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으로서의 〈니체〉
#1.
……. 이제야 알 것 같다. 니체의 〈자기초극〉,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소외〉, 프로이트의 〈원초아, 자아, 초자아〉,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나에게 미친 영향을.
니체 철학에 내가 이렇게까지 집착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를 나는 그동안 “스스로의 만성적인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라고 진술해왔다. “니체의 철학은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고통을 긍정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주체적인 인간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나에게 니체 철학은 훌륭한 정신적 지주요 하나의 길라잡이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게 된 것 같은데, 내가 니체 철학에 집착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2.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나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소외〉 개념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대학의 강의가 적어도 그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오히려 그 자신을 억압하는 낯선 힘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지시하는 〈소외〉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와 함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하고 있는 《루트비히 포이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이라는 소책자를 자발적으로 읽기까지도 하면서까지 괴상하게도 〈소외〉로 깊게 파고든 나 자신도 간접적이라면 간접적일 원인을 제공했다.
마르크스로부터 내가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는 적어도 네 가지의 〈소외〉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첫째는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둘째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셋째는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넷째, ―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스스로를 상품화할 것을 요구하며 개인의 노동으로부터 생산된 것을 자본가들의 이윤으로 수탈해가기 때문에, 체제 하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동 생산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노동자들에게 이 때문에 노동이란 창조의 기쁨이 되어야 하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수탈이 되며, 경쟁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개인을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착취하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이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소외〉가 말하는 것이었다.
#3.
마르크스를 본격적으로 읽게 된 이번 학기의 이전 ― 그러니까 지난 겨울방학 동안, 나는 잠깐 프로이트에 도전하기 위해 그의 저서인 《꿈의 해석》에 도전했었다. 물론 아주 자발적인 동기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방학 동안에 진행된 고전 읽기 수업 때문에 조금이나마 읽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의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으로서의 프로이트의 파급력, 그것은 폭발적이었다. 그가 제공한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는 틀, 즉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구분 이외에도 정신을 원초적 욕망의 집합체인 〈원초아 id〉, 세상과 정신이 대면하는 부분인 〈자아 ego〉, 그리고 마침내 세상과 정신의 대립 끝에 산출된 ― 변증법적인 합(合), 즉 〈초자아 superego〉로 구분하는 그 틀은 이들 구분이 오늘날 심리학계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에게는 중대한 내면 분석의 도구와 단초를 제공했다. 나는 특히 〈초자아〉에 집중했다. 그 이유는 물론 지금에서야 어떤 진술을 하던지 간에 하나의 추측이 될 뿐이겠지만, 아마도 “무엇이 나를 억누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고 무언가가 나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4.
니체를 공부하면서 잠깐 함께 살펴본 철학자 쇼펜하우어. 그의 사상에 대하여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딱 하나, 강의에서 정확하게 새겨들은 것이 있다. 그는 세계는 일종의 우주적인 의지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의지의 기본적인 속성은 다름 아닌 ‘생존의지’적 속성이라고 보았다 ― 는 것. 이것 하나만큼은 괴상하게도 나에게 선명하게 들려왔다. 당시의 나는 어쩌면 ‘생존’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하며, 또한 자연계의 모든 생물이 보여주는 속성이라고 보던 진화론자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의 영향으로 이러한 말이 익숙하게 들렸을 것이라고 예단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는 이제 나 자신의 만성적인 우울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이해하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5.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다. 남은 것은 이제 니체의 〈자기초극〉을 이용해 진실을 가로막던 그 거대한 장애물을 터뜨리는 일뿐이다. 그 장애물 뒤에 무엇이 어렴풋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가로막던 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함에 따라 그것의 추악한 형태가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그동안 니체의 철학을 그것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으로 쓰려고 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폭약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폭약을 만들 때 사용할 화약을 만들어야 한다. 화약은 흔히 질산 칼륨과 황 그리고 숯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자, 여기에 재료가 있다. 나에게 숯은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대면하게 한 바로 그것 ― 내 만성적인 우울증이다. 황은 특유의 향취와 샛노란 색 때문에 먼저 드는 것이란 거부감이나 없어서는 안되는 바로 그것 ― 마르크스의 〈소외〉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릴 산소를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질산 칼륨이란 나의 정신에서 무엇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는지에 집중하게 한 그것 ― 프로이트의 〈초자아〉다. 이것들을 섞으면 폭약이 완성된다. 이것은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에 의해 모든 것 ― 진실을 가리는 모든 것을 니체 철학에 대한 나의 환상과 함께 날려버릴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며, 운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실제로 폭발한 것들이기도 했다.
