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서일지 #25.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원 순서대로라면 ‘탐서일지 #24. 김애란, 『비행운』 II’가 연재되어야 할 순서이나, 후속 원고들이 상당수 준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글이 미완성이라 시리즈 연재가 오랜 시간 지연되었습니다. 따라서 부득이 뛰어넘고 다음 글부터 연재합니다. 추후 글이 완성되는대로 순서와 일시를 조정하여 게재하겠습니다.
- 여는 말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독서 모임 계획서
- I. 기초 정보
- II. 도서 선정의 이유
- III. 주요 내용 소개
- IV. 작가 소개
- V. 중심 질문들
- VI. 모임 계획
- VI.1. 제1회차: “시지프 신화를 열며: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
- VI.2. 제2회차: “시지프 신화의 전환: 산정에서의 시지프”
- VI.3. 제3회차: “시지프 신화로 되돌아가며: 또다시 바위를 들어올리는 시지프”
- VII.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들
- 부록 I. 김화영, 《시지프 신화: 작품 해설》 중 〈『시지프 신화』의 구조〉 전문
- 부록 II. 김애란 – 알베르 카뮈 –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관계
- 독서 노트 1: 제1회차 독서 모임 – “시지프 신화를 시작하며: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
여는 말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 185.
여기에 잘 알려진 신화가 있다. 일곱 명의 신을 기만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코린토스를 건립한 자였고, 하늘의 신 제우스의 보쌈 행위를 고발한 자기도 하며,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기습 제압한 뒤 감금해 한때 세상에 죽음을 지워 혼란을 가져온 자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위대하면서 끝내주는 기만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처벌로 저승으로 끌려간 그가 낸 꾀에 있었다.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호소로 또다시 신을 속여 이승으로 되돌아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카뮈가 쓴대로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뜻한 돌들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지옥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수차례에 걸친 소환, 분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여러 해 동안 그는 둥글게 굽은 만과 눈부신 바다 그리고 미소짓는 대지를 보며 살았다.”1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 181. 운명에 사사건건이 개입했던 모든 초월적 존재들을 향해 보란듯 웃어보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생을 양껏 누린 이 남자는 천수를 누린 뒤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
저승에 도착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이를 갈아온 신들이 준비한 영원한 형벌이었다. 비탈길의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올리는 형벌이었는데, 단순히 고된 중노동이라는 사실 이상의 끔찍한 벌이었다. 정상까지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밀어올리면, 숨 고를 순간조차 없이 바위가 원래의 출발점 즉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따라서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밀어올리고 또 떨어진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이 영원토록 반복되는 것이 바로 이 남자에게 주어진 대가였기 때문이다.
왜 이 남자에게 주어진 신들의 징벌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인가? 그 이유란 다름아닌 그의 행위 자체가 영원토록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남자가 아무리 바위를 밀어올리더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바위는 그 노동의 효용은 존재하지 않음을 매 순간마다 보여준다. 첫 몇 차례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의미가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바위를 밀어올려 볼 수 있겠지만, 정상에서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수차례 목도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허탈함을 감출 수 있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와 쿤데라가 떠오르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니체는 무의미한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는 인간이었기에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병리학적인 발명을 행했다고 말했다. 쿤데라는 이 명제를 문학적으로 훌륭히 계승하여, 썩거나 문드러져 없어지는 모든 추한 것들에 맞서 영원하거나 의미 있는 것들을 탐하는 우리의 고집 내지는 특성을 키치(Kitsch)라는 단어로 요약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남겼다. 두 사람의 발자취가 기초하는 바는 오래 전 붓다가 지적한 바의 연장선 상에 있다. 무상(無常),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 스스로의 삶에 의지할 수 있는 어떠한 의미도 없으며 결국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숙명 앞에 선 우리 자신을 논한 이 치열한 계보의 역사. 이 모두를 아는 우리는 남자의 신화로부터 우리 자신이 처한 운명을 본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는 바위를 버리는 것을 택할 수 있음에도2물론, 원 신화에서는 제대로 바위를 굴리지 않으면 모된 채찍질을 당한다는 장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영역이란 이 신화 자체가 아니고, 이 신화가 우리 자신의 삶과 가지는 동형성에 의해 야기되는 우리 스스로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바위를 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 질문들 중 가장 무겁고 오래된 질문이 다름 아닌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꺼이 다시 한 번 출발점으로 걸어 내려가 바위를 밀어올리기를 선택한다. 결국 최종 지점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노력해온 바는 공허로 흩어질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그러한 운명 속으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영원히 닿을 수 없을 지점을 향해 그는 계속해서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굳은살과 물집이 잡힌 손으로 무게를 견디는 특유의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서 볼 때 이 남자는 저항할 여지 하나 없는 완벽한 함정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신을 기만해온 역사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는다. 신들은 그에게 던져진 바위의 무게를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 그는 무게를 기꺼이 지탱하며, 때문에 영원히 신들을 향해 웃어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선택하고 있는 것이란 마지못한 순응이라기보다는 운명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인 셈이다.
