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의 이해(Understanding Western Philosophy) 문답 #7. 중간 시험 (Mythos & Logos적 사유 · 인지론 · 마음의 철학) 과제 Review
#1. 서양철학의 시작을 통상 로고스적 사유의 출현으로 해석한다. 로고스적 사유의 출현과 관련하여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이 가지는 의미를 서술해보시오.
로고스(Logos)적 사유는 이성 · 합리 · 논증에 근거하지 않고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전승되어 온 사유 형태인 뮈토스(Mythos)적 사유에 대한 대항책으로 제시되어, 이성 · 합리 · 논증에 근거하고 사물을 관찰 · 관조하여 그 너머에 있는 법칙이나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유 형태였다. 로고스(Logos)적 사유는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법칙이나 원리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도 바로 이 점의 연장선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두 세상이 어떤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밀레토스 학파는 주로 질료적 측면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은 무규정자이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은 공기이다.”와 같이 주장하기도 했고, 피타고라스 학파는 주로 형상적 측면에 집중하였고 만물에 대한 형상부여자라고 생각한 ‘수’에 특히 집중하였다.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는 서로 다른 측면에 집중하기는 했지만 모두 세상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로고스적 사유를 전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 철학의 출발점을 연 것으로도 평가해볼 수 있다.
#2. 데카르트가 제시한 “사악한 악마”의 가설이 그의 방법적 회의에서 가지는 의미와 기능에 대해 서술해 보시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 ‘사악한 악령의 가설’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얻어진 앎, 나아가 이성의 능력 전체에 대한 회의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사악한 악령의 가설’은 지금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앎이란 모두 사악한 악령이 나 자신을 기만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설 논증을 말한다. 사악한 악령의 존재 가능성 때문에, 데카르트의 ‘방법적 논증’에서 기존에 신뢰할만한 것으로 여겨져왔던 이성을 통해 산출된 앎은 모두 의심해야 할 대상으로 전환하게 된다. ‘사악한 악마’의 가설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얻어진 앎과 이성의 능력 전체에 대한 회의를 제공하기 때문에, 흔히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영역까지 의심의 대상으로 돌리는 중대한 기능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3. ‘우리는 외부 대상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로크가 제시한 답과 이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에 대해 서술해 보시오.
‘우리는 외부 대상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로크는 ‘표상적 실재론’을 통하여, 우리는 존재하는 외부 세계의 사물을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관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고 주장하였다. 즉, 로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건부로 그렇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존 로크는 ‘표상적 실재론’에서 분명한 외부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우리가 지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외부 세계의 사물이 아닌 그 사물이 감각 기관을 거쳐 우리 안에 확립시킨 내적 표상인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동시에 사물에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이라는 명확히 구분되는 두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제1성질은 사물을 구성하는 미립자에 결부된 성질로 사물을 구성하는 미립자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성질이며, 제1성질의 관념은 제1성질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2성질은 제1성질이 지각자의 감각 기관과 상호작용하여 형성되는 성질로 제2성질의 관념은 제2성질과 상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버클리는 ‘관념론’을 주장하면서 경험론적 시각은 존 로크와 공유하면서도 ‘외부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버클리는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존 로크의 ‘표상적 실재론’을 비판했다.
첫째로 버클리는 존 로크가 그의 논증에서 제시한 ‘추상관념’은 허구적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으로 버클리는 ‘운동 추상 관념’을 예시로 들었는데, 로크가 정의하는 ‘운동 추상 관념’은 직선 운동에 대한 관념도 아니며 곡선 운동에 대한 관념도 아니면서, 동시에 이들 운동 모두에 대한 관념이라고 했다. 그런데 직선 운동도 아니며 곡선 운동도 아니고, 동시에 이들 모든 것인 운동은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운동 추상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클리는 모든 추상관념은 마찬가지로, 단지 언어적 편의를 위하여 도입된 허구일 뿐이지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둘째로 버클리는 존 로크가 제시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고 애매모호하며, 동시에 사물의 실질적 성질이라고 주장한 제1성질마저도 관념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버클리는 존 로크가 제시한 제1성질에 대한 이론을 인정하면, 제1성질은 사물의 미립자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먼저 논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관념이거나 사물의 성질 둘 중의 하나인데, 존 로크가 제시한 제1성질에 해당하는 형상이나 연장은 사물이 변화하지 않았음에도 종종 우리가 착각하므로, 제1성질은 사물의 성질이 아니고 관념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셋째로 버클리는 존 로크의 표상적 실재론은 그 이론 자체가 유사성 테제, 즉 “사물의 제1성질에 대한 관념은 사물의 제1성질과 유사하다”와 양립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즉, 내적 모순을 가진다고 비판했다. 표상적 실재론에 따르면 앎과 지각의 유일한 대상은 외부 사물 세계가 아닌 내적 표상인 관념일 뿐인데, 유사성 테제는 결코 앎의 영역이 될 수 없어 불확실한 외부 세계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4. ‘몸과 마음은 구분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카르트의 논증과 이 논증의 문제점에 대해 서술해보시오.
데카르트는 그의 심신이원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크게 두 가지 논증을 사용하였다.
첫 번째 논증은 ‘의심가능성으로부터의 논증’으로, 다음의 논증 구조로 구성된다.
- P1. (동일한 것의 식별불가능성 원리) X와 Y가 동일하다면, X와 Y는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
- P2. ‘신체’는 ‘그 존재를 의심가능함’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 P3. ‘정신’은 ‘그 존재를 의심불가능함’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Cogito 명제)
- C. 신체와 정신은 상이하다.
