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함영 #0. 시작하며: 지각되는 것에서 지각되지 않는 것 알아차리기
우유함영(優遊涵泳)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예술과 감성을 언어와 이성으로, 예술을 철학적으로 음미하려는 시도들을 모은 공간입니다.
우유함영(優遊涵泳):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Note.
우유함영(優遊涵泳)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예술〉과 관련된 모든 기술들을 모으기 위해 새롭게 마련한 시리즈입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기존 시리즈에 해당하는 음악이 흐르는 시간 시리즈와 Jazz Up The Place 시리즈는 이 시리즈가 새롭게 연재됨에 따라, 연재가 중단됨을 알립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는 것에서 들리지 않는 것을,
지각되는 것에서 지각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기
보이는 것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도 부족하다. 나의 오감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언어로 풀어 내리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분명히 지각되는 것이더라도 그 속에는 마치 여러 겹의 면사포로 덮여 있어 한 번의 응시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지각되지 않는 것’들이 숨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또한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온 나에게 방학 동안 참으로 곤혹스러운 대상이 하나 떠올랐다. 새로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일상 속에서 여러 번 접했지만 별 다른 생각 없이, 학기 중의 바쁜 일상에 치인 나머지 별로 신경을 집중하여 지각하지 못한 대상이었다. 〈그림〉과 〈음악〉. 방학 동안 나에게 허락된 약간의 기만적인 여유와 여름의 나른함이 그동안 이들 위에 덮여져 있던 마음의 면사포들을 한 장씩 불어 벗겨냄에 따라, 나는 비로소 이들을 지금까지 내가 믿어왔던 신념 ― 모든 것을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는 그 굳은 신념에 대한 반대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방학 동안에 깨닫게 된 문제는 이것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것은 나의 부족한 〈상상력〉이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픈 상상력이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하나의 감각을 즉시 비슷한 형태 또는 부류의 ‘기억된 감각’을 종합하여 나 자신 앞으로 생생하게 가져다오는 능력, 바로 그러한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최근에 발자크의 〈나귀 가죽〉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전까지 읽어온 소설들과는 다르게,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감각적인 설명들을 읽고도 나 자신이 소설의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귀 가죽〉의 서문에 발자크가 써둔 이야기를 조금 빌려서 말하자면, 나는 “자기 안에 집중 거울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상상을 통해 온 우주를 그 거울에 비출 수 있”1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 《나귀 가죽 (La Peau de chagrin)》, 이철의 역, 문학동네, 2009. p.15.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시인’ 혹은 ‘문학적’이라 불릴 만한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기술하기 위해 넣은 것이었지만, 결국 ‘시인’이든 ‘과학자’든 이들 모두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언어로 기술하려는 이들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과학하는 사람’을 간절히 원하는 나로서는 나의 끔찍한 〈상상력〉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을 기술하는 것들을 다른 감각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는 곧장 두 가지 대책을 세웠는데, 첫째는 이번 2023학년도 2학기에 교양 수업으로 〈철학으로 예술 보기〉 강의를 듣는 것이었고, 둘째는 바로 이 시리즈 ― 우유함영(優遊涵泳) 시리즈를 통해, ‘가장 감각적인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각종 음악 · 미술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으로는 종합 예술로 인정하는 게임에 이르기까지2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합 예술로 인정하는 게임’이라는 표현 전체이다. 나는 게임이라고 해서 모두를 〈예술〉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예술〉이라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과분한 〈도박장〉 혹은 〈상술〉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인간 감성 · 감정’의 산물들을 낱낱이 다른 감각으로, 나의 언어로 기술하는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2023학년도 2학기의 개강일인 오늘, 서울대학교 〈철학으로 예술 보기〉 강좌를 진행하는 미학과 윤주한 교수님은 “철학은 감성적 영역도 합리적 ·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인데 반해, 예술은 통상적으로 인간 감정의 산물로서 비이성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술을 분석적 ·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난해해보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직접 부딪혀보고 시도해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을 바로 이 난해한 〈예술〉에 대한 이해와 설명으로 뛰어든다. 모든 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따라서 가능한 끝까지, 비록 그 믿음이 종국에는 틀린 것으로 판정될지라도 여정은 이어져야만 하니까.
주석 및 참고문헌
- 1오노레 드 발자크 (Honore de Balzac), 《나귀 가죽 (La Peau de chagrin)》, 이철의 역, 문학동네, 2009. p.15.
- 2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합 예술로 인정하는 게임’이라는 표현 전체이다. 나는 게임이라고 해서 모두를 〈예술〉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예술〉이라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과분한 〈도박장〉 혹은 〈상술〉들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