#6.
불꽃은 ‘질산 칼륨’이 공급하는 산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묻는다. “무엇이 너를 억누르고 있는가?” ‘숯’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사실 그 자신, 즉 ‘내 만성적인 우울증’이 사실은 이 질문이 던져질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황’이다. “체제가 너를 억누르고 있다.” 나는 이제 묻는다. “무엇이 체제란 말인가?” 이제 ‘황’은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둘러싼 체제 ― 즉 자본주의 시스템이 너를 억누르고 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자본주의 시스템’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대학의 땅에서 스스로가 던지는 것은 질문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하려고 유단히 애를 써 왔다. 즉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시스템이란 ‘대학’이란 말이다. ‘대학’이 그것인가? 즉, ‘대학’이 나를 억압하는 것 ― 바로 ‘자본주의 체제’란 말인가? 대학은 물론 자본주의적이다. 등록금을 받고, 그 등록금을 모아 시설을 관리하고 교직원에게 임금을 지급하며 스스로를 확장해나간다. 대학은 하나의 교육을 사업으로 하는 기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과연 ‘자본주의 체제’라고 단언할 만한 것이었는가? 나에게 변화를 제공해주는 장소가 바로 이곳 아닌가?
#7.
기폭제 ― 〈생존의지〉는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 배우고 있는 경제학의 그 유명한 구절도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할 폭발을 돕는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는 자원을 얻기 위하여, 즉 생존하기 위하여 경쟁한다.
생존. 그러하다 ― 그 놈의 생존!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에 그렇게 반대하였건만 생존의지의 생명은 그리도 질긴 것이다. 애초에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 자신의 ‘살아있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反)으로서의 정의되는 ‘죽음’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으므로 살아있는 모든 개인은 당연히 〈생존의지〉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반론이 물론 가능하지만, 니체는 생존의지를 넘어선 것, 극복으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말하지 않았던가.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고양시켜주는 의지’로서 정의되는 이것에 나는 그렇게 집착해왔다. 너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속삭여오는 듯한 ‘죽음에 대한 것’이라고 이제껏 착각해왔던 바로 그 공포 때문에. 그 공포가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오인한 ‘염세주의’ 때문에. 무엇을 해도 의미없을 것 같은 나 자신의 ‘살아있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 즉 〈의미〉를 찾기 위해.
그러나 내가 대답을 찾고자 했던 질문은 이것이 아니었다. 올바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비틀거림이란 무엇에 의한 것인가? 내가 이렇게 악착같이 사는 것에 대한 설명을 나는 왜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나가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설명이란 애초에 무엇이란 말인가?
#8.
이제 폭발이 일어난다. 한바탕 거대하고도 시끄러운 ― 그리하여 나의 모든 귀를 먹먹하게 할 바로 그 위대한 화학 반응이. 폭발 뒤에서 누군가가 말한다. 귀는 아직 아프지만 이보다 더 날카로울 수 없을 목소리는 너무나 명료하게 들린다. 누가 말하는지 이보다 더 명쾌할 수 없다 ― 말하고 있는 것은 쇼펜하우어와 경제학이다. 다음과 같이 그들은 소리지르고 있다. “실체는 한정되어 있는 자원 속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체는 한정되어 있는 자원 속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것 ― 그 놈의 〈생존의지〉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이제서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기폭제 그 자신이 다름아닌 그 자신이 일으킨 거대한 폭발의 뒤에 있던 불변의 배후였음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나 자신을 억압하던 그것은 한정된 자원 속에서 내 것을 확보하고자 하던 〈생존의지〉 바로 그것이었음을. 대학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가 더 성실하고 근면해져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그 소리의 뒷면에는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던 등록금과 장학금, 그리고 병역과 기숙사라는 골치 아픈 족쇄들이 있었음을.
