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5.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II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민음사에서 출판한 이 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의 맨 뒤쪽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인용되어 있다.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 뭐가 중요하지?”
“사랑.”
“사랑이라고?”
“사랑은 전부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
사비나와의 관계에 끌린 프란츠가 자신의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프란츠의 아내가 담담하게 그를 노려보며 말한 위 대목은 이 책의 주제가 마치 〈투쟁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핵심을 잘못 파악한 결과물인 이와 같은 관점에도 최소한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연장선으로 쿤데라의 문제 의식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책의 주제란 결국 인간의 실존 조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야말로 〈영원회귀로서의 사랑〉 즉 적개심과 전쟁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긍정할 것인지의 가부를 묻는 사랑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묻는 문제이다.
지난 독서 노트에서 나는 “사랑이라는 행위가 선택하는 바는 무거움이 지금까지 고집하고 재단해왔던 존재의 의미가 무너진 세계라 하더라도, 그러한 세계 속의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쿤데라가 말하는 〈사랑〉을 니체의 운명애 사상과 연결지었다. 이제 나는 첫번째 독서 노트를 열면서 인용한 나의 가장 나중된 생각, 즉 “모든 것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긍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마침내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암시했듯 본질적으로 〈사랑〉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무슨 사랑? 내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이성 혹은 동성의 타인을 찾는 바로 그러한 사랑인가? 그것도 한 종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일어나는지의 여부이다. 테레자의 카레닌에 대한 사랑이 어떤 형태였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하기 위해, 책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다음의 대목을 고려해보자.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부인을,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바꾸고 싶어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p. 490-491.
우리는 세 가지 측면에 집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 형태의 〈사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대가성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 둘째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수락하며 그것에 대한 변형의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 셋째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쿤데라가 말하는 〈사랑〉이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와 같은 인식 속에 있음은 명백하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세계의 모든 측면을 긍정하고, 유위(有爲)1여기서 나는 지극히 도가(道家) 사상에서의 용어로서 ‘유위’를 말하고 있다. 없이 세계의 모든 측면이 다시 한 번 나에게 되풀이되어 부조리와 고통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그것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바로 그러한 형태의 〈사랑〉이야말로 니체가 후기 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첫 번째 독서노트에서 제시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질문이다. 문제는 ‘자발성’이다.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남김없이 모든 것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이 니체의 초인적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것인가? 저의(底意)로 품은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그러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여전히 대답을 알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질서와 일정한 것을 추구하는, 즉 〈키치〉와 함께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Questioning Never Stops). 니체로부터 시작한 나의 철학적 여정이 카뮈와 들뢰즈를 거쳐 쿤데라에 이르는 이 모든 서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나는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손가락 끝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다시 한 번 질문한다.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낙원에 대한 향수,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489.
I. 총평
책이 영원회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했으니, 니체의 말년을 떠올려보자. 그의 정신이 최후를 맞이하였던 순간, 니체는 마부의 채찍 밑에서 신음하던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많은 이들은 그의 최후를 광인(狂人)으로의 변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들은 밀란 쿤데라의 해석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라는 그의 해석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첫째로 데카르트를 용서해달라는 것은 그 고집쟁이 회의주의자가 모조리 앗아간 동물의 ‘영혼’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둘째로 그렇게 말을 끌어안고 말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서 용서를 빈다는 것은 인간이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던, 그의 세계 속의 위치에 대한 해석의 절대성의 파괴를 담고 있다. 철학의 오래된 역사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왔다. 언젠가는 죽거나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추하다고 여겨지는 육체 속에서 인간은 영혼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그 영혼은 확장되어 그의 사고 법칙을 지배했다. 인간은 그가 사고하면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때문에 동물과는 다르다고 믿었지만, 근 · 현대에 이른 지난 2천년이 넘는 문명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은 그와 동물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묻고 있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떤 존재인지 여전히 묻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현기증을 느끼고 있으며 낙원을 꿈꾸는데, 그 낙원에서 인간은 동물과 그를 구분해준다고 믿었던 요소를 상실한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항상적이고 영원한 세계에서 인간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를 상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자.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 있나? 인간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II. 질문과 대답들
II.1. 각 등장인물들의 키치는 어떻게 바뀌었으며 누구로 인해 변질되었는가?
본격적으로 각 등장인물의 키치의 변천사를 논하기 전에 나는 다음의 명제를 주장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증명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목격될 수 있는 문장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은 키치 속에 있다.”
