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2

2025-03-02 0 By 커피사유

낙서 시리즈는 커피사유가 쓰고 있는 글의 일부를 살짝 들추어보는 공간입니다.


쓰고 있는 글의 일부

Memento Mori.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불편하지만 분명한 참인 명제. 사람들은 자신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일상 속에서 잘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속 한 구석에서 무서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도 있지만, 자신에게 달려들어오는 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우리 생의 일상이라 죽음을 떠올리는 것 또한 하나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미키 17》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언컨대 〈죽음〉이다. 그러나 이 키워드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질문들이야말로 이 키워드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기 때문에, 나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몇 가지 시니피앙들을 하나씩 열거해야 한다. 이들 시니피앙들은 어느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물론 시니피앙마다 자신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층위야 제각각이지만, 그들 모두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 기작을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영화가 인간과 그가 이룩한 문명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으니, 평론 또한 솔직하게 쓰여야 한다. 나는 세 가지 시니피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섹스(sex)〉. 둘째, 〈부활(revival)〉. 셋째, 〈소스(sauce)〉.


그러나 저 논거가 미키 17과 18이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는 주장을 완전히 부숴놓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두 인물을 모두 ‘미키’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렇게까지 극심한 반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가?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미키 17과 18을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훨씬 저 많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상술한 것처럼 미키 17과 18은 같은 ‘내부’를 공유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미키 17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은 미키 18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과 서로 다른 공간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1기본적으로 두 입자는 ‘겹칠 수 없다’. 입자설의 핵심 가정 중 하나는 입자는 동시에 같은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특정 시각에 존재하는 수소 원자 두 개를 가정해보자. 1번 수소 원자가 3차원 직교 좌표계에서 $(0, 0, 0)$에 존재하고, 2번 수소 원자가 마찬가지로 $(0, 0, 0)$에 존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러나 방금의 근거는 한 가지 믿음 위에 서 있다. 인간의 정신에 대해 오래 전부터 대립해왔던 두 견해 중, 정신은 결국 육체, 즉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여러 입자들의 상호작용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보는 기계론자들의 믿음 말이다. 미키 17과 18이 공간적으로 다른 곳에 위치하는 육체를 가진다는 사실로부터 두 사람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 정신은 입자들의 총 집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는 이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믿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생물학과 의학의 역사는 인간의 신경계, 특히 뇌와 같은 물질적 기관들이 사고나 감정 등 인간의 정신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밝혀왔지만 여전히 한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을 기계론적으로 온전히 환원해서 설명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물론 연합 뉴런과 연합 뉴런 사이의 연결이 심각하게 복잡하기 때문에, 즉 낮은 층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정신 과정 자체가 워낙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호로는 모조리 연계해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난점이 발생한다는 기계론자들의 반론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기계론자들의 입장을 인정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사람들, 내 가족, 내 친구들, 내 은사님들, 내 동료들 모두를 ‘잘 조직된 세포덩어리’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견지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객은 이 시점에서 나쁘게 말해 “스스로가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에 노출되고, 역겨움이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옴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귀중한 존재로, 대체 불가능하며 개별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여겨왔고2또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다’. 따라서 기계론자들의 주장을 모조리 인정하자니 우리 자신의 가치를 소위 ‘리사이클러’로 떨어뜨려 태워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극심한 거부감이 우리를 괴롭힌다.


약간의 첨언

지난 2월 28일에 당일 개봉한 《미키 17》을 본 이래로 괜찮은 영화를 보면 반드시 평론을 쓴다는 나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영화가 나에게 던진 시니피앙들의 유기 관계가 하도 격렬하기에 너무 많은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잠을 못 자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다짜고짜 공책 한 권과 펜을 들고 자주 가는 카페로 홀연히 떠나 커피를 연신 들이키며 질문들을 최대한 써 내려가봤지만, 질문이 계속될수록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모순이라는 저 잔인한 운명 뿐이다. (물론, 이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최근 나의 철학적 귀결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통상 열 개 이내의 문단으로 정리되던 나의 평론이 심각하게 길어지고 있다. 대학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 눈동자가 심오해졌으며 그에 따라 글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해왔지만, 영화 평론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이번 글은 겨우 네 번째 대학에서의 영화 평론이기는 하다. 블로그에는 한 개밖에 없지 않냐고? 원래 공개하려고 했던 다른 하나는 결국 공개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대학 과제로 제출되었으나 공개하지 않았기에 이번이 네 번째다.) 부분적으로는 영화가 너무 솔직하기 때문에 이런 내적 갈등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난립하는 생각들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 하나를 찾지 않을 수 없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나는 이제서야 겨우 그 한 가닥을 찾아냈을 뿐이다.

그래서 상술한 것처럼 〈죽음〉이라는 전체 테마 아래에 놓인 세 가지 시니피앙, 첫째, 〈섹스(sex)〉. 둘째, 〈부활(revival)〉. 셋째, 〈소스(sauce)〉으로 글을 나누었다. 각각의 시니피앙에 대해 영화에서 제시된 상징들과 내가 연상한 것들을 모조리 결합시켜 테마를 완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가운데, 나는 조금 전 첫 번째 시니피앙에 관한 이야기를 그럭저럭 다 썼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지만, 그건 글을 한 편 쓰고나면 길게는 수십 번 고치는 미래의 내가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즉흥적 추동에 맡겨버렸다.) 위에 쓴 글의 일부는 그 대목 중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로 덜 ‘자극적인’, 덜 ‘불편한’ 내용으로 옮겨오기는 했고, 또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않고서 내 기술만 본 불성실한 어느 독자가 내용의 단편을 기반으로 나를 도덕적으로 문란한 사람으로 단정할까봐 걱정하는 것도 있어서 일부로 가장 평이한 서술이 있는 부분을 택한 것도 있다.3물론 니체와 푸코를 읽고 있는 입장에서 ‘정상’과 ‘비정상’, ‘도덕’과 ‘비도덕’이라는게 그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튼 글을 완성하지 않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너무 섣불리 글을 열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을 너무 오랫동안 이어나가자니 내 자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미키 17》에 등장하는 어느 독재자처럼 나도 관심종자의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여튼, 계속해서 끝까지 파고들면서 어떻게든 내가 생각한 바를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글이 조만간 완성되면 이 블로그에는 두 번째 영화 평론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 음… 지금 독자께 올릴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걸 기다리시거나, 아니면 《미키 17》을 직접 보러 다녀오시라는 정중한 부탁 외에는 없지 않을까 싶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기본적으로 두 입자는 ‘겹칠 수 없다’. 입자설의 핵심 가정 중 하나는 입자는 동시에 같은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특정 시각에 존재하는 수소 원자 두 개를 가정해보자. 1번 수소 원자가 3차원 직교 좌표계에서 $(0, 0, 0)$에 존재하고, 2번 수소 원자가 마찬가지로 $(0, 0, 0)$에 존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나?
  • 2
    또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다’.
  • 3
    물론 니체와 푸코를 읽고 있는 입장에서 ‘정상’과 ‘비정상’, ‘도덕’과 ‘비도덕’이라는게 그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