우리는 이미 이 남자의 이름을 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시시포스(Sisyphus), 또는 시지프(Sisyphe)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독서 모임 계획서
I. 기초 정보
- 선정 도서: 알베르 카뮈 作, 김화영 易 『시지프 신화』. 민음사. 2016.
- ‘카뮈’의 핵심 키워드: 부조리, 시지프스 신화, 자살, 매 순간의 소진
- ‘계보적’ 핵심 키워드: 니힐리즘, 우상, 키치(Kitsch), 토마시, 입법자로서의 철학자
II. 도서 선정의 이유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c’est le suicide.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봅시다. 지난 해 8월, 우리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났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그 결과 우리가 맞닥뜨리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위험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덕 명제들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양심의 가책에 대한 피학성을 검토했고, 마침내는 진리 자체를 검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9월에 만난 쿤데라는 니체가 이야기한 ‘신’ 또는 ‘우상’의 개념을 ‘키치(Kitsch)’라는 단어로 발전시켰습니다.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즉 키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시사하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어떻게든 정하고 이를 덥석 믿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지난 2월도 회상해봅시다. 우리는 니체가 주장한 인간의 숙명적인 불완전성을 좀 더 고찰해보기 위해 예술을 매개로 스스로의 ‘하얀 문’ 속으로 뛰어들어 보았습니다. 《OMORI》의 서사를 통해 “나는 무엇인가?”라는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동시에 흥미로운 질문을 마주했고, 프로이트의 심급 모형 및 라캉의 ‘주이상스’ 개념으로써 자신과 세계 사이에 위치한 간극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술과 철학 사이를 오가면서 던진 우리 자신의 ‘결여’에 대한 숙고는 3월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절정을 맞았습니다. 붉은색의 나오코와 푸른색의 미도리 사이에 위치한 우물 속에서 우리는 유년기의 상실들을 보았고, 죽음과 삶이 혼재되어 있는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기를 갈구하는 인간상을 재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애시당초에 뒤섞인 죽음과 삶을 애써 분리하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 속절없이 닥쳐오는 잔인한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려 높고 맑은 행복의 세계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은 지난 6월의 《비행운》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주제였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검토하다보면 우리는 하나의 이항 대립 구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 그리고 세계라는 저 오래된, 그러나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심오한 이항 관계를 말이지요. 고등학생으로서 눈 앞의 내신과 대학 진학에만 급급했던 우리 모두는 어느새 〈서른〉의 화자처럼 나이가 들어 사회 그리고 그 속에 처한 우리 자신에게 드리우는 수많은 그림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걱정들도 우리의 존재를 덮쳐오는 것만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해서 먹고 살 수는 있을까?”, “내가 당초에 원했던 꿈을 이룰 수는 있을까?”와 같은 당면적 질문에서부터,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타협이나 위선은 아닐까?”, “내가 걸어온 길이 맞을까?”, “삶과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마침내는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저 질문에 이르기까지.
《시지프 신화》의 첫 장에 자리한 저 문장은 이러한 여정을 거쳐온 우리의 현재에 알맞은 질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이 있든 없든지와 무관하게 톨스토이가 제목으로써 보여준 바 있듯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저 질문은 오래 전부터 만인의 뿌리를 흔들어놓았습니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들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오늘의 우리.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합리에의 욕구가 세계의 비합리적인 침묵을 마주할 때 탄생하는 〈부조리〉의 철학을 대답으로 내어놓습니다.
