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3. 2025. 2. 4. ~ 2025. 2. 2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갑자기 작년 12월 말에 동생과 함께 보았던 뮤지컬 『웃는 남자』 생각이 났다.
기형적인 뮤지컬 산업 구조 속에서 태어난 그 작품이 그러한 구조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을 빅토르 위고의 문장: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 (The paradise of the rich is made out of the hell of the poor.)”를 주요 메시지로 삼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 했던 그 작품 말이다. 커튼콜까지 끝나고 공연장을 나오면서 나는 동생에게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냐고 물었었다. 동생은 슬쩍 웃으면서 그 자체로 즐겼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철학자는 가장 깊은 층위까지도,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층위까지도 들어가거나 물러나면서 바라보기 때문에 그 층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봐야 허사라는 사실을 수없이 반복된 경험들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과연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저 문장은 그 뮤지컬 안에서만 적용되는 문장일까?1나아가,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7세기 영국 사회에서만 적용되는 문장일까? 나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과거의 과오로부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찰 뿐인 궤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온갖 법 기술들을 동원하여 최대한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이 참혹하여 고개를 돌리면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외롭게 작은 방에서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소식이 신문 한 귀퉁이를 자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한 장면 속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홀로 서기에는 유약한 존재. 그래서 그는 사회를 구성하고 역할을 분담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누가 자신의 취득물을, 자신의 〈노동〉으로 번 대가를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내가 이 대학의 땅 위에서 지금처럼 어느 새벽에 이 글을 휘갈길 수 있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포함한 온갖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기숙사 청소를 도맡으신 직원분들이, 그리고 지금 내가 종이 위로 놀리고 있는 이 펜을 생산하는데 동원된 근로자들(광석을 캔 어느 나라의 이름 모를 노동자부터 실제 이 펜을 조립했을 역시 이름 모를 누군가까지)과 같이 힘은 없지만 그래도 삶을 살아나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이 있을터. 나는 이 희미하지만 논리적 추론을 통해 당연귀결되는 이 짐작을 모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생각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동생을, 나아가 지난 연휴 “더 많은 복지는 오히려 더 많이 일한 이들의 〈정당한〉 몫을 일하지 않는 〈쓸모 없는〉 이들에게 헌납하는 꼴이다.”라고 말씀하신 나의 아버지를 상기할 때마다 다시금 불편해진다. 결국 이러한 현실 앞에서 유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그저 광기 어린 웃음으로, 웃는지 우는 것인지 모를 그 웃음으로 한바탕 애탄하는 것뿐일까?
… 그러나 상술하였듯 철학하는 이는 부조리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기꺼이 그렇게 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2.
독서회에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의 제20장을 마침내 끝내며 한 귀퉁이에 적어두었던 문구.
“인간은 영원히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그를 인간으로 만든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분명 인간 정신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인공지능, 즉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또 하나의 자의식을 가진 주체를 만들어내기를 시도하고 있는 오늘, 그는 자의식이란 자기-무지와 자기-지식 사이의 미묘한 균형, 즉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적절한 층위에서 자신이 가진 시니피앙들로 기술할 수 있되 모두를 기술할 수는 없는 것, 즉 자신이 기술할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하는 어떤 체계임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2… (전략) … 그러나 이 로봇 프로그램이 자신의 과정을 완전히 속속들이 추적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일종의 직관적인 감각은 있다. 이처럼 자기-지식과 자기-무지 사이의 균형으로부터 자유의지라는 느낌이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 이미지에 포함된 어떤 관념들을 전해주려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작가는 그 이미지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다음에는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리저리 실험해보고는 최종적으로 어떤 설명 방법을 정한다. … (후략) …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 2013. p. 986.
나는 이 무지와 지식 사이의 균형을 더욱 확장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그것이 나의 근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즉 호프스태터의 주장에 대한 개인적 동의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오늘날 자신이 마주하는 정신 · 심리적 문제,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사실 〈무지〉 또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결여와 불완전성에 의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이 생각 위에서 연대 그리고 ‘키치와 더불어 살기’라는 나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대귀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2월 17일 다른 독서회의 정기 오프라인 모임이 있어 부산에 하루 일찍 내려와 ‘혼자’ 여행을 하면서 나는 단독여행의 ‘고독’을 곱씹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열차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들에서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유년기의 ‘고독’들을 보았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릴 적 원래 살던 동네를 떠나서 작은 마을 초등학교에 새로 떨어졌던 나는, 일면식이 없던 급우들과 어울려야 했고 따라서 은근히 또래 사이에 끼어들어가지 못했었다. 지금에서는 그 선후 관계가 헷갈리기는 하는데 ― 즉, 그것이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모르겠는데 ― 여튼 나는 그 즈음 학업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스스로가 그 소외로부터 자연히 느끼고 있었던 ‘인정욕’을 채워나갔다.