그런데 총평에서 언급한 마지막 질문에 의하여 이상의 명제는 즉시 치명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모든 인간이 키치 속에 있다면, 키치 속에서 살지 않는 인간인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 질문이 니체를 읽은 뒤 모든 독자들이 가질 질문임을 안다. 모든 것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다시, ‘영원회귀와 운명애 속의 초인은 가능한가?’
- 토마시의 경우: 그의 키치는 “Es muss sein!”에서 “Es muss sein!”에 대한 거부로 전이된다. 외과 의사일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우연들로부터 필연성, “그래야만 한다”를 찾는다. 즉 그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머리 위로 내려꽃을 수 있을 음표들을 찾는다. 그는 스스로가 의학을 업(業)으로 선택한 것은 내면적 필요성, 그리고 모든 것을 열어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라고 믿었다. 테레자가 그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의 손을 꼭 움켜잡고 잠자리에 든 이래, 그는 운명으로써 그의 공감 능력 때문에 테레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의 처음부터 그의 “Es muss sein!”은 배신될 전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여성 편력, 바람둥이형 호색한이라는 것 때문에 그는 사비나가 지적했듯 처음부터 키치의 반대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동시에 키치 속에 있는 자이기도 하다. 방금의 선언은 전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키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 키치 속에서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키치와 함께 살 뿐이다. 따라서 그의 키치는 그 속도가 느릴 수는 있더라도 변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키치의 추락을 겪었고, 이 추락은 부분적으로는 테레자와의 생활, 부분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상황이라는 우연 속에서 발생했다. 테레자와 마침내 전원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되어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의 추락은 본질적으로 중력과는 반대 방향으로 일어났다. 그의 키치가 감동적인 것이 되면서 그는 가벼워졌다. 그는 인간이기에 키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는 가장 키치에 반대되는 인간이 되었다.
- 테레자의 경우: 그녀의 키치는 어머니의 육체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얼굴 살갗 위로 영혼이 떠오르는 순간이 생기기를 원한 그녀는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토마시를 끌어당기기를 원했다. 그녀에게 있어 토마시와의 만남은 우연이 계기였기는 했지만 저급함, 어머니가 방귀를 뀌거나, 가슴을 드러내거나, 월경을 숨기지 않을 때 그녀가 느꼈던 그 추함에 대한 도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토마시와의 교제에서 그녀는 여전히 육체가 아닌 영혼을 요구하는데, 이것 역시 어머니의 말 그대로 모든 육체는 평등하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토마시의 바람둥이형 호색한이라는 여성 편력은 말 그대로 적어도 성관계만큼은 모든 육체가 평등하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었고, 그래서 테레자는 그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테레자는 자신의 키치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그녀는 키치를 배반한 적이 없다. 영혼이 육체의 심연까지 되돌아가기까지 했지만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기술자가 그녀를 범하려고 시도했던 바로 그 때 말이다) 여전히 카레닌이 죽었을 때 그녀는 죽음 이후에도 카레닌이 살아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유약함(육체의 유약함)으로 그녀는 토마시를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시켰다고 믿었다.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존재였던 토마시를, 가장 영혼과 이상의 세계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전원시의 서사로 추락시켰다고, 육체의 세계,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로 추락시켰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머니의 육체라는 키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더라도 그녀의 키치는 여전히 견고하다.
- 사비나의 경우: 그녀의 키치는 정확히 명시되어 있듯 배신이다. 배신은 연쇄적인 배신으로 이어지지만 A를 배신하고 B를 택한 뒤, B를 배신했다고 해서 A로 돌아가지는 않듯 그녀는 마침내 배신이라는 키치를 배신하고 싶은 욕망, 즉 프란츠에게 매달려서 영원히 함께 지내자고 애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녀는 배신을 하면 할 수록 공허를 향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녀가 공허를 향한다고 해서, 즉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배신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고 해서, 그녀가 안주하지 않고 다만 달리는 운명 속에 처해있는 인간이라고 해서 그녀는 가장 키치로부터 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언제나 배신으로 간주해왔으며, 무거움을 참을 수 없어서 가벼움을 택했고 이에 따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미술 생활과 토마시와의 관계, 그리고 전시회의 경험으로부터 가벼움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키치는 변질되지 않았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키치의 근원, 그러니까 키치가 탄생한 장소였으며 적어도 키치를 배신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키치의 반대는 아니다. 그녀는 가장 많은 감동적인 키치들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 자신이 토마시보다 더 키치의 반대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키치 속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나아가 키치와 함께 사는 것까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II.2.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란 가능한가? 이 질문은 중요한가?