이번 7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질문으로 내려갑니다.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애써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던 저 오래된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그 형태가 다양할지언정 핵심은 한결같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저 위험하고도 답변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물음 하나. 우리는 이 근원적 물음 앞에서 다시 한 번 멈춰 서게 됩니다.
우리는 일렁거리는 불꽃 하나를 봅니다. 잘못 다루면 모든 것을 활활 태워 재로 되돌려버릴 듯한 죽음과,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위시하는 삶 사이에 위치한 저 불꽃 하나를. 카뮈는 “불꽃에 복종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라고 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는 철학은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실존의 문제를 고민한 대표적인 문호이자 철학자였던 알베르 카뮈의 문장들이 여러분에게 하나의 불꽃이 되기를 바랍니다.
Il est bon cependant que l’homme, en se mesurant à la difficulté,
se juge quelquefois. Il est seul à pouvoir le faire.
그러나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III. 주요 내용 소개
이하의 소개 내용은 역자 김화영 교수의 작품 해설 및 이서규 교수의 논문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 대한 고찰’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Juger que la vie vaut ou ne vaut pas la peine d’être vécue,
c’est répondre à la question fondamentale de la philosophie.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관심사가 ‘우상’, 밀란 쿤데라의 관심사가 ‘키치’였다고 한다면, 카뮈의 관심사는 ‘자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않지만 막상 모종의 사건으로 그 필연성이 확고해지면 두려움에 휩싸이곤 하는 ‘죽음’의 문제. 카뮈는 삶과 죽음의 경게가 가장 모호해진 시절의 유럽에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고자 했습니다.
카뮈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부조리〉를 중심으로 고찰합니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끼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나 인간이 마치 삶으로부터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는 존재론적 사건들을 〈부조리〉라 명명합니다. 카뮈의 〈부조리〉를 의식하게 된 인간의 상황은 니체의 〈니힐리즘〉 속의 인간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에 대해 우리 자신이 습관적으로 유지해온 가치 · 지식 · 도덕 · 의미들이 모조리 붕괴해버리고,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좌절됨에 따라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세계의 ‘두꺼움’이 의식되는 시점. 무반성한 삶의 관성을 이어나가던 중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는 바로 이 시점에 카뮈는 집중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시점, 스스로의 존재조차 더할 나위 없이 낯설어지는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절박하게 대답이 요구되는 질문이 바로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합니다. 그는 세 가지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첫째와 둘째에서 그는 ‘자살’을 ‘철학적 자살’과 ‘육체적 자살’로 나누어서 검토합니다. ‘철학적 자살’을 검토하면서 그는 당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분석하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세게를 왜곡하면서 삶을 초월하는 일종의 희망 또는 믿음을 창출하려는 회피를 행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다음으로 검토하는 ‘육체적 자살’에서 카뮈는 ‘자살’이란 자신을 폐기함으로써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즉 ‘철학적 자살’과 ‘육체적 자살’이라는 두 종류의 가능성은 모두 세계와 인간 자신의 두 개의 항으로 구성된 부조리의 기반을 무시한 채 “고통스러운 대립의 항목들 중 하나를 부정하고 나에게 기권을 요구”하므로,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귀결이 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 관찰에서 ‘자살’이라는 당초의 문제가 ‘행복한 삶’의 단초로 역전됩니다. 카뮈는 부조리의 세계를 빠져나가지 않고 ‘그곳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이 답은 〈부조리의 추론〉 말미에서 구체화됩니다.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이라는 세 가지 열쇳말을 중추로 삼아 카뮈는 ‘반항과 통찰력을 간직한 채’ 인간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일한 ‘자명함’이라고 할 수 있을 〈부조리〉에 ‘꼭 매달리는’ 인간, 그것이 우리가 카뮈의 유산 《시지프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불꽃이라 할 것입니다.
작년 8월, 『도덕의 계보』를 읽으면서 저는 철학이 일종의 거대한 다이너마이트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불을 붙이기 전에는 무섭고, 또 폭발할 때의 진동과 소음이 너무 큰 것 같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먼지로 흩어져 주저앉아 버린 이 ‘사막’에서 우리는 비약으로 버티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비약’을 단호히 거부한 카뮈가 지적하듯 “단 한 가지의 보는 방법에 만족한 채 모든 정신적 힘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힘인 모순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일렁거리는 불꽃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조리의 추론〉의 마지막 문장대로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기에, 이번 7월 우리는 카뮈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봅니다.
