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맹점
전날(2022. 3. 4.) 늦은 밤에 나의 독서 모임 중 하나인 〈2022. 오전이영 ‘괴델, 에셔, 바흐’ 독서회〉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을 통하여 모종의 토론이 있었는데, 그 토론에서 제시된 허상 · 허무와 관련된 의견들에 대하여 나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허상과 허무에 대한 견해가 옳은 것일수도 있지만, 이 둘은 한 인간의 삶과 결합하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자포자기의 의식에 빠지게 되어 개인의 ‘삶’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나는 개인의 ‘삶’ 자체에 관념적인 의미는 아니더라도 다만 ‘발전적’인 측면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해당 의견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허상과 허무에 대항하고자 한다.
2022. 3. 5. 커피사유.
어제의 논의에서 등장한 소설 《무한의 마법사》에서는 “모두가 부처이면서 예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소설에게 있어 부처는 “세상이 허상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고통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 혹은 현실이라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자”를 말하며, 예수는 “세상이 허상임을 알고 있음에도 진실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소설은 〈세상은 곧 허상〉이라고 보는 부처와 예수를 앞세워, ‘허상 속에서 계속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인생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인간은 ‘허무함’ 속에서 그저 죽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의 경험에서 비롯한 이른바 〈인생의 허무〉에 대하여 이 소설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란 곧 무의미한 반복〉이라고 생각하거나, 이를테면 산꼭대기에서 계속 굴러떨어진 바위를 영원히 끌어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와 자신의 운명이 마치 동형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소설에서 앞세우는 부처와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사는 것 자체에서 무언가를 얻거나 획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그저 인간에게 있어 목표는 궁극적으로 〈살아감 그 자체〉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가져오는 영향에 대하여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바위〉 이야기로 비유해보자면, 이들은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란 오직 ‘정상에 도달해도 다시 떨어지는 바위’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해도 세계는 바뀌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즉 변혁하고자 했던 대상은 사실 바뀌지 않고 계속 같은 자리로 형태를 바꾸어 돌아오기만 했다는 인식을 근거로 들며 인간의 행위는 효능감을 상실했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위는 그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결과란 인간 그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 기억되고 다시 사유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행위는 무엇보다도 인간 그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세계에 대하여 인간이 가지는 생각을 변혁시킨다. 행위는 경험을 창출하고, 경험은 인간의 인식에 있어 주요한 밑거름이 된다. 그러므로 행위는 무의미함 속에서의 저항이라고 해석되기 보다는 오히려 니체의 〈자기-초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행위는 인간을 행위 이전과 행위 이후로 나누고 둘 사이에 일방적인 통행로를 건설한다. 인간은 행위가 건설하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행위 이후의 인간이 되며, 행위 이전의 인간과는 다른 인간이 된다. 인간은 행위를 통하여, 있는 힘껏 세계에 대해 부딪히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알 속에 갇혀 있는 수동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사조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인간의 행위가 다름아닌 그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명제는 사회는 인간들로 구성된다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자명한 명제와 결합되어 확장될 수 있다.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는 변화한다. 인간의 행위를 통한 자기-초극 과정이 행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므로, 그러한 행위의 변화의 총합으로 나타날 사회의 변화 또한 행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사회의 변화가 행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만약 사회가 하나의 〈시지프스의 바위〉였다면 그 바위는 당초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실제로 사회의 〈바위〉가 종종 굴러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지만,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 인한 인간의 변화를 합하는 과정은 단순 합이 아니며 인간 사이의 복잡한 상호 연관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합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사회의 〈바위〉는 굴러떨어질 수는 있더라도 결국 원래의 위치보다 위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는 것 자체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이 인간과 세계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로 이루어지는 이상, 산다는 것은 분명히 살아가는 주체가 변화한다는 것, 삶을 둘러싼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주체가 변화한다는 것, 삶을 둘러싼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은 곧 삶 그 자체가 변한다는 것과 동일하므로, 인간은 따라서 허무 속에서 버둥거리는 인간이 아닌 자신의 삶 자체를 계속 변화시켜나가는 역동적인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소설은 인간의 행위가 가져오는 이러한 역동성 전반을 무시하고 그저 자신의 무력했던 경험과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반복되는 듯한 고리들을 보고 이것은 허무라고 외치며, 독자로 하여금 삶의 역동성으로부터 도피하라고 요구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부당한 요구에 응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나가는 인간의 역동적인 모습과 그러한 인간들에 의해 조금씩 변화해나가는 세상의 모습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제1악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 곡에서는 바이올린의 독주가 점차 그 자신의 조성과 연주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하더니 이것이 어느새인가 관현악 전체에 영향을 주어 이들을 달라지게 만든다. 어쩌면 멘델스존은 인간과 세상의 상호작용을 이 음악에 담아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