이 논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의심 가능함’과 ‘의심 불가능함’은 대상의 속성이 아닌 대상에 대하여 판단자가 가지는 주관적인 판단 또는 견해를 기술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위 논증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두 번째 논증은 ‘가분성으로부터의 논증’으로, 다음의 논증 구조로 구성된다.
- P1. (동일한 것의 식별불가능성 원리) X와 Y가 동일하다면, X와 Y는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
- P2. ‘신체’는 ‘가분성’을 가진다.
- P2.1. ‘신체’는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 속성을 가진다.
- P2.2. 연장 속성을 가지는 사물은 가분성을 가진다.
- 小C. ‘신체’는 ‘가분성’을 가진다.
- P3. ‘마음’은 단순한 실체로, ‘불가분성’을 가진다.
- C. 신체와 마음은 상이하다.
이 논증에 대한 문제점의 지적은 우선 칸트의 지적을 생각해볼 수 있다. 칸트는 위 두 번째 논증에서 ‘마음’에 ‘단순한 실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범주적 오류라고 지적한다. ‘단순성’과 ‘실체성’과 같은 성질들은 외부 대상에 대하여 우리가 판단하거나 분석할 때 사용하는 범주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는데, 데카르트는 내적인 것인 ‘마음’에 이들 범주를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칸트의 지적 이외에도, 데카르트가 ‘마음’은 ‘단순한 실체’이며 ‘불가분적’이라고 주장한 전제 P3에 대해서는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발견되는 다중인격 등을 근거로 하여 적절하지 못한 가정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5. 전통적인 심신이원론(데카르트적 실체이원론)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이원론적인 대안에 대해 서술해 보시오.
전통적인 심신이원론(데카르트적 실체이원론)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갈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은 심-신의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득력 있게 이들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데카르트는 물론 송과선이나 신경관과 같은 개념을 통하여 마음과 몸의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여전히 이러한 개념 제시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심-신의 상호연관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유효하다.
둘째로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은 궁극적으로는 유아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무용하다는 비판이 있다.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에 따르면 확실한 것은 사유하고 있는 존재자인 나 자신의 실존 뿐이고, 그 이외의 모든 외부의 대상은 의심의 대상이 되므로 다른 사람 또는 사유자의 존재는 의심의 대상이 되어 궁극적으로 이 실체이원론은 유아론으로 귀결되게 된다. 이러한 유아론으로의 귀결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논의하지 못하게 하므로, 전혀 유용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데카르트적 실체이원론에 대응하기 위한 다른 형태의 심신이원론에는 심신평행론, 부대현상론, 기회원인론의 3가지가 있다.
심신평행론에서는 몸과 마음은 각각 독립적으로 잘 맞추어진 시계와 같이 평행하게 진행한다고 본다. 즉, 심신평행론에서는 몸과 마음의 상호연관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심신평행론의 대표 주자로는 라이프니츠가 있으며, 라이프니츠는 이 잘 맞추어진 몸과 마음의 진행의 원인으로써 ‘신’을 지목하는 예정조화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부대현상론에서는 몸과 마음의 상호연관성을 인정하지만 몸 → 마음의 일방적인 영향만을 인정한다. 즉,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보면서 몸은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부대현상론에서는 이러한 일방적인 영향을 상정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며, 게다가 자유의지와 같은 요소를 설명할 수 없다.
기회원인론에서는 몸과 마음은 직접적으로 상호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신’이나 ‘자연의 우연성’과 같은 중간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6. 심신동일론(물리주의)의 두 가지 형태를 비교해 보시오.
심신동일론에는 ‘유형 동일론’과 ‘개별자 동일론’의 두 형태가 있다. ‘유형 동일론’은 정신 상태와 두뇌 상태는 그 유형에 있어서 동일하게 대응된다는 형태의 물리주의 이론이다. 즉, 어떤 종류의 정신 상태는 항상 특정 종류의 두뇌 상태에 대응된다고 본다. 유형 동일론에서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동일한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에 상응하는 유형의 두뇌 상태를 가지게 된다고 본다. 즉, 서로 다른 두 사람 A와 B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며, 슬픔이라는 정신 상태 종류에 상응하는 두뇌 상태의 종류가 N이라면, A와 B는 N에 속하는 두뇌 상태를 가지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유형 동일론은 사람마다 어떤 감각 경험에 노출되었을 때 주관이 가지게 되는 고유한 느낌인 감각질이 동일한 감각 경험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고, 자유의지를 설명하기도 어려운 문제가 있다.
‘개별자 동일론’은 ‘유형 동일론’과는 달리 굳이 특정 종류의 정신 상태는 특정 종류의 두뇌 상태에 대응된다고 보지는 않고, 각각의 정신 상태는 각각 상이한 두뇌 상태에 대응된다고 본다. 이러한 개별자 동일론은 감각질을 설명할 수 있으며, 개인마다 상이한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유형 동일론’은 세 가지 비판에 직면한다. 첫째로는 심신이원론에서 주장하는 내성 · 지각과 같은 과정보다 더 알기 어려운 심-신의 연관 과정을 도입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유형 동일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같은 비판은 일종의 ‘무지에 호소하는 비판’에 불과하다고 반론한다. 둘째로는 동일한 것의 식별불가능성 원리에 의하여 몸과 마음이 같다면 둘은 모든 속성을 공유하여야 하는데, 실제로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 둘을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라는 비판이다. 셋째로는 앞서 언급한 감각질을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개별자 동일론’은 심-신의 관계를 다소 임의적인 것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심-신의 관계를 오히려 더욱 신비화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마주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