IV. 작가 소개
이하에는 우리 책의 역자인 김화영 교수가 쓴 작품 해설 중 ‘알베르 카뮈의 생애’ 관련 부분3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212-238.을 재구성하여 옮깁니다. 역자의 서술은 카뮈가 살아간 궤적이 《시지프 신화》의 주제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카뮈와 그의 작품들을 이어주는 철학적 아이디어들 그리고 생의 경험들을 세심하게 드러내고 있는 원 문장들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 책의 저자인 ‘알베르 카뮈’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이 목표에 따라 이해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거나 카뮈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 당장은 필요치 아니한 대목들은 일부 중략하였으며, 원문이 다루지 않고 있는 카뮈의 생애 시점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보충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III. 주요 내용 소개’와는 달리 이 부분은 별도의 주석이 필요치 않아 보여 전문을 부록으로 수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우리 책의 212-238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본인은 그렇게 불리기를 거부한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자 기자 그리고 철학자. 사람들은 그가 역대 두 번째로 어린 43세의 젊은 나이로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곤 하지만, 우리의 흥미를 더 끄는 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평생에 걸쳐 보여준 그 자신의 〈부조리〉의 철학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알제리에는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꿈꾸며 이주한 프랑스인들인 소위 피에-누아르(Pied-Noir)들이 많았는데, 카뮈의 양친도 그 일부였다. 카뮈의 삶은 대부분이 죽음과 가난으로 점칠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아버지가 전사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버린 것이다. 카뮈의 어머니는 카뮈와 형을 데리고 친정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가난은 어린 시절의 그를 괴롭혔다.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할 뻔 했던 그는 초등학교 담임이었던 루이 제르멩 덕분에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된다.
카뮈의 학문적 발전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은사인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르니에는 당시에는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지만, 이후 소르본 대학교의 미학 · 예술학 교수이자 철학자, 작가로 왕성히 활동했다. 그르니에의 제안으로 카뮈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카뮈와 그르니에 두 사람이 30년 동안 편지로 이어나간 활발한 교류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카뮈가 삶에서 체득한 〈부조리〉는 가난 뿐만은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 또한 평생에 걸쳐 줄기차게 그를 따라다녔다. 1930년 열일곱 살 때 돌연 폐렴에 걸린 젊은 카뮈는 죽음과 대면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의 충격적인 경험을 「결혼」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옮겨 놓는다. “여기 이렇게 자리에 누운 채 이런 말을 듣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하겠소. 당신은 이제 곧 죽게 됩니다.’ 온 생명을 손안에 움켜쥔 채, 온 공포를 오장에 담은 채 바보처럼 멍청한 눈으로 그냥 누워 있다. 그 밖의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결혼 · 여름』, 30쪽) 병은 끊임없이 재발한다. 1937년 여름에는 한 달 동안이나 프랑스 본토의 사부아 지방에 가서 전지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가 “의식적인 죽음”이라고 명명하는 죽음의 의식은 카뮈의 삶, 감수성, 사상 그리고 나아가서는 모든 저작의 출발점이요 배경을 이루게 된다. 부조리의 감정이란 바로 젊은 카뮈가 죽음이라는 엄청난 비극적 조건과 대면한 결과로 태어난 것이다.
