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장자의 차이에 대한 의문점

2024-10-30 0 By 커피사유

서두에

익일 중간고사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지만, 오늘 오후에 들은 〈동양철학의 이해〉 강좌에서 도가의 개인 · 심미주의적 사상가인 장자의 사상과 관련된 강의를 듣고 떠오른 몇 가지 의문들과 생각들이 있어, 부득이 휘발되기 이전에 아래와 같이 정리해둔다.

아마도 이 주제를 기말 보고서에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물음

장자와 니체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지각은 모두 “무한한 변화 · 순환”으로 동일하지만, 그러한 세계를 개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행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내린 판단은 정반대인 듯 하다.

니체의 경우는 후기 사상인 〈영원회귀 · 운명애〉 사상이 대표하듯, 끊임없는 혼란 · 경쟁 즉 변화의 상태에서의 고통마저 긍정하는 것에 이른 반면, 장자의 경우는 반대로 인위에서 벗어난 무위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즉 변화의 상태를 인식해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에 이르고 있는 듯 하다.

즉, 니체와 장자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헤라클레이토스와 동일하지만, 그러한 세계에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모순과 충돌에 의한 고통에 대해 부여하는 질이 정반대이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두 사람의 형이상학적 견해는 동일하거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고통에 대한 긍정 / 부정의 질은 반대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해 간단한 대답 중 하나는 장자의 경우는 전국 시대의 사상가로, 당시는 사회가 몹시 혼란하여 잘못 처신하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고통이 만연하였기에 그 ‘고통을 뽑아내야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니체의 경우는 염세주의, 즉 ‘니힐리즘’이 사상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즉 두 사상가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다르다는 것일테다.

그러나 나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이란 두 사람의 시대적 상황에 의한 차이가 아닌, 두 사람이 같은 형이상학적 인지에서 결론에 도달하는 궤적이 어떻게 다른지, 그 궤적이 달라지게 하는데 영향을 준 사상적 · 이론적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지, 두 사람의 인간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이 추가로 어떻게 달랐기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는지이다.


물음에 대한 부언

장자를 비롯한 도가는 혼돈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보았다. 니체도 그러했고, 그래서 그는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적 산물, 절대성이 부여된 피안의 세계를 그렇게나 경계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니체는 그 혼돈의 일부로 보이는 우리 인간이 혼돈 속에서 질서를 추구하면서 자연히 가지게 되는 내적 모순과 부조리1여기서 ‘부조리’는 알베르 카뮈가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로 그 ‘부조리’일 것이다.마저 긍정하기에 이른 반면, 장자 등은 이 혼돈과 합일을 이루어 역으로 혼돈을 제거하고 질서(평온한 마음의 상태, 자유로운 상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어쩌면 니체는 후기 사상을 전개할 때에 이르러, 밀란 쿤데라를 읽고서 내가 느낀 것처럼 〈키치〉,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지 않는 것, 왜곡, 혼돈 속에서 질서 찾기를 인간의 본성이자 실존적 조건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이고, 장자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놓쳤고, 오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도’로 간주하여 여기에 절대성을 부과했기 때문에 ‘도’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결과로서 진인(眞人)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일까?

물론 여기서 나는 니체와 장자를 모두 오독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도대체 후기 사상에서 니체가 왜 ‘고통마저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장자가 도대체 왜 ‘무위로 돌아가서 도와 합일을 이룬 평온한 상태로 고통이 없는 인간’을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철학적 · 논리적 과정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일이다.

읽어야 할 서적, 논문 그리고 살펴봐야 할 사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몇 가지 인용

아래에는 니체나 밀란 쿤데라, 알베르 카뮈 등이 연상된 몇 가지 장자의 구절들을 옮겨두기로 한다. 출처는 송영배 교수의 〈제자백가의 사상〉을 재인용한 서울대학교 유용빈 교수의 〈동양철학의 이해〉 강좌의 ‘장자’ 원전 수업 자료임을 밝힌다.

#1.

실제는 항상 홀연히 흘러가니 일정한 형태가 없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것이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나는 자연과 함께 가는 것인가? 정신은 어디로 움직여 가는 것인가? 그들은 훌훌 어디로 가고, 총총히 어디로 떠나가 버리는가? 모든 존재는 눈앞에 펼쳐 있으되, 돌아갈 곳을 모르는구나!

#2.

‘저것’이 아닌 존재도 없고, ‘이것’이 아닌 존재도 없다. 그러나 자기가 타인에게는 (저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는 자기에게만 (이것)이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저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존재가 생겨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변한다.) 생명은 바야흐로 죽음으로, 죽음은 바야흐로 생명으로 변한다. 가능은 바야흐로 불가능으로, 불가능은 바야흐로 가능으로 변한다. 옳음은 그름에서 말미암고, 그름은 옳음에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인은 옳음이나 그름 하나만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자연에 비추어보면 ‘이것’ 또한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 또한 자기에게 하나의 시비가 있고, ‘이것’ 또한 자기에게 하나의 시비가 있다. 과연 ‘이것’과 ‘저것’의 구별은 있는가?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별은 없는가?

#3.

