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3.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모든 것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영원회귀와 운명애 속의 초인은 가능한가?”, 다시, 조금 더 예전의 언어로, “희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가능한가?”, 다시, 밀란 쿤데라의 언어로, “키치 없이 인간은 살 수 있는가?”
커피사유, 〈사유 #52. 키치와 인간〉. 2024. 10. 10.
지금으로부터 약 2주 전, 나는 밀란 쿤데라의 〈키치 Kitsch〉와 관련하여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바가 있다. 단순히 문장만 놓고 볼 때 단지 그저 심오하고 철학적인 물음으로 보이는 위 질문은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중요하고 깊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 물음이 대학 2년차에 프리드리히 니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 자신의 철학적 탐구가 일종의 중간 기착역에 도달한 결과로 탄생했기 때문일 것이며, 쿤데라의 사상이 그 동안 나 자신이 거쳐온 질 들뢰즈 · 알베르 카뮈 · 다자이 오사무 등에서부터 기원하는 여러 해석과 사상과 기묘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라는 이유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나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질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가지는 진정한 함의를 보이기 위해서, 나는 쿤데라의 〈키치〉를 기점으로 하여 스스로가 어떤 생각들을 가졌는지 분명하게 밝혀둘 필요가 있다.
9월 독서 모임 도서로서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을 우연히 접한 이후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 정신분석학적 탐구의 여정이 쿤데라의 문제 의식과 기묘하게 연결된다는 점을 뚜렷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특히 쿤데라가 말하는 두 가지 주요한 주제 즉 〈키치〉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정체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니체 철학 전반과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문학 작품들이 쿤데라의 문장들과 결합해 기묘한 군체(Cluster)들을 형성하는 광경을 목도했으며, 그 사이에서 긴장감 넘치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사유들을 이어나갔다. 바로 이 점이 여전히 내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세 번째 논문에 대한 탐서일지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쿤데라에 대한 나의 기록들을 공개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쿤데라가 말하는 〈키치〉를 이해할 때에는 아주 사려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소설가 심산이 〈현대 소설의 음울한 농담〉이라는 글에서 분명히 주지하고 있듯, 키치를 “세간에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싸구려 예술(품)’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얄팍한 이해”이다. 심 씨는 “키치란 복잡하고 비우호적인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대신 단순하고 우호적인 거짓을 믿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나는 그의 문장을 조금 더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확장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이 문장만을 놓고 본다고 했을 때 우리는 키치를 〈사상〉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개념과 동일시한 나머지, ‘실질적인 감동이 아닌 관념적인 감동에 호소하는 것’이라던가, ‘특정 사상에 감동받아야 한다는 의무감’ 등으로 호도해버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상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키치란 도식이며, 또한 왜곡이다. 다시, 키치란 쿤데라가 말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노출된 인간이 자살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버팀목이다. 쿤데라가 조명하고 있는 〈키치〉의 여러 모습들로부터,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부터 시작되어 니체가 계승하고 실존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이 되풀이하고 발전시켜온 인간의 모습, 유약한 인간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키치〉라는 대서사를 읽어낼 수 있다. 쿤데라의 시각이 어떻게 하여 철학사의 한 흐름과 이어질 수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의 결과물을 내가 아래에 보이는 것은, 내가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키치〉의 문을 열고 나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기”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테레자의 꿈은 키치의 진정한 기능을 고발한다.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는 병풍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416.
I. 총평
‘우연의 새들이 모여듬’은 여기에도 존재한다. 수많은 우연들이 겹칠 때 느끼게 되는 일종의 계시가 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은 뒤에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까지 둘은 정확히 같은 질문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쿤데라가 〈키치〉와 함께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인간이 생성/소멸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를 논하고 있다. 그가 공산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5월의 행진 속 사람들의 모습으로부터 역겨움을 느낀 등장인물을 제시할 때 그는 니체와 정확히 같은 문제 의식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II. 논의하고 싶은 / 인상 깊었던 책 속 문장들과 그 이유
II.1. 첫 번째 문장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61.
-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짊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애초에 인간에게 운명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의지(Willing)과는 무관히 일어나는 사건들 앞에서 체념하거나 혹은 그 사건들의 영향력을 넘어서서 욕구를 관철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운명을 논한다. 수많은 과거의 어려움을 통과한 자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그의 지난 시간들을 긍정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운명을 말한다. 그러므로 운명이란 개인이 바라는 바와 무관히 일어나는, 경우에 따라서는 잔인하기도 하고 따라서 아름답기도 한 세상의 다만사, 그리고 그것을 그가 지각하는 방식을 말하는 용어이다. 운명이 개인이 의도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세상과 그가 마주한다는 의미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 그런데 왜 운명과의 대면(Confrontation)이 아니라 짊어짐이 되는가? 짊어진다는 것은 어떤 무게, 즉 무거움을 견딘다는 의미가 된다. 운명, 즉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우연의 연속에 우리는 왜 무게를 두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관계가 구축되었던 배경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토마시가 테레자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는 적어도 5개 이상의 우연이 있었고, 또한 테레자가 토마시를 보고서 그 마을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낸 것에는 책과 종소리와 6이라는 숫자들의 우연한 겹침이 있었다. 질문은 이제 다음과 같다. 이러한 우연들에 우리는 무게를 부여해야 하는가?