… ‘인정욕’이라고? 그렇다.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욕구. 오랫동안 의식하지는 못했으나 작금의 나는 스스로의 지난 세월들이 일종의 인정 투쟁과 그 상흔 위에 서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 어쩌면 내가 공부, 즉 학업에 천착하게 된 것은 또래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태를 어른들로부터 받는 인정으로 대리만족하기 위함이었을련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성적에 대한 완벽에 끔찍할 정도로 집착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어른들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기반이 흔들림에 따라 다시 한 번 ‘고독’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위에 있었지 않았을까. 내가 과학의 길로 들어서기로 한 것도 초등학교 3학년 과학 선생님이자 교무부장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대한 만족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학교 학생 회장 선거에 출마했던 내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선전부장이었던 괴벨스의 연설까지 개인적으로 연구해가면서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도, 성적으로는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또래 사이의 추가적인 인정을 원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이런 식으로 보면 나는 평생동안 ‘혼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정한 지반 위에 세워진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이 내가 2월의 독서 모임, 게임 《OMORI》에서 심연을 들여다보는 경험으로 재발견하기 시작한 ‘치명적인 가벼움’일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욕구 이론을 통해 나는 이러한 인정 투쟁이 비단 나 자신만의 서사가 아닐 것이라는 희미한 짐작을 품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욕구 충족을 위해 언제나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린아이는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어머니의 젖가슴을 요구한다. 그러나 언젠가 아이는 젖을 떼야 하고 여기서 그의 좌절이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욕구가 언제나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처음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공통적으로 제안하는 이 최초의 좌절은 인간의 욕망과 충동이 된다. 타인을 애타게 요구하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이상 나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위에 서 있을 것이라는 직감을 믿는다.
그러나 인정 욕망은 유년기의 첫 번째 좌절만 맞닥뜨리지는 않는다. 삶을 살아가며 인간은 녹록치 못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소외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비관하기에, 인간은 저마다 일종의 버팀목을 찾는다. 충족되지 않는, 그러나 동시에 라캉이 지적했듯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인간의 가장 심연에서 근본적인 불완전성으로 자리함에 따라, 사람들은 밀란 쿤데라의 〈키치〉 즉 니체가 말하는 〈우상〉을 발명하고 그 속으로 도피한다. 욕망이 좌절되는 세계, 이 위대한 숙명적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기댈 곳을 찾는 것이다. 좌절 위에 주저앉은 욕망들은 사회에서 제각각의 방식과 키치로써 피어오른다. 누군가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유튜브를 통해서,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욕망의 서사 위 동일한 운명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으로써 영원히 채울 수 없을 그 간극을 채울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신이 스토킹당하고 있다는 피해 망상을 호소하면서 조금 전 내가 찍은 사진을 지울 것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일면식도 없는 행인에게라도 인정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욕망의 대서사시, 이 운명이 인간 자신의 기호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저 영역, 〈무의식〉에 있기 때문에 사회는 이처럼 저마다의 우상으로 가득한 것이다.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저 세계, 저 간극을 어떻게든 봉합하기 위해서. 단절과 고립감의 공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간의 숙명적인 불완전함 ― 즉 키치와 인간, 무의식과 인간이라는 대서사시 ― 위에 서 있는 인간, 채울 수 없는 술잔에 계속해서 술을 붓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 저 시지프스를 볼 때마다 나는 모든 인간이 가지는 이 근원적인 공통점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을 향한 연민(니체가 지적한 기독교적 연민이 아닌, 사랑으로서의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이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나는 지금껏 정치적인 글들에서 우리가 열린 사회의 적들에는 열린 방식으로, 즉 그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부터 출발하는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서 나는 대화를 거부하면서 이해할 수도 없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냐는 반론을 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지금까지 내가 밝혀온 모든 인간의 운명을 되짚는다. ‘연대’와 ‘이해’의 시초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로 그 생각과 함께.
#3.
대학 5년차의 봄학기, 아무래도 이 토양 위에서의 마지막 두 학기가 될 해의 개막을 앞두고 있음을 직감하는 지금. 나는 두 가지 욕망이 피어올라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느낀다.