… (전략) … 어찌 (자네는) 해와 달을 옆에 차고 우주를 팔 옆에 끼고서,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혼돈에 머물면서 종놈을 귀인으로 보지 않는가? 사람들은 분주하지만 성인들은 우둔하여 만년의 도리를 뒤섞어서 혼돈을 이루네. 만사 만물은 모두 다 이러하니 이 (우주적 혼돈으로) 서로 감싸나가는 것이네. 삶을 좋아하는 것이 착각이 아님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제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것임을 내 어찌 알겠는가? 여희는 애 땅 경계지기의 딸이었네. 진나라 (군인들이) 처음 그를 얻었을 때 그녀는 눈물 콧물로 옷깃을 적셨네. 그녀가 임금의 처소에 이르러 임금과 침대를 함께 하며 좋은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자기가 울었던 것을 후회하였네. 죽고 난 사람이 그가 당초에 살기를 바랐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꿈에 술 마신 사람이 낮에는 곡을 하며 우네. 꿈에 곡을 하고 운 사람이 낮에 사냥놀이를 하네. 막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을 꾸고 있는 줄 모르네. 꿈속에서도 또 꿈꾸는가 하고 점쳐 볼 수도 있네. 깨어난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아는 것이네. 또한 크게 깨달은 다음에야 이것이 긴 꿈이었음을 알게 되네.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깨어있다고 생각하여 속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리라!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이들, 어리석은 이들은, ‘나는 고귀한 주인이다! (너는 천한) 양치기다!’하니 정말 딱한 노릇이다!2이 부분에서 부득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츠와 동료 지식인들이 캄보디아로 가서 행진하는 장면, 그 행진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생각, 기자 한 명이 지뢰를 밟고 그의 몸뚱아리가 산산조각나 피와 함께 흩뿌려졌을 때, 그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자신들의 행진이 더욱 성스러워졌다고 생각하는 장면들 일체가. 공자도 자네도 또한 모두 꿈이네. 내가 자네에게 꿈 이야기를 하는 것도 또한 꿈이네. 이런 이야기를 저들 (즉 어리석은 속인)들은 아주 황당하다고 하네. 만 년 뒤에 대성인이 한 번 나타나 이 뜻을 깨닫고는 일상의 도리로 대할 것이네.

… (중략) …

(장오자가) 말하였다.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것으로 보는 것이네. (어느 한 존재의 입장에서 보아) 옳은 것이 과연 옳은 것이라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란 (모두 그 존재의 관점에 매어 있기에, 이들의) 차이점을 (나는) 또한 변별할 수 없는 것이네. (어느 한 존재의 입장에서 보아) 그러한 것이 과연 그러한 것이라면,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란 (모두 그 존재의 관점에 매어 있기에, 이들의) 차이점을 (나는 또한) 변별할 수 없는 것이네. 시비논변들은 서로 대립되지만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으므로) 대립될 수 없는 것이네. 자연의 분수에 따라 화합하여 (자연의 변화에) 그대로 내맡기는 것이네.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나이를 다 하는 것이네. 나이도 잊고 의로도 잊고 무한한 경지에서 노니는 것이네. 그러므로 마음을 무한한 경지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네.”

#4.

‘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귀천이 없다. (개별적)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는 귀하고 남은 천하다. 사회 관습의 관점에서 보면, 귀천은 개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차별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한다면 만물 중에 크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한다면 만물 중에 작지 않은 것이 없다. 천지가 곡식 낱알 만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 터럭의 끝이 언덕이나 산 만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물들의 차이를 상대적으로 본 결과이다. 공능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능이 있음에 따라 존재한다면 모든 존재는 존재(有)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공능이 없음에 따라 없는 것으로 본다면 모든 존재는 비존재(無)가 아닐 수 없다. 동쪽과 서쪽은 서로 반대이지만 서로 상대가 없을 수가 없음을 안다면 기능의 몫은 정해진 것이다. 경향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쪽으로 보아 그렇다고 본다면, 모든 존재는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보아서 그러하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렇지 아니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

… (중략) …

(도의 관점에서) 만물을 똑같이 본다면, 무엇이 짧고 무엇이 긴가? 도에는 처음도 끝도 없다. (개별적) 존재에만 삶과 죽음이 있다. (개별적) 존재는 완성된 하나의 결과에만 머무를 수 없다. 한 번 비웠다가는 다시 차게 되니, 자기 모습을 고정할 수 없다. 세월은 다시 올 수 없고, 시간은 정지할 수 없다. 소멸과 생성, 채움과 비움은 끝나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도의 원칙을 말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의한다. 모든 (개별적) 존재의 삶은 마치 말이 달려가는 것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변화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고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없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이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진실로 스스로 자기의 변화에 맡기어야 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여기서 ‘부조리’는 알베르 카뮈가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로 그 ‘부조리’일 것이다.
  • 2
    이 부분에서 부득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츠와 동료 지식인들이 캄보디아로 가서 행진하는 장면, 그 행진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생각, 기자 한 명이 지뢰를 밟고 그의 몸뚱아리가 산산조각나 피와 함께 흩뿌려졌을 때, 그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자신들의 행진이 더욱 성스러워졌다고 생각하는 장면들 일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