- 상기의 질문에서 우리는 우연들에 무게를 부여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인식을 전환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가 담긴 표현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정한 것 없이 흔들리는 삶 속에서, 우연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의지(Depend)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연을 가볍게 볼 것이냐, 무겁게 볼 것이냐 하는 질문이 남는데, 이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우리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셈이다.
-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니체를 상기하고자 한다. 《도덕의 계보》의 세 번째 논문에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명했다. 세계는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헛된 피안을 상정하고, 그 피안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무거움을 짊어진 죄인 혹은 더없이 흥미롭고 숭고한 인간으로서,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동물과 구분될 수 있는 심오하고 가장 깊은 (그리고 사악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
- 따라서 밀란 쿤데라가 가벼움과 무거움을 물을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인지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 즉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물음이라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파악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겠지만, 이 물음은 결국 전자의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II.2. 두 번째 문장
“꿈은 상상하는 것, 없는 것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욕구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103.
- 앞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논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간이 세계 속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운명’, 즉 알베르 카뮈 식으로 표현하자면 〈부조리〉라고 할 수 있을 바로 그것에 대해 어떤 질을 부여하는지였다. 니체는 적어도 말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벼움이 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한 초인은 분명히 ‘유희하는 인간’, 즉 아이의 단계에 이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생성 / 변화하는 세계에서 의지할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에게는 일종의 〈창조의 욕구〉, 즉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떠오르는 바로 그 욕망이 있다는 점을 니체는 놓치지 않은 것이다.
- 그런데 인생에 의미란 없으며 의지할 나무 한 그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여전히 기댈 곳을 욕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무언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을, 그가 자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구명줄을 하나 바라게 된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혹은 음울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가지는 방어 기작 중 하나로 우리는 ‘꿈’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크게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고 할 것이고 좁게는 피로한 일상의 세계와는 다른, 여러 심상들이 변이되고 내면의 욕구들이 계시하는 암시들이 가득찬 세계 속에서 ‘꿈을 꾼다’고 할 것인 그 ‘꿈’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사실 ‘꿈꾼다’ 혹은 ‘꿈을 꾼다’는 표현은 반사실(Contra-factus)이 그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지 않던가? 어떤 성취를 이루는 꿈을 꾼다는 것은 현재는 그렇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는 사실 위에서만 성립할 것이고,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찰나의 새벽에 보게 되는 것들은 사실 우리의 내면에서 억압받았던 기억들이, 억압받은 욕구들, 달성하지 못한 것들이 형태를 바꾸어 나타난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 그러므로 꿈이 결과적으로는 없는 것, 사실이 아닌 것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결과물인 이상, 그리고 꿈을 꾸지 않는 인간은 아마도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직감에서 우리는 꿈이란 결국 인간의 가장 내면에 자리잡은 부정과 피안에 대한 욕구에 대한 암시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부정과 피안의 욕구에 대해 긍정의 질을 부여할 것인지, 아니면 부정의 질을 부여할 것인지에 있을 것이다.
II.3. 세 번째 문장
“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399.
- 쿤데라는 6장에서 스탈린 아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쟁 포로로 잡힌 이후 변소를 치우지 않은 것에서 다른 영국군 포로들과 갈등을 겪다가 사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키치〉와 관련된 형이상학적 문제라는 점이다.
- 스탈린의 아들은 그가 그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축복받은 존재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였다. 쿤데라가 지적하듯 그는 같은 기원을 가지지만 서로 반대되는 질의 두 특성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첫째는 그가 가진 권력(신격화, 우상화된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가 가진 위험(스탈린이 그의 아들을 은근히 탄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서 스탈린의 아들에게 부여된 것은 특권인 동시에 저주다. 그는 ‘신’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의 반대’이기도 하다.
