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라스트 세션》이 던진 질문들
오늘 대학로 극장에서 친구와 함께 연극 《라스트 세션》을 보았다.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지만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유신론을 주장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 교수 C. S. 루이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실제로 만나 열띤 토론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다루는 이 연극은, 주제가 ‘신’을 관통하는 만큼이나 굵직굵직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나에게 던졌다.
돌아와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극에서 다루는 질문 중 다음의 3가지 정도 질문이 기억에 남았다. 여기에 아무래도 그 질문들과 이에 대한 대답들을 기록해두는 것이 적절해보여, 간단하게 정리해두기로 했다.
#1. 신은 존재하는가?
나는 솔직히 프로이트의 입장, 즉 ‘무신론’에 더 마음이 끌린다. 예전에 꽤 오랜 기간 무신론을 믿어왔던 영향도 있겠지만, 신의 존재 유무를 가리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취하고 있는 ‘불가지론’이 나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무신론이 나의 기본적인 세계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세계관에는 기본적으로 존 로크의 〈경험론〉과 오랜 기간의 이과 교육에 의한 기계론적 시각, 그리고 뉴스와 책을 통해 목격한 인간의 끔찍한 행위들이 아마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성악설〉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만 알 수 있다”로 요약할 수 있는 존 로크의 경험론이 “모든 사물은 그 구성 요소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체계적이고 기계적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기계론적 시각과 결합하고, 여기에 〈성악설〉의 한 갈래라고도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라는 명제까지 달라붙으면서 아무래도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자신의 생존이라는 목적 하에 외부 자극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어쩌면 리처드 도킨슨의 생각과도 닮아 있을지 모를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생각은 ‘나의 존재 의의’를 희미하게 만든다. 내가 만약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행위란, 즉 삶이란 그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불과할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란 부정당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여 살아가는 삶’이라는 표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명은 철학에서 이른바 ‘온건한 결정론’을 통해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철학의 몫으로 넘기고, 나는 여기에서는 이러한 나의 인간에 대한 시각이 신에 대한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는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나의 결론은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 속에서 ‘금지의 주체’라는 개념이 ‘신’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고, 둘째는 사회 유지 수단으로서의 ‘신이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부터 논해보자. 작중 폭격의 공포에 직면한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모두 방독면을 쓰거나 불을 끄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숨을 때 보이는 반응 – 이를테면 성호를 긋고 “주여”라고 외치는 등, 인간이 신을 찾는 순간은 니체가 지적한 바 있듯 〈위기 상황〉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고통이나 상황이 닥칠 때, 인간은 신을 찾는다. 나는 여기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이라는 말에 집중하고 싶다. 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일’이란, 표현을 바꾸어보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고, 이는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면 ‘자연에 의하여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죽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며 또한 혼자서 자연 앞에 맞서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원시 인류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옆의 동료가 너무나도 쉽게 죽는다는 것을 목격하고, 자연재해가 시시때때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경험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인간은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상반 개념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규명짓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 외의 것, 자연과 같이 무시무시한 것이 그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원인’, ‘불능의 원인’, ‘금지의 주체’가 바로 신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은 아닐까. 사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금지의 주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대표적인 교리들은 전부 금지 명령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인 십계명만 하더라도,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런 문장들은 모두 인간에게 특정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금하는 것이니까……
두 번째 가능성에 대해 논하자면, 종교를 사회의 유지 수단 중 하나로 보는 시각에 대하여 논해볼 필요가 있겠다 깊다. 나는 종교를 법의 전신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종교와 법은 모두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특정 행동을 할 것을 개인에게 명령하는 한편 특정 행동은 하지 말 것을, 하는 경우에는 처벌을 받을 것임을 개인에게 명령하고 알리기 때문이다. 성문법이 있기 전에 관습법이 있었고 관습법이 종교와 공존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는데,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나는 관습법이 종교로 변모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자가 없던 시절 인간은 어떻게 사회를 결속하기 위한 규칙들을 다음 세대로 전달했는가? 말로 전달했다. 그런데 말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기억은 종종 정보를 오-기억하기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정보는 금세 까먹어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류는 오래 전부터 운율이나 서사를 동원해서 기억 속에 정보를 최대한 보전하려고 노력해왔다. 심리학에서도 기억과 관련해서는 운율이나 서사가 동원되는 경우 인간은 해당 정보를 더 잘 기억한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어쩌면, 관습법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법문에 각종 서사를 도입했고, 여기에 각종 오-기억과 와전이 개입해서 불필요해보이는 정보들이 들어가서, 오늘날 각종 교리와 경전들, 신화들과 전통들이 완성된 것은 아닐까?
#2.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작중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성경 속 진술을 고려할 때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는 것에 견해를 같이 하지만, 프로이트는 예수는 ‘정신병자’이거나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정신병자’인 경우 예수는 일반적인 과대망상 환자와는 다르게 현실 감각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정신병자’일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하고, 이어 ‘사기꾼’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에 자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끝까지 피할 수 있는 사기꾼’이 존재할 수 있느냐를 근거로 들어 ‘사기꾼’일 가능성도 일축시킨다. 그리하여 남은 가능성은 오직 예수가 실존하는 신의 재림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에 반대한다.
나는 예수가 ‘실패한 사기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광신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참상을 낳았다. 어떤 경우는 자신들이 숭배한 대상에게 희생이나 자살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예수도 비슷한 경우에 처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즉, 예수는 처음에 자신이 ‘신의 재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득을 얻으려는 사기꾼이었는데, 자신의 세력을 불려나가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광신으로 변함에 따라 결국은 대중의 광신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닐까? 광신도들이 그들의 우상을 희생시킨 다음에 그 우상을 더욱 신격화하고 각종 전설과 헛소리를 만들어낸 역사를 고려하면, 그 뒤에 예수 재림이나 부활과 같은 목격담은 이것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3. 도덕률은 내재하는가, 아니면 외재된 도덕률이 내재화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나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편이다. 즉, 나는 인간에게 도덕률은 내재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은 순수한 이기심이나 욕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심리 이론에서 원초아(id)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원초아(id)가 세상과 대면하는 부분인 자아(ego)가 사회나 부모 등으로부터의 금지를 받아 욕구 실현이 좌절되는 경우, 그러한 좌절이나 실패가 내재화되어 도덕률을 담당하는 정신에서의 일종의 ‘금지의 주체’인 초자아(superego)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나는 프로이트의 완전한 지지자는 아니지만, 존 로크의 〈경험론〉의 지지자로서, 그리고 시간에 따른 아이의 도덕률 학습을 보면서 도덕률은 학습되는 것, 즉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므로 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