72-73.
  • 2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 이철의 역, 문학동네, 2009. p. 154.
  • 3
    ‘다른 여성들의 우매함’에 유죄를 선고하는 강민주의 거리의 파토스의 정당성은 의심되어야 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듯한 이 위대한 사물들의 배치 관계를 바라보며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7월에 제기된 이 질문을, 강민주가 놓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애쓰는 이 질문을 여기에 달아둘 뿐이다.
  • 4
    이 대목에서 나는 강민주의 이중적 태도로부터 다자이 오사무와 그가 예수와 유다 간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쓴 단편 〈직소〉에 관해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과 나눈 다음의 대화록을 상기하고자 한다. 강민주는 복수에 대한 신성화, 정당화를 과도할 정도로 기도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녀는 시지프가 아닌 유다와 예수 사이에 위치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