건강의 악화는 그의 인생 행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1936년 봄 지금의 석사 학위에 해당하는 DES 디플롬 논문이 통과되자 이듬해 그는 교직 생활을 꿈꾸며 대학 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아예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희망하던 직업의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타의만이 교직의 길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1937년 10월 4일 그는 자신의 신청에 따라 알제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시디벨아베스 중학교의 문법 교사로 임명되었지만,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했다. 이같은 직업 선택의 문제로 보듯 카뮈는 평범한 직업을 통한 안정을 거부했다. 『시지프 신화』에서 쓰듯 그는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89쪽)에 대한 회의와 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이 부조리의 인간은 가정 교사, 알제 대학교 기상연구소 조수(1937년 11월) 등 ‘밥벌이를 하기 위한 자질구레한 일들’에 매달리면서 떠돌이 생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그는 안정된 직업 대신 능동적인 사회 활동을 선택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산당에서의 정치 활동과 연극이었다. 1934년 말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가난한 회교도 구역에서 선전 업무를 담당했다. 어릴 때부터 노동자 계층의 가난과 불평등을 현실에서 뼈아프게 체험한 그에게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노동자 계급을 옹호한다는 공산당은 일종의 ‘평신도 교회’와 같은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1937년 가난한 회교도 노동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그의 이상과 파시즘 타도를 그보다 앞세우는 당의 노선은 머지않아 불화로 끝장이 났고 카뮈는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이 장악한 알제 ‘문화의 집’ 활동과 특히 그 산하의 ‘노동극단’ 활동은 꾸준히 계속했다. 카뮈는 축구장이나 후일 신문사의 편집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극 활동에서 무엇보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는 팀워크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1937년에 노동극단이 해체되자 그는 다시 에키프 극단을 창설했다. 극단의 리더로서, 극작가, 배우, 연출자로서 줄기차게 계속된 그의 열정적 활동과 경험은 『시지프 신화』에 사용된 각종 연극적 비유로, 또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 중 하나로 ‘배우’를 제시하는 기반이 된다.
『시지프 신화』와 관련해 이 시기 카뮈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체험은 사랑, 결혼 그리고 이혼의 문제다. 그 어디에도 매이기를 거부하는 자유인 카뮈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약관 스무 살 때인 1934년에 친구들 중 누구보다 먼저 결혼했다. 의사 소글러 박사의 의붓딸이며 카뮈가 다니던 대학의 철학 강의에 청강생으로 출석하던 시몬 이에가 그 상대였다. 그를 아는 친구들에게 그의 결혼은 너무나도 이외의 사건이었다. 결혼이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제도요, 결혼반지란 감옥이라고 외치던 카뮈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통해 정절을 지키기로 맹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약 중독자였다. 카뮈는 결혼을 통해 그녀를 치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카뮈의 선의는 벽에 부딪쳤고 너무나 짧았던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았다. 1936년 여름, 함께 떠난 중부 유럽으로의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카뮈와 시몬은 첫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한편 말쑥한 차림새에 지성적이고 언제나 남들에게 친절하며 자유분방한 성격의 미남 카뮈의 주위에는 일찍부터 여자가 많이 따랐다. ‘세계 앞의 집’에서 공개적인 우정을 나눈 마리 도브렌, 잔 시카르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들의 소개로 만나 지속적인 애정 관계를 가진 크리스티안, 블랑슈, 이본 등의 여성들은 카뮈의 전기 작가들에 의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언급되는 바람둥이형 호색한인 돈 후안에게서 일종의 자화상 같은 일면을 발견한다. 그에게 진정한 ‘결혼(noces)’은 사회 제도가 아니라 무제한의 자유분방한 사랑이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조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돈 후안이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전전하는 것은 결코 애정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모든 여자를 똑같은 열정으로, 그때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108쪽)라고 카뮈는 쓴다. 1937년 프랑신 포르를 만나서부터 그녀와 재혼할 때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도 카뮈 자신은 이러한 돈 후안적 태도를 유지한다. 그에게도, 돈 후안에게도 중요한 것은 명철한 의식이며 “최대한 많은 여자를 거치며 그 여자들과 더불어 그의 삶의 기회를 남김없이 소진한다.”(113쪽)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나 관념이 아니라 현재 속에 주어진 ‘삶의 기회를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일 뿐이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9월이다. 이 시점은 여름부터 유럽 전역을 휩쓴 심상치 않은 정치적 분위기와 전쟁의 위협이 정점에 도달한 결과, 독일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그 뒤를 이은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일 선전 포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옥문이 열린 때였다. 카뮈는 마치 부조리에 대한 도전인 양 전쟁 발발 직후인 9월 6일부터 『시지프 신화』의 집필에 들어간다. 그는 전쟁을 자신에게 “제안된 내기”라고 스스로 규정하면서 그 전쟁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목숨이라도 걸고 싶어서” 두 번째로 군 입대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그의 신청은 다시 한 번 건강상의 이유로 “병역 면제자”라는 결과로 귀결되고 만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정간 상태에 들어간 신문 《알제 뤼퓌블리캥》의 기자직을 떠나 자매지 《수아르 레뷔플리캥》의 편집국장 자리를 맡는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1940년 1월 10일 《수아르 레뷔플리캥》마저 총독부 당국에 의해 정간당하자 카뮈는 실직자가 되고 만다. 2월 13일 그는 파리로 떠난 《알제 뤼퓌블리캥》의 창간자이자 동료인 파스칼 피아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3월 14일, 카뮈는 그의 소개로 알제를 뒤로하고 파리로 떠나서 《파리 수아르》 신문사에서 편집국 내근 기자로 일을 시작한다.
