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
#1.
니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너의 삶이라면, 너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약 2년 전부터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다듬어왔다.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 대답은 니체가 도출한 대답과 유사한 것 같다. 그러나 니체의 대답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졌으나 나의 대답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2.
니체의 대답은 〈영원회귀사상과 운명애〉로 요약할 수 있다. “영원히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똑같은 삶을 산다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영원회귀〉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절망이나 체념을 제시하면서, 니체는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 또는 바람직한 인간 ― 즉, 〈초인〉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들마저도 긍정하며 스스로의 성장에 이용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매 순간마다 스스로를 엄습하는 것이 고통이지만, 이 고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고통 뒤에 올 ‘결과’, 이를테면 ‘유토피아’나 ‘내세’와 같은 긍정적인 ‘결과’를 기준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자체를 긍정하면서 그리고 고통이 가져다주는 스스로의 변화를 긍정하면서 삶의 매 순간에서 존재의 충만과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며 바로 이 태도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즉, 니체는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보일 수 있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찾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결과’를 보았던 이들은 삶의 종국적인 결과가 죽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체념하는 염세주의적인 관점으로 빠져들지만, ‘과정’을 보았던 니체는 삶의 매 순간이 가져다주는 ‘변화’, 즉 자신의 ‘살아있음’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으며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3.
‘살아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언제 우리는 사물이나 존재가 살아있다고 말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변화’의 유무가 어떤 ‘존재’가 살아있다고 표현하기 위한 핵심적인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흔히 어떤 대상이 죽어있다는 표현은 그 대상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거나 변화하지 못할 때에 사용한다. 이를테면 죽은 꽃과 살아있는 꽃을 판가름하는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그 꽃이 다음 해에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이다. 그 꽃이 다음 해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계속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꽃이 죽어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 꽃이 다음 해에 꽃을 피운 뒤 겨울이 닥쳐 꽃이 지고, 다시 그 다음 해에 꽃을 피운다면 우리는 그 꽃이 살아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기는 하던가? 우리가 ‘죽어있다’라고 표현하는 것들마저도 변화하지 않던가? 죽은 유기체는 부패하고 분해된다. 무생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도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들에 따라 녹이 슬거나 다른 물질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만약 ‘변화’의 유무야말로 우리가 어떤 대상이 ‘살아있다’고 표현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조건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살아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죽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살아있으며’ 니체의 결론을 여기에 적용하면 바로 이 점이 모든 사물에 의의를 부여한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세상은 더 이상 고통으로 가득찬 죽음의 세계일 수는 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있는 것들로 가득찬 세계가 된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막고 있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것과는 다른 존재로서 현재에 실존하는 사물들로 가득찬 것이 바로 세상이 되는 것이다.
#4.
‘변화하는 것’, 즉 ‘어제의 것과는 달라진 오늘의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에의 의미 부여는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어제의 것과 같은 오늘의 것’은 ‘죽어있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게 하며 의미를 앗아간다. 니체의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한 의미의 부여’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명제의 조합은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만, 나에게 있어서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한 의미의 부여’는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과 절망을 산출하기도 한다.
문제는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어제의 것과 같은 오늘의 것’이 종종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수식어인 것 같다는 것에 있다. 나 자신을 ‘살아있는 것’으로 정의하게 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란 ‘어제의 나 자신과 오늘의 나 자신이 같지 않음’, 즉 ‘오늘의 나 자신은 어제의 나 자신에 비해 발전했음, 달라졌음’이라는 진술이다. 이 진술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의 나 자신이 어제의 나 자신과 견주어 볼 때 변화한 것이 없다면, 나는 스스로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근거를 잃은 것이다. 나는 이 근거를 종종 일상 속에서 잃어버리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나는 생각보다 자주 중단하기 때문이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현재 대학이라는 땅 위에서 끊임없이 각종 논문과 글을 보는 행동,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교과서를 열람하는 행동,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행동. 그러한 모든 행동들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과정이다. 호기심과 ‘무지’와 ‘무능’이 나에게 선사하는 부끄러움과 열등감에 강하게 추동됨으로써 나 자신이 이른바 ‘학문의 열정’에 불타오르게 될 때 수행하게 되는 모든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의 모든 생각들의 전개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나의 육체와 정신에 상당한 피로를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기원하는 강력한 수치심과 열등감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여유나 쉼은 존재할 수 없다. 그 과정을 중단하는 것 자체는 곧 변화와 성장의 중단과 동치이기 때문이며, 이는 곧 죽음과 동치이고 존재 의의의 상실과 동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개의 무지 그리고 한 가지의 무능이라도 이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시간의 투자를 요한다. 그러나 니체의 질문과 나의 경험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으며, 나의 무지와 무능의 개수는 너무 많다. 따라서 나는 급박해지게 되는데, 사실 완전히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바로 이 제약들 때문에 불가능하고, 나 또한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중요한 것은 단지 그 과정을 중단하지 않는 것 뿐이지 그 과정을 진행하는 속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 속에서 나의 일명 〈지적 투쟁〉의 중단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나의 육체와 정신에는 모종의 한계가 있는 것인지 이와 같은 피로가 누적되면 종종 나는 게으름을 부린다. 즉, 나는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사실상 유일한 과정을 중단한다. 어떤 하루는 인터넷 영상을 보는데 온전히 날려먹기도 하고, 어떤 하루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침대에서 끝끝내 몸을 일으키지 않기도 한다. 이 중대한 과정의 중단은 운동을 별로 하지도 않기 때문에 신체의 유의미한 변화는 사실상 일어나지 않으며, 동시에 악기를 다루거나 아니면 모종의 생산 활동을 취미로 그다지 즐기지도 않으므로 어떤 학업 외적으로 부차적인 능력을 변화시키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실상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규명짓는 거의 유일한 활동을 중단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나의 학업적인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에 심각한 우울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활동의 중단이 곧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자체를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부정되면 ‘살아있음’ 그 자체에 결부되어 있는 나의 존재 의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되고, 그렇다면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는 나의 시간들은 통째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의미 없는 활동을 지속하는 죽은 인간은 나 자신일 수는 없다. 나 자신은 스스로가 살아있는 존재라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간 그 자신의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아직까지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5.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도출한 위와 같은 대답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는 니체의 대답과는 다르게 우울과 절망으로 나를 이끈다. 나는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배경에는 사실 지나치게 엄격한 ‘살아있음’의 정의의 적용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엄격함을 버리기가 싫다. 그래도 대학의 땅에서 힘겹게 여기까지 스스로를 끌고 올 수 있었던 원인이 되는 강력한 추동력이 바로 이 우울과 절망이 나에게 가하는 강력한 채찍질이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철학과 지식이 여기까지 성장한 배경에는 이 엄격함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들 철학과 지식으로 인해 나는 은근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나는 나의 대답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는 싫다.
하지만 이 사상은 나 자신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면서, 정신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나는 하루빨리 니체의 대답과 나 자신의 대답 사이에서 모종의 조화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