첫째는 예전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대하면서 시도했던 것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서 내 안에 살아있는 욕망이다. 여러 사람들과 글을 주고받는 작은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대학 2년차에 당시 감명깊게 읽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쓴 동명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바벨의 도서관》이라 이름붙인 지적 커뮤니티를 모집해보려 시도한 기억을 되새긴다. 분명 그 당시는 글을 쓰고 또 쓰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종의 ‘고요 속의 외침’에 가깝다는 느낌이 유래없이 증폭되어 겉잡을 수 없이 커졌던 때였다. 오래 전 어디선가 읽었던 기록, 계몽주의가 태동하던 근대 유럽에서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편지와 책으로 교류를 이어나갔다는 그 역사적 기록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었다. 당시는 고등학교 때에 이어 대학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사색하기를 반복했던 나 자신이 특히 취업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우상을 향한 뒤틀린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또래들의 행렬을 보며 극심한 환멸에 시달리던 참이기도 했다. 예전 어느 때에 니체에게서 빌려온 문장대로 “나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무료함을 넘어 이제는 비참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고등 교육 시스템에서 숨통을 트여줄 지적 동반자들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물론, 이 욕망이 결국 내 삶을 관통하는 중심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고독〉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서도.
《바벨의 도서관》 구성이 그 당시까지의 나 자신이 맞아온 운명처럼 ‘고요 속의 외침’으로 흩어져버린지 대략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내 서사는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것, 결여된 대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욕망을 여전히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여전히 나는 흥미로운 사상적 · 지적 교류를 원한다. 한때 나는 그것이 유럽 지성사의 전통을 이은 제도권 학계에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으나, 지난 2년 반의 세월 대학 연구실에서 체득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연구실에서도 나는 고독했던 것이다. 각자가 눈앞에 주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급급하고 그 누구도 상대의 사상과 철학,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는데는 관심이 없었기에 매 출근마다 연구실에서의 내 일과는 매번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었다: 오전 3시간의 키보드 자판 소리, 1시간 남짓의 시시껄렁한 대화 위에서의 가식적인 점심 식사, 다시 오후의 4시간에서 6시간 동안의 키보드 자판 소리. 간간히 “잘 되고 있지?”라는 간단한 인사만이 건너갈 뿐, 아무도 서로가 뭘 하며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해소되지 않은 ‘싶음’ 위에서 비틀거리는 여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여전히 나는 글을 쓰고 제도화된 〈이상적 인간〉에 저항하거나 적어도 회의를 느끼는, 다른 흥미로운 사람들을 원한다. 오랫동안 침묵과 고독을 습관적으로 지켜온 나는 간간히 시도해왔던 타인으로의 접근에서 번번히 상처를 입고서 뒤로 후퇴해왔다는 사실을 알지만, 결여는 여전하고 나는 체념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최근 이와 관련해서 드는 생각 중 하나란 유럽 지성인들의 편지 · 책을 통한 의사 교환을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맞게 매체를 바꾸어 다듬는 것은 어떨까하는 희미한 스케치다.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이 블로그가 돌아가는 CMS(Content Management Service) 소프트웨어인 WordPress에는 다른 블로그에 글을 동시에 발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러그인이 있다. 조야한 나의 스케치는 일종의 블로그 글들을 모으는 〈저널〉을 만들어서 그 사이트에 글도 올리고 상호의 글에 대해 의견을 밝힌 다른 ‘완결된 글들’도 쓰면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했던 것처럼 교류를 통한 사상 발전사를 기록하는 미래를 그린다.3물론 국내 블로그 이용자의 대다수는 WordPress와 같이 개인적인 서버를 마련할 필요가 있는 독립 CMS보다는 네이버 · 다음 등의 주요 대기업이 제공하는 블로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타사 서비스로의 진출을 싫어하는 기업들의 정책 덕에 WordPress로 이를 자동 발행하는 기능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만, 웹 브라우저 확장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며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되더라도 WordPress는 여러 사용자를 지원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종종 나는 인터넷에서 지인들의 블로그, 경우에 따라서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장들을 읽은 뒤 여러 감정과 〈잡념〉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떠오른 것들을 정리해 글로 남겨왔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서로가 떨어져 각자의 글을 자신의 게시판에 걸어놓는 ‘고요 속의 외침’을 지속해왔으며, 댓글로 간단한 의견만을 밝히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어쩌면 SNS와 현대의 블로깅 플랫폼들의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게, 사적으로 치열한 사상적 대립과 전개가 이루어졌던 지식사의 잃어버린 전통을 소외된 ‘고함 지르는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재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의 첫 번째 욕망에 대한 넔두리는 이것으로 갈음하기로 하고, 이제 두 번째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글을 쓰는 운명 속에서 살아온 나는 대학에서 보낸 지난 시간 동안 여러 사상과 철학 그리고 책들에 영향을 받아온 끝에 지금껏 내가 가슴속에 지녀온 〈고독〉이라는 키워드가 더할 나위 없이 부풀어 올라 있음을 안다. 