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6. 날개의 본질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는 등, 이 카페에 모아 두는 포스트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포스팅에 사용되는 모든 글의 출처는 포스트의 맨 하단에 표시합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금붕어는 물속을 헤엄치며 자신의 처지에 안위하지만 새는 끊임없이 위로 날아가고자 한다. 그렇기에 날개가 사라진 새는 위로 날아갈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지만, 금붕어는 위로 날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상, 그는 날개가 사라진 새였다.
이상이 쓴 ‘날개’에는 날개가 뜯긴 채 세상에 박제되어버린 천재가 등장한다. ‘날개’ 속 ‘나’는 아내에게 예속된 채 방 속에 갇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현실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가는 ‘나’는 매춘이라는 부정한 방법을 통해 아내가 벌어들인 돈을 그저 모으며 돈의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다섯 번의 외출을 거치면서 억압되었던 처지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첫 번째 외출을 한 뒤, ‘나’는 자신이 모으던 은화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다. 그러나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나’는 일을 하던 아내에게 방해가 되었기에 아내는 ‘나’에게 수면약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며 계속해서 먹인다. 우연히 자신이 먹던 약이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아내에게 깊은 배신감을 얻고 외출을 하고자 하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진 채 외출을 감행한다. 이 외출에서 돌아오던 중 아내의 매춘 행위를 목격한 ‘나’는 아내에게 받은 돈을 다 버리고 자신의 의지로 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뜯겼던 날개가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외친다.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위를 향해 날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방 안에 갇혀 있던 ‘나’는 현실이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알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고, 바깥 세상의 커피 맛을 알게 되면서 그는 변화된다. 다시 날개를 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더 날아보기를 소원하며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라고 외쳤다.
이러한 ‘나’의 모습에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나’의 변화는 이상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맥락을 같이 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이었던 이상은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라는 제약에 의해 억압당했다. 알아도 모른 척 해야만 하고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지식인들은 ‘날개’ 속 ‘나’와 같이 방 안에 갇힌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지식인들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외친 것이다. 다시 날개를 펼치라고, 계속해서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외출을 감행하고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라고.
소설 속 ‘나’와 현실 속 이상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절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처음을 여는 첫 구절을 통해 이상은 말한다. ‘나는 유쾌하오.’라고. 박제가 되어 날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는 유쾌하다고 말하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태도가 반어법인지 자기 최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긍정이라는 힘을 잃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유쾌하지조차 못한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겠는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와 같은 정체성 상실은 꼭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혹독하고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유쾌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나’처럼 외출을 감행하여 날개를 찾고자 소원할 수 있을까.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이 날개를 얻어 위로 날아갔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날개를 찾고자 소원하는 그 자체이다. 다시 한 번 날고 싶다는 그 마음, 날개를 가지고 싶은 염원을 가졌을 때 이미 우리는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마지막 ‘나’는 이미 정체성을 회복하였다. 날개의 본질은 가졌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지기를 원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날개의 본질 – [날개]를 읽고’. 김시원. 고전의 숲 과학의 길. 경남과학고등학교(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