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사상과 나의 연상

2024-10-23 0 By 커피사유

서두에…

금일 저녁에 들었던 〈동양철학의 이해〉 강좌에서 마침내 나의 관심 대상이었던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을 살펴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나의 철학적 여정에서 살펴본 질문들 혹은 도중에 마주한 사상 · 경험 일체와 연관되는 글귀들을 발견했다.

중간고사 기간인지라 기억이 휘발될 가능성이 높은지라, 서둘러 내가 그 글귀들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는지를 아래와 같이 대략적으로 기술해두기로 한다.


#1.

유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노자》 제36장.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1994. p. 245에서 재인용.

얼마 전 적어두었던 다음의 구문을 떠올렸다:

그렇다. 신화다. 그대로 향유하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다양한 이 혼돈, 그 혼돈 속에서 인간이 질서를 찾는 것은 일종의 본능일 수밖에 없었다. 생존하기 위한 지능의 필수 조건이란 반복을 지각하는 능력, 즉 규칙성을 찾는 능력이었고 수천년의 역사 동안 인류는 그 본능에 철저히 충실했다. 그러나 규칙 속에서도 혼돈이 탄생하는 것을 역사 속의 수많은 이들은 목격해왔다. 영원불멸하리라고 믿었던 이집트 제국이 무너지고, 중국 주나라가 무너진 춘추 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제후들이 전쟁을 벌였으며, 이는 계속 반복되어서 결국 몇 천년 뒤 유럽에 평화가 달성되었다고 믿었던 네빌 체임벌린에게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안겨주는 일까지 이어졌다. 질서를 갈망한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 자신의 변화무쌍한 성질을 보여줌에 따라 인간은 좌절했고 다시 한 번 질서를 갈망했다. 그렇다. 질서는 신화였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신화, 인간 지성의 본질이자 가장 내가 사랑하는 그것.

커피사유, 〈혼돈과 질서〉

#2.

사람이 태어날 때 유약하나 죽어지면 뻣뻣하게 굳어진다.
초목이 생겨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나 죽어지면 말라서 뻣뻣해진다.
그래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의 부류이며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부류인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군대가 강해지면 파멸이 오고 나무가 강해지면 부러진다.
굳고 강한 것이 하급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상급이다.

《노자》 제76장.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1994. p. 246에서 재인용.

밀란 쿤데라의 【키치 Kitsch】 그리고 심산 소설가가 쓴 〈현대 소설의 음울한 농담〉에 등장하는 다음의 글을 떠올렸다:

쿤데라의 주제를 논하면서 키취를 빼놓을 수는 없다. 만약 키취라는 단어에게 인격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어의가 그토록 풍부해지고 깊어진 데 대하여 쿤데라에게 감사를 표명해야 마땅할 것이다.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다양한 형태의 키취들에 대한 형상적 임상 보고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키취란 무엇인가? 그것을 세간에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싸구려 예술(품)’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얄팍한 이해이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자신의 독자들을 위하여 집필한 개인 어휘 사전에서 쿤데라는 “키취적 인간의 키취에 대한 필요”라는 것을 “거짓으로 예쁘게 보여 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그를 통해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정하고자 하는 필요”라고 정의했다. 키취는 복잡하고 비우호적인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대신 단순하고 우호적인 거짓을 믿고 싶어한다. 연애의 키취는 현재의 사랑이 필연적이고 유일하며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키취는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함으로써 많이 행복해지리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프란츠의 키취는 자신이 이 대장정에 참여함으로써 세계 역사가 보다 더 진보하리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고, 나의 키취는 내가 이 글을 발표함으로써 쿤데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널리 통용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키취들에는 근거가 없다. 어쩌면 실체조차도 없이 단순히 상징이나 이미지로서만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거도 실체도 없는 이 키취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 (후략)

심산, 〈현대 소설의 음울한 농담〉 中

그런 뒤에 내가 얼마 전에 썼던 글의 두 대목을 떠올렸다.

인간은 〈믿음〉을 가지는가?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계와 달리 정보를 확인하고 처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기 때문에,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량에는 한계가 있고, 심지어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이에 저항하는 흐름이 생기거나, 귀찮음 때문에 스스로를 수정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를 주된 관찰 대상으로 삼아가면서 지난 수년 동안 심리학과 철학을 맛보면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나 자신의 (그리고 아마도 인간 전체의) 속성 중 하나란 〈고집〉 즉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한 거부, 그리고 확증 편향과 같은 ‘오류’에 관한 속성들이었다. 이러한 거부는 왜 일어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왜 인간의 지성은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는가?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친숙한 정보는 손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친숙하지 않은 정보들에 대해서는 쉽게 속단하고 잘못 판단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가능한 대답 중 하나는 인간은 제한된 정보와 시간 속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고, 또한 자기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그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나는 여기서 밀란 쿤데라의 《키치》 그리고 니체가 비판한 《피안》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이 맥락에서 전혀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강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유약하며, 《키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강점이란 그에게는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키치》를 조망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 (중략) …

진정으로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란 카뮈가 지적했듯, 〈자살〉이다. 이는 여러 부수 질문들로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자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서부터 “왜 〈자살〉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아가서는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현재 나의 대답은 인간은 오류를 저지르면서까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지더라도, 새로운 기둥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기둥이 옳든지 틀렸든지와 무관히 가져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세상을 오직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의내리고 해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는 이러한 오류를 저지르기라는 능력이 나에게는 지금으로서는 가장 흥미로운 탐구와 사유의 주제가 되었다. … (후략)

커피사유, 〈기계와 인간, 〈호모 데우스〉의 오만함〉

#3.

