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아버지께.
아버지, 지난 밤 당신은 당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고 그 어떠한 힘도 없는 상태로 세상에 부딪혀봐야 바뀌는 것은 없고 너만 아플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제가 세상을 바꾸려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위치와 힘을 가져야 하며, 지금 제가 시도하고 있는 연대와 시민 책임, 시민 정치 참여는 자본과 권력의 힘 앞에서는 무능할 뿐이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일 겁니다.
아버지, 지난 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지는 싸움은 애초부터 하지 말아라. 이기는 싸움을 해라〉. 그리고는 이기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있는 사람 그리고 단체들과 어울려 지내라고 충고하시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바꿀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현실은, 그리고 어쩌면 저도 똑같이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현실에서는 진실과 정의는 늘 힘 있는 자들의 손에 은폐되어 왔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 저는 솔직하게 고해둡니다만 두렵습니다. 무엇이 두렵냐고 반문하시면 아버지 당신과 같은 사람이 혹여나 되고야 말까 두렵습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결국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거나 그들이 되어서 스스로와 일가족을 보전하는 것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을 다음 세대에는 물려줄 수 없다는 지금의 철없고 풋풋한 마음을 잃어버릴까 두려운 것입니다.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살아오신 세월과 수많은 순간들마다 당신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느꼈을 좌절이나 슬픔을 힐책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철없는 제가 나이를 먹은 어느 순간에 당신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갈까 두려운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을 때 제 아이와 그 또래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30년 전과 똑같은 세상을 물려주게 될까 두렵습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도 강조하시지만, 그리고 저도 인정하지만 – 저는 갓 스물이 되었고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전무한 철없는 사회초년생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제가 마주할 세상은 지금 제가 알고 있는 세상에 비하여 한참 더 무섭고 냉혹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더라도 저는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과 제가 경험했고 경험할 세계가 제아무리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운 곳, 권력과 자본이 진실과 정의를 묻어버리는 곳, 그리고 힘 없는 자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곳이라고 할지라도.
당신께서 집으로 돌아오실 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깨 너머에 걸려 있지만 오직 짐작만이 그것의 존재를 가늠하게 할 수 있을 뿐인 무게, 그리고 당신께서 살아오셨던 그러나 저는 알지 못하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수없이 깨졌을 마음 그 모든 것들이. 가정이라는 보호된 환경 속에서 저는 늘 아버지 당신에게 물어왔습니다. 〈제가 장차 살아가게 될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라고. 당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셨습니다. 단지 말뿐만이 아닌 행동, 그리고 나아가 당신께서 살아오신 그 삶 자체로 말이지요. 철없고 어렸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습니다만, 시간은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씩이나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당신의 아들은 세상은 어떤 곳인지 조금씩 가늠해보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곳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할지 상상해보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아들이 생기면 지금의 아버지의 위치에 제가 서 있게 될 것이고 제 아들이 지금의 저 자신의 위치에 서게 되겠지요. 그 때 아들이 〈제가 장차 살아가게 될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라며 묻는다면 저는 무어라고 대답하게 될까요? 그 대답은 당신의 어깨에 걸려 있던 무게와 비애가, 그리고 어쩌면 일종의 죄책감. 그것들 모두가 당신의 아들에게도 동일하게 걸려 있다는 사실이 되고야 마는 것일까요?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말씀,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고 그 어떠한 힘도 없는 상태로 세상에 부딪혀봐야 바뀌는 것은 없고 너만 아플 뿐이다〉는 처음 그 말씀을 들었던 순간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고 두렵게 들립니다. 제가 아프고 깨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제 아들에게도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넘겨주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당신의 곁에서 어깨 너머로 세상을 배웠던 당신의 아들은, 당신의 말씀대로 어쩌면 무지와 무능 속에서 겁없이 세상을 마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철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당신의 아들은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어쩌면 조금은 다른 결말을 기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의 서사와 비슷한 결말로서 제 서사도 종결에 다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제 아들을 마주할 때마다 직면하게 될 당신과 당신의 아들, 그리고 당신의 손자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무게가 조금이나마 덜해질 수 있는 그런 결말, 그리고 지금의 두려움이 의미 있는 것으로 남을 수 있을 그런 조금은 색다른 결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