돌이켜보면 이 팽창에는 여러 ‘방아쇠’들이 있었다. 대학 2년차에 접한 니체의 〈우상 파괴〉, 그 해 가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시지프 신화》에서 읽었던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한 문장들, 부조리를 직시하라는 그의 외침이 희미해질 무렵 우연처럼 그러나 숙명으로서 등장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여기에 이 여정 속에서 단단히 꼬여버린 연구실에서의 일들, 지속되는 좌절감을 해명하기 위한 세 번째 심리 상담과 그 과정에서 얻은 나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그 결과 읽게 된 프로이트와 라캉, 마침내는 지난 4년을 후회없이 바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까지. (평생 이보다 더 잘 쓴 책을, 구절과 문장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숨기고 있기에 나 자신을 항상 야릇한 흥분 위에 머무르게 한 이 대서사시보다 더한 책을, 나는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이 작은 불꽃에 계속 바람을 불어넣었고, 과거에는 그 불꽃의 소중함을 경시해왔으나 이제 그 온기를 절실히 깨닫게 된 나는 그 위대한 감각을 살려 나의 문제 의식과 함께 복잡하게 뒤엉킨 인식들을 한 편의 잘 다듬어진 서사로 승화시킬 필요를 강력하게 느낀다.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는 이야기다. 직설적으로는. 물론 혼란스럽기는 하다. 호기롭게 스스로의 바람을 밝히는 나의 한켠에는 소설을 쓴 경험이라고는 (아마 너무 ‘노골적’이어서) 수행평가에서 최하점을 맞은 고교 시절 장(掌)편소설을 휘적거린 것 하나밖에는 없다는 부동의 사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동안 나는 자신을 괴롭혀 온 삶과 죽음의 문제 ― “삶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하는 이 치명적 물음에 시달려왔으며 마침내 그동안 이해를 그토록 목말라했으며 심연을 넘나드는 성찰로써 앓아온 니체의 최후의 유산,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단초,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위대한 정오’에 도달했다는 직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직감이 분명히 자리하는 이상 나는 죽기 전 일종의 〈인간 찬가〉를 담은 소설 한 편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이 아름다운 불꽃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단기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10월 중순 즈음부터 받는 《대학신문》의 대학문학상, 그 외의 여러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등이라 할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내가 행하고 있는 이같은 검토 뒤에 지난 4년 동안 《괴델, 에셔, 바흐》를 함께 읽어온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 두 분께서 각기 다른 신춘문예전 당선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신 것에 은밀한 동경을 느끼는 나 자신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 뒤의 또 다른 배경으로서 여러 겹의 페르소나 저편에서 오들거리며 떨고 있는 나 자신의 불안한 일상과 무료함, 지속되는 좌절과 고독으로부터의 탈피 내지는 이것을 하나의 기회로 삼아 모든 것들을 하나로 끌어안으려는 일종의 주이상스(Jouissance)가 자리하고 있음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상술하였듯 나는 지금껏 수필만을 써 온 작고 고독한 글쟁이일 뿐 인간 하나를 상상하고 그를 또 하나의 세계 위에서 재구축하는 복잡한 작업을 해 본 경험은 거의 없기에, 이 장엄한 문 앞에서 막막함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다음의 사실도 부정할 수 없음을 안다: 나 자신의 지난 23년이라는 서사는 일종의 분출을 위해 충분한 숙성을 거쳤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의 침묵을 선택하기에는 나 자신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
이 두 욕망을 나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실현하려 하고 있다. 욕망하는 인간이 내가 인식하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인 이상, 나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내 시도가 오래 전 자유로운 사상 교류를 갈망하고 실천했던 이들의 위대한 전통, 그리고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알베르 카뮈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Appendix.
주석 및 참고문헌
- 1나아가,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7세기 영국 사회에서만 적용되는 문장일까?
- 2… (전략) … 그러나 이 로봇 프로그램이 자신의 과정을 완전히 속속들이 추적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일종의 직관적인 감각은 있다. 이처럼 자기-지식과 자기-무지 사이의 균형으로부터 자유의지라는 느낌이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 이미지에 포함된 어떤 관념들을 전해주려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작가는 그 이미지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다음에는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리저리 실험해보고는 최종적으로 어떤 설명 방법을 정한다. … (후략) …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 2013. p. 986. - 3물론 국내 블로그 이용자의 대다수는 WordPress와 같이 개인적인 서버를 마련할 필요가 있는 독립 CMS보다는 네이버 · 다음 등의 주요 대기업이 제공하는 블로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타사 서비스로의 진출을 싫어하는 기업들의 정책 덕에 WordPress로 이를 자동 발행하는 기능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만, 웹 브라우저 확장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며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되더라도 WordPress는 여러 사용자를 지원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