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37. 합의가 살해당했다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합의가 죽은 현장에서, 한 가지 추리
합의가 죽었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시신의 상태로 추정해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끔찍하게도 살해당해서 차마 수습하기도 어려운 범죄 현장이 나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범죄가 그렇듯 대중은 이 피로 흩뿌려지고 공포감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현장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애초에 관심조차 없어서, 가장 중대한 범죄 현장이 여기 있음에도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나는 합의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겨우 눈치챘다. 그 참혹한 현장을 보고 차마 눈을 돌리기 어려웠던 나는 결국 경찰통제선을 비집고 들어가 사건의 현장을 낱낱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부족한 능력으로는 엉망진창인 범죄 현장에서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에 따라 추리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많았으므로 나는 이윽고 더욱이 깊은 미궁 속으로 스스로가 빠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합의가 어떻게 해서 살해당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범죄 현장은 너무 어지럽혀져 있었고 너무 많은 가능성과 증거들이 흩뿌려져 있었으므로, 수많은 추리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그러한 혼란스러움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내 한정된 경험과 삶을 통해 한 가지 추리라도 시도해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등 세계 곳곳의 나라는 민주제라는 통치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민주제 중에서도,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채택된 대의제에 따라, 곳곳에서 선거가 벌어졌으며 위정자(爲政者)들은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적임자라고 늘상 주장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누군가가 이러한 민주 사회의 가장 근본이 되며 흔들려서는 안 될 가치이자 존재인 합의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이 살해보다 더 끔찍한 범죄에 의한 피해자는 모든 이들이었다. 물론 피해자 중에는 선동가들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결코 언급한 바도 없으며 지시한 바도 없었지만, 누군가로 하여금 합의를 살해하게 만든 위정자(僞政者)들이 있었다.
선동가들은 합의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함을 아마도 발견했었을 것이다. 합의가 저기에 우뚝 서 있어서, 바로 그 앞을 막고 서 있어서 자신들의 종파가 차지하지 못하는 왕좌가 그들은 탐이 났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동가들은 역사의 오래된 관습과 같이, 문명이 발달하였음에도 결코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악성(惡性)을 발휘하여 합의,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가들만이 이 중대한 살해의 원흉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선동가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그 선동가들의 주장이 실질적인 살해 행위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선동가들이 제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선동가들은 그들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세를 불려왔으며, 이와 동시에 세상을 자신의 종파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 두 부류로 분류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파에 속하지 않은 것이 이단으로 간주되게 한 것은 대중의 광신이었다. 지성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말았다. 반대 견해가 있음을, 반대 증거가 있음을 어느 순간부터 간과했다. 현명하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어왔던 이성은 그 역할을 마땅히 다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부터, 비극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합의가 싸늘하게 죽어있는 현장에서 나는 오랜 믿음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민주제란 그 역사의 오랜 진통을 겪은 끝에 도출해낸, 그나마 가장 나은 통치 체제라는 것, 바로 그 믿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오늘날 민주제는 그 구성원들 스스로가 확증 편향으로 강화된 교리란 교리는 다 들고 와서 서로를 끊임없이 찔러댄 탓에 마침내 왕좌를 마땅히 지키고 있어야 할 합의를 죽여버리기에 이르렀다. 이제 왕좌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고 민주정은 그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것인지 곳곳에서 각 종파의 예배와 숭배가 이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독설을 뱉고 서로를 물어뜯으며 사회는 자연 상태로 회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끔 한다.
그러므로 사실 나는 그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도 다름없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서로의 말소리는 듣지도 않고서 서로 자신의 주장만을 과시하면서 소리를 질러댄 탓에 이제는 목이 쉰 소리까지 섞여 나오는 사회 속에서 이 끔찍한 범죄 현장으로 걸어 들어온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제 내 추리에 따른 범죄자의 몽타주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해졌으므로, 나는 그 유명한 비극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운명을 점차 선명하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비겁한 속물에 불과해서, 결국 행동으로 그 마땅한 속죄를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었음을, 자신이 바로 살해의 범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속죄라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그렇지 않고 있다.
속죄란 무엇인가. 이 살해를 알리기 위해서 울부짖는 것이 과연 속죄라 할만한 것이 될 것인가. 그러나 지금 내가 여기서 오이디푸스 왕과 같이 울부짖는다고 해도 바뀌는 것이 없을 가능성은 절망적이게도 압도적으로 높다. 세상은 타(他)에 무관심하며 저마다 신봉하는 교리는 하나씩 가지고 있는 대중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가진 것이라고는 비겁함 하나 밖에 없는 나는 천천히 몸을 숙여서 합의의 싸늘한 몸뚱아리만이 남아 있는, 이보다 더 잔혹하고 비참할 수 없을 살해 현장을 빠져 나왔다. 나는 뒤를 돌아 보았으며, 현장의 모든 모습을 되도록 선명하게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잘못된 위치에 쳐져 있었던 통제선을 떼어냈다.
합의는 죽었다. 그러나 살해당한 것은 합의 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