1940년 초, 그는 《파리 수아르》에 근무하는 한편 소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의 동시 집필에 열중한다. 5월 1일, 마침내 소설이 탈고되지만 6월 12일 독일이 파리 코 앞까지 진격하면서 카뮈는 중부의 클레르몽페랑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피난 생활 동안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3분의 1, 즉 1부를 완성한다. 그해 10월에는 리옹으로 신문사가 이동했고, 오래전부터 별거 중이었던 첫 부인 시몬 이에와의 이혼이 확정된다. 카뮈는 프랑신과의 결혼 약속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11월 말 알제리에서 리옹으로 건너온 프랑신과 카뮈가 12월 3일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실현된다.
리옹에서 『시지프 신화』의 초고가 완성될 무렵 《파리 수아르》 신문사는 사정상 구조 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말단 직원이었던 카뮈는 직장을 잃고 만다. 카뮈 부부는 알제리의 오랑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랑의 아르제브가 67번지의 아파트에서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최종고를 완성한다. 1941년 2월 21일의 일이었다. 이 시기, 그러니까 책의 뒷 4분의 3이 집필된 이 시기에 그는 은사 장 그르니에의 저서 『정통성에 대한 시론』에 언급되는 시지프 신화에 힌트를 얻어, 그동안 ‘부조리’로 명명한 책의 제목을 ‘시지프 신화’로 확정한다.
『시지프 신화』는 1942년 10월 16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같은 해 7월 폐렴이 재발한 카뮈가 가족과 함께 프랑스 본토로 요양 여행을 떠나 파늘리에에 머물던 당시의 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알제리 독립 전쟁이 벌어진 1954년에 이르기까지 카뮈는 요양 생활과 기자 · 가정 교사 등의 일을 전전하며 생활한다. 세계 대전 직후에는 카뮈는 나치 청산이라는 명목 아래 벌어진 광범위한 프랑스에서의 숙청을 크게 규탄한 것과는 달리, 알제리 전쟁 당시에는 프랑스 정부 편을 들어 문단에 충격을 준다. 그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해서, 알제리는 ‘신성한 프랑스의 영토’라고 여기는 프랑스 우익들은 물론이거니와 독립을 지지하던 공산당 동료들 및 언론인 · 지식인들을 위시한 좌익들 모두에게 외면을 받았다.
논란과 외면 속에서도 글을 쓰고 시대를 직시하려 노력한 이 부조리한 인간의 삶은 1960년 1월 4일에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마감된다.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가 몰던 차를 타고 가던 길에, 그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냈고 그만 목이 부러져 즉사하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마지막까지 일생의 철학이었던 ‘부조리’라는 열쇳말대로 살다 간 것이다.
V. 중심 질문들
《시지프 신화》는 일반적인 철학서와는 다르게 솔직한 자기 성찰 그리고 그 과정 중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에 대한 직시를 요구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회고해볼 때, 이 성찰과 직시는 정해진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보다는 몇 가지 철학적 질문들을 곱씹으면서 생각의 연쇄를 이어갈 때에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금월의 모임은 토론 주제를 정하여 논의하는 방식 대신, 아래와 같이 정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각자 생각해보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 또는 그 과정 중에서 마주한 자신의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 V.1.1.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 (전 회차를 관통하는 질문)
- V.1.2.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죽음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으며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길 때, 나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제1차 모임의 중심 질문)
- V.1.3.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 의미란 무엇인가? 만일 없다면, 의미가 있다고 믿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은가? (제2차 모임의 중심 질문)
- V.1.4.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내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나 자신이 그 태도대로 살아간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나는 그 바람직한 삶의 태도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제3차 모임의 중심 질문)
VI. 모임 계획
금월의 총 3번 이루어질 모임은 서로의 독후감을 논평하는 시간 없이 다음과 같은 계획으로 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계획을 열거하기 전, 모임 계획과 관련한 몇 가지 부언을 아래와 같이 붙이고자 합니다.