#9.
“나는…….”
집안 형편은 좋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했다. 경제적으로 일찍. 정신적으로도 빨리. 손을 빌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서 언론에서 매번 보도되는 각종 구설수에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문제 없이〉 살고 싶었다. 수많은 문제들과 열등감에 시달렸던 그 지난 시간들과는 다르게. 나는 반대로서의 원만한 삶을 그렇게 열렬히 원했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모든 것을 그래서 나는 모두 거부했다. ‘자유’에 반하는 모든 것을 나는 경멸했다. ‘군대’는 ‘자유’ ― 스스로를 옭아매는 그것들의 대표적인 예시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경멸했다. 시간이 흘러 스물이 되고 나에게 병역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도 나는 그것을 경멸했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다. 현대사의 각종 증거들 ― 군대가 앗아간 민주주의, 군대가 일으킨 수많은 살육과 약탈, 그것들을 모두 증언하고 있는 사진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눈동자 ― 그것 모두를 증거로 덧붙이면서.
열등감에 시달렸던 시간들 때문에 더는 그것에 구속되고 싶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 내가 유일하게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비교 우위를 가졌던 것이란 학업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유일한 나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다듬는 것에 시간을 점차 더 많이 투자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업을 계속함에 따라 나는 나 자신의 지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 내 지성의 한계에 대한 시험에 도달해보게 되면서 스스로가 가진 무기는 사실 ‘학업’이 아니라 이것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실 유일한 무기임까지 ― 알게 되었다.
#10.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등록금을 내 스스로가 장학금을 통해 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타인에 비해 열등하다는 감각 바로 그것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학업’에 투자하는 ‘시간’이었다는 점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 학교와 절대적인 거리가 가까운 ‘기숙사’는 더욱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모든 것을 혐오했기 때문에 나는 ‘병역’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서 ‘전문연구요원’을 갈망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제한되어 있는 자원을 분배하는 빌어먹을 시스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시스템에서 승리자를 판별하는 기준이란 다름 아닌 역시 빌어먹을 GPA (평점) 이 가장 핵심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토록 스스로를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부과하는 무게와 극단적인 의무감 때문에 나는 항상적인 우울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이라 불리는 〈니체 철학〉에 그렇게 천착한 것이었다.
#11.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뒤에는 항상 잔해가 남는 법이다. 구덩이가 남았고 그곳에는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니체 철학은 나에게 폭발을 일으켰다 ― 거대하여 되돌릴 수 없을 그러한 폭발을. 나는 니체를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초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켰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얻은 모든 것은 여기에 남아 있다.
이제 나는 남아 있는 것들을 수습해야 한다. 무시하는 것도 좋겠으나 잔해가 너무 많아서 눈을 돌리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다. 하나씩 치워나가야 한다. 어쩌면 ― 이 거대한 폭발의 출발점이 되었던 나의 우울에게 니체 철학은 다시 한 번 다른 방식으로의 폭발을 제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나는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말할 것이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여기에 있다고. 그들이 폭발로서 보여준 것은 너무나 끔찍하게 생긴 자화상이자 생존의지의 집약체였으나, 이제 그것에는 그들이 있다고.
나는 니체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니체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오고 있다. 니체로, 그리고 그의 〈운명애〉로. 나의 〈초인〉을 향한 여정은 이제서야 제대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