온 세상 모두 (자기들이) ‘아름답다’고 보는 것만 미(美)로 알기에, (그와 맞지 않는 것은) 그래서 밉게 되는 것이다.
모두 (자기들이) ‘좋다’고 보는 것만 선(善)하다고 알기에 (그와 맞지 않는 것은) 그래서 좋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존재 원인이 되는 것이요,
쉽고 어려움도 상대적으로 생성되는 것이요,
길고 짧음도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높고 낮음도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요,
소리(音)과 노래(聲)는 서로가 화합하는 것이요,
앞과 뒤도 서로가 서로를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無爲, 억지로 함이 없음)의 일을 하고, 말(言)에 매이지 않는 가르침을 한다.

《노자》 제2장.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1994. p. 255에서 재인용.

여기서 나는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8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은 뒤 남긴 세 번째 독서 노트의 다음의 대목을 생각했다:

니체의 ‘선’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이 옳고 그르냐라는 질문과 별개로 가장 격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선’과 ‘양심의 가책’의 상대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국제 정치 (대표적으로 전쟁; 서로가 ‘선’이라 주장하고 반대가 ‘악’이라고 주장하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는 물론이거니와 국내 정치 (대표적으로 서로가 ‘선’이라고 주장하고 반대가 ‘악’이라고 주장하는 양당) 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선’과 ‘악’이라는 점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양태를 본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어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존재한다기보다는 그저 병존하며 경쟁할 뿐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간통죄의 폐지, 동성애에 대한 인정 등과 같이 시대에 따라서 하나의 가치가 폐기되고 다른 하나의 가치가 득세하는 역사가 목격된다는 점은 니체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 생성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커피사유, 〈2024. 경남과고 36기 독서 모임 ‘날적이’ 독서 노트: 니체, “도덕의 계보” 제3차 독서 모임: 죄 그리고 양심의 가책〉 中

#4.

재앙은 복이 의지하는 곳이며 복은 재앙이 의지하는 곳이다.
그 끝이 어찌될지를 누가 알리요?

아마 (세상에 절대적인) ‘정상’이란 없지나 않을까?
정상이 다시 비정상으로 되고, 좋은 것이 다시 나쁜 것으로 된다.

사람들이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세월이 진실로 아득히 먼 옛날부터이로다!

《노자》 제58장.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1994. p. 259에서 재인용.

여기서 나는 미셸 푸코를 떠올렸으며, 나아가 지난 여름에 내가 썼던 다음의 대목 또한 다시 한 번 더 떠올렸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확연한 선역과 악역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통상 악에 완전히 잠식된 세계에서 선에 해당하는 주인공이 세계를 구원한다느니 아니면 악의 위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 협력하느니 하는 전형적인 서사로 가득찬 근 · 현대 게임의 세계에서 종종 클리셰를 깨는 게임들이 인디 시장 등을 통해 시장에 진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크게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게임들이 클리셰를 비틀기 위하여 사실은 ‘주인공이 악역이었다’라던가 ‘상대도 좋은 사람이었다’던가와 같은 인물적 설정을 추가로 도입하는데 주목하는데 반하여, 이 게임은 게임의 연출 전체가 선과 악이 혼합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중략) …

그런데 이 게임이 전반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메시지, 즉 ‘극복의 철학’을 전파하고 있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는 마치 주요한 대립이 아닌 것처럼 ‘예’의 과거와 관련하여 간간히 스쳐지나가는 예의 동생 ‘항아(恆)’와 예의 대립이다. 게이머들은 이 대립이 예의 서사에 대한 배경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제시된 단순한 장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대립이야말로 이 게임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아는 작중 생명을 재생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는 고목과 연결되어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며, 천화라는 질병이 유행할 때 치료법을 찾기 위해 행성을 떠나려고 한 예와는 달리 고향에 남는 것을 선택한 인물이기도 하다. 행성의 질서로 자리잡은 도가의 가르침을 따른 항아는 ‘생과 사가 결국 하나이고, 결국 우리는 우리가 별에서 온 것처럼 다시 별로 돌아갈 것’이라며 아예 종족의 보존을 위협하는 질병의 유행 가운데에서도 남는 것을 선택하면서, 도가의 가르침은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고 기술과 과학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예와의 대척점을 구성한다. 항아와 예의 대립은 어떤 측면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도가 사상과 니체 즉 내가 막연히 여겨왔고 또한 너무 자포자기라고 여긴 동양 철학과 지금까지 내가 속해왔던 과학과 서양 철학의 정면 충돌로 보였다.

문제는 과학과 서양 철학의 상징인 예를 옹호하기에는 예의 발자취가 그리 찬동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사태였지만 한 행성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생물적 근본을 조작하고 가축을 사육하듯 손쉽게 죽여가면서 그 몸과 뇌를 에너지원이나 식량으로 사용한다는 발상을 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즉각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항아가 선택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용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독하게도 거부해온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생존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와 (혹은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면) 의지가 죽음이라는 절망을 마주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 (중략) …

다자이 오사무와 불교 그리고 도가 사상 일체를 전적으로 ‘하강은 물론이고 상승 국면에서도 하강을 기도하거나 택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타협과 이해의 여지 없이 거부하려고 했던 나의 고집이 꺾이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다. 지금 나는 도대체 선과 악은 애초에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한 도가 사상과 다자이 오사무가 심취했던 불교, 즉 동양 철학 일체에서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어떻게 규정했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호기심이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선과 악이 구분될 수 없다는 사상이 니체가 주장한 주지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에서부터 ‘놓는다는 것’이 ‘포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고집과 편견의 벽이 무너짐에 따라 밀려들어오는 물음표의 파도 위에서 나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다.

커피사유, 〈Nine Sols · 도가(道家) ·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