- 여기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이 질문과 같은 질문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부터 묻자. 그것은 정의 혹은 이해의 연속이며, 개개인이 우연을 통해 습득한 자신만의 모티프가 담긴 악보들 사이에 끼워진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의 사전〉들 안에 들어가 있는 문장들이다. 그 문장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타인을 의심하고 또 검토하며 저울질한다. 같은 강바닥 위에서 다른 강물이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은 따라서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그러했듯 자신의 모습에 따라서 대상을 변경하기를 욕망한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데, 첫째는 실제로 그에게 작용하여 유약하게 만든 뒤 대상을 변질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인식을 변경함으로써 대상이 변경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의 방식으로부터 우리는 이해관계란 결국 정의내리고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기원하는 자연한 결과물임을 발견하게 되며,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그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발발한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규칙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는 것, 의미를 찾고 의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인간에게 있어 바로 이러한 욕망이 발현되지 않는 사랑이란 가능한가는 질문은, 따라서 키치가 없는 사랑이란 가능한가? 라는 문장으로 환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런데 키치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키치는 인간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회피하기 위하여 똥을 부정하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존재에 대해 확고부동하게 동의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러한 부정과 동의가 없다는 말은 즉 긍정과 부동의가 일어난다는 말인데, 긍정은 똥 즉 미적으로 추하다고 생각되는 것, 즉 썩거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긍정이고 부동의는 존재, 즉 거기 서 있는 일정한 어떤 것 그리고 영원한 것에 대한 부동의이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란 가능한가는 질문은 키치가 없는 사랑이란 가능한가는 질문을 거쳐 아이의 단계에 이른 니체의 초인, 즉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이란 가능한가? 라는 문장으로도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영원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연 이 책은 정확히 영원회귀와 관련된 질문으로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다.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형적인 시간선이 아닌 폐곡선을 이룬 시간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마저도 긍정하고 희망을 가지는 법도 잊어버리며 카레닌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일까?
- 테레자가 토마시와의 사랑을 카레닌과의 사랑에 대해 비교할 때 그녀가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녀는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 대답이 “예”라고 간주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은 가벼움, 그 중에서도 똥이 아주 가볍게 되는 경우를 견딜 수 없어하는 동물이며 따라서 자신만의 키치를 가지지 않던가. 그렇다. 우리는 알베르 카뮈의 선언, “〈자살〉이야말로 진정으로 흥미로운 철학적 주제”라는 그의 선언이 핵심을 찌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그의 묘비명을, 그의 삶이 요약될 수 있을, 그의 대장정이 요약될 수 있을 문장을 그것이 폭력일 수도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찾는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며 그리하여 니체의 말년과는 다른 말년들을 맞이해왔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아니오” 쪽에 조금 더 기울어 있다.
- 이상의 논의에서 나는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설명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 / 아니오 둘 중 어느 것으로 귀결되든, 우리에게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II.3. 이 책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 키치(Kitsch), 둘, 사랑.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사랑이 더럽다는 표현에서 탄생한 술어인 키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분명 작가의 의도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바 있듯 사랑을 말할 때 작가는 니체의 운명애를 말하고 있고, 무거움을 말할 때 그는 영혼과 이름의 세계, 혹은 도덕과 “Es muss sein!”의 세계를 말하고 있으며, 가벼움을 말할 때 그는 육체와 똥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니체의 문제 의식으로 연결됨을 파악하게 된다.
- 다시, 1차 독서 모임의 총평에서 내가 말했던 바를 상기하자: 쿤데라가 〈키치〉와 함께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인간이 생성/소멸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를 논하고 있다. 그가 공산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5월의 행진 속 사람들의 모습으로부터 역겨움을 느낀 등장인물을 제시할 때, 그는 니체와 정확히 같은 문제 의식 속에서 말하고 있다.
- 그러나 작가는 니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데, 그는 “사랑이란 창조주를 초월한 우리의 자유이며, “es muss sein!”을 넘어선 것이다”는 문장을 선언했으며 뒤이어서 카레닌과 테레자의 관계로부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형태의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선언한 문장에서의 사랑과 7장에서 카레닌을 통해 보여주는 사랑은 아마도 같은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대로 인정하기란 우리의 자유이며, 우리의 도덕, 우리의 준칙, 우리의 운명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인데, 이것이 가능한가는 여전히 우리의 질문이며 상술하였듯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 / 아니오 둘 중 어느 것으로 되든, 우리에게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여기서 나는 지극히 도가(道家) 사상에서의 용어로서 ‘유위’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