- 스탈린이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가 마침내 소련 인민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되었다고 발언하면서 보인 차가움과는 별개로, 스탈린의 아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의 아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로 가장 높은 존재였던 그가 가장 더럽고 추한 것, 즉 포로수용소의 변소에 담긴 똥을 둘러싸고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모순으로 나타났지만, 사실 이 표면적 대립은 조금 더 심층적으로 들어갔을 때는 보다 형이상학적이며 동시에 가장 삶에서 치명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 2장의 제목 〈육체와 영혼〉이 그 문제가 된다. 미적으로 보았을 때 통상적으로 우리는 늙고 병들게 되는 육체, 변해서 사라져버릴 육체는 덧없는 것이며 추한 것으로 여겨왔던 반면 그와의 반대 개념으로써 추한 육체 안에도 들어있는 일종의 미 혹은 영원, 영혼은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해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사실 개인을 어떻게 볼 것이냐하는 물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물음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 니체가 지적했듯 우리는 육체는 주로 우리가 처한 세계, 즉 우리가 인지하고 활동하는 세계, 똥과 성관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받아들였으며, 영혼이란 신의 세계,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기 전의 세계,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생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도 추방된 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는 문제는 결국 미적 구분의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도덕적 구분의 문제이기도 하며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 니체의 《도덕의 계보》), 삶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므로 변소와 관련된 자신의 수모를 둘러싸고 철조망에 부딪혀 죽은 스탈린의 아들의 죽음은 형이상학적인 죽음이다. 실로 자신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에게 부여된 운명에 따라 그가 선택한 죽음인 것이다. 반면 영토를 더 넓히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서 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은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그들의 죽음은 삶에 대한 문제가 아닌 단순한 이데올로기,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하지만 현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사실은 도피할 뿐인 답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III. 질문과 답변
III.1. 가벼움과 무거움이란?
- 가벼움과 무거움은 의무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고 마음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인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혹은 가치 평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 두 표현이 가지는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보이기 위하여 우리는 ‘무거움’과 유사한 단어들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지함’, ‘엄숙함’, ‘죽음’, ‘운명’, … 이런 단어들은 무거움이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우리의 일상에 나타난다. 그런데 전자의 두 단어는 주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에서 주로 사용된다. 망자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례식’이나 ‘추모식’, 스스로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고민할 때 그에게 나타나는 표정, 그리고 세계에 대한 참된 본성을 알아내기 위하여, 즉 ‘진리’를 확인하기 위하여 모인 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묘한 분위기. 후자의 두 단어들이 방금 열거된 사례들과 긴밀히 연관된 것은 분명히 우연은 아니며, 오히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는 끝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운명’이란 모든 인간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무거움과 결부된 사건들과 표현들이 모두 현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담론과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과 관계된다는 사실, 인간의 욕구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거움, 인간이 스스로를 짊어지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 무엇을? 운명을, 죽음을, 그러나 가장 본질적으로는 무의미를.
- 의미가 없음, 니체의 〈영원회귀〉가 지시하는 그 덧없음은 치명적으로 가볍다. 인간은 무의미를 견딜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기댈 나무를, 기댈 수 있는 벽을 요구한다. 비록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더라도.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주장은 여기서 설득력을 얻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가 그 부속 질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구분하는 문제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보다 정확히는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인지할 것인지의 물음임을 확인할 수 있다.
- 그렇다면 ‘가벼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 가득차 있음을, 따라서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오로지 홀로 설 줄 알아야 함을 아는 자의 인식 방법이다. 하지만 가벼움과 무거움의 의미가 드러남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질문이 자연히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가볍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바로 그 질문이다. 니체를 완전히 이해하는데 있어 마지막 방해가 되는 바로 그 질문, 니체는 과연 이 장벽을 돌파했는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바로 그 질문이 바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III.2. 필연이란?
- 이상에서 논의한 가벼움과 무거움의 구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구분에 대한 문제가 전적으로 인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대립과 정확히 같은 대립이지만 단지 단어만이 다른 대립이란 우연 대 필연이라는 대립임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 우연이 변화하는 세계, 육체로 대표되어왔으며 늙거나 새로이 되기에 확실한 것 하나 없으며 추한 세계에 대한 표현, 혹은 세계가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게 되는 공포나 고통과 같은 일체의 부정적인 감정이 결부된 표현이라고 한다면 필연은 그와 반대되는 항상성, 일정성, 절대성을 요구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연과 필연의 문제란 인간이 의지를 의지하는 것(Willing to depend on something)으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 Es muss sein 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행위를 결심한 이후에 그것을 정당화할 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행위에 원인 짓기를 행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원인이 내면 깊이 숨겨져 있어서, 이를테면 토마시의 경우처럼 명료하게 언어화할 수 없는 때도 있다. 그러나 Es muss sein 이라고 말할 때 그 뒤에는 믿음이 항상 숨어있게 되며, 그 믿음은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관계된다. 그리고 바로 이 욕망이 다시 한 번 우연과 필연의 문제로 환원된다는 점, 즉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일정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문제로 환원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Es muss sein 은 하나의 암시이며 가장 중요한 물음을 향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 1장에서 Es muss sein 은 토마시가 소련의 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라로 돌아가고자 할 때, 테레사 때문에 돌아가고자 했을 때, 그가 어찌 할 수 없는 이끌림과 관능 때문에 돌아가고자 했을 때 그것에 대한 암시로 쓰였다. 2장에서는 Es muss sein 이란 테레사가 왜 그렇게 행위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개연성, 육체와 영혼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으므로 암시가 아닌 표면이다. 그러나 둘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정당화와 인식에 대한 담론이다. 바로 그 점에서 1장과 2장의 곳곳에서 니체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