모임의 각 회차에서 각 구성원은 반드시 적어도 필수 읽어올 범위까지는 도서를 읽어와야 합니다. 권장 읽어올 범위는 해당 회차에서의 논의나 이해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호스트가 읽어올 것을 권장하는 도서의 범위로, 읽어오는 것이 강제되지는 않으나 다만 권장됩니다.
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보조하면서 구성원들이 도서와 모임에서 진행할 토의 · 토론의 주요 논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각 회차마다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을 정해두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규칙에 의거하여 이 내용들이 누락되었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나, 모임에서 논의할 부분들을 미리 생각해보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해당 내용을 생각해보고 독서 노트에 정리하여 올리는 것이 강력하게 권장됩니다.
아울러 철학 초심자가 많은 우리 모임의 상황을 고려하여, 모임을 준비하거나 카뮈의 주요 사상에 대하여 톺아보고자 할 때 참고 가능한 추천 참고 문헌이 회차별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해당 문헌에 대한 참고는 전적으로 구성원의 자유이며, 필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사상의 정수, 계보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추천 참고 문헌은 가급적 탐독하기를 권장합니다.
이제 각 회차별로 나누어 모임의 구체적인 계획을 읽어올 범위와 독서노트에 포함해야 할 내용, 모임에서 진행할 것들의 순서대로 아래와 같이 밝힙니다.
VI.1. 제1회차: “시지프 신화를 열며: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
- ♫ : Astor Piazzolla – Prologue [Tango Apasionada] (1987)
- 필수 읽어올 범위: 책의 제4부:〈시지프 신화〉 전체, 본 모임계획서의 ‘III. 주요 내용 소개’ 및 ‘IV. 작가 소개’
- 권장 읽어올 범위: 필수 읽어올 범위에 더해, 본 모임계획서의 ‘부록 I.’ (가능하다면, 책의 말미에 실린 역자의 해설 전체)
- 추천 참고 문헌
- VII.2. 철학 저널 및 학위 논문 中 〈이서규, 「카뮈의 부조리철학에 대한 고찰.」〉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자신이 생각할 때, 책의 제4부: 〈시지프 신화〉에서 저자 카뮈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
- 중심 질문 V.1.1., V.1.2.에 대한 자신의 입장 및 그에 대한 설명.
- 공동으로 VII.3. 영상 자료 중 〈EBS 지식채널e, ‘반항하는 인간’〉 시청.
- 구성원들이 각자 정리한 도서의 제4부: 〈시지프 신화〉에 대한 첫인상과 핵심 내용을 청취 · 논의.
- 모임 계획서의 ‘III. 주요 내용 소개’와 ‘IV. 작가 소개’에 기재된 내역들 중에서 각자가 흥미롭다고 생각하거나 관심이 가는 부분들을 공유.
- 중심 질문 V.1.1; V.1.2.에 대한 구성원들의 입장과 설명을 듣고, 자유 토의.
- 기타 카뮈와 그의 철학을 함께 살펴보면서 알고 싶거나 이해하고 싶은 부분들을 논의.
- 제1회차의 경우, 철학적 논의 및 서적에 친숙하지 않은 구성원들을 위해 요청하는 경우 책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질문들을 던져가며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팁을 제공할 예정.
VI.2. 제2회차: “시지프 신화의 전환: 산정에서의 시지프”
- ♫ : Astor Piazzolla – Invierno Porteno (Arr. by Leonid Desyatnikov, 2000)
- 필수 읽어올 범위: 책의 제1부: 〈부조리의 추론〉 중 ‘부조리의 벽’까지(~ p. 49.), 본 모임계획서의 ‘부록 I.’ 중 ‘3.1. 희망’ 직전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필수 읽어올 범위에 더해, ‘부록: 프란스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전체.
- 추천 참고 문헌
- VII.1. 도서 中 〈프리드리히 니체 著, 박찬국 易.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의 ‘세 번째 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28절.
(pp. 300-302.)
- VII.1. 도서 中 〈밀란 쿤데라 著, 이재룡 易.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8.〉의 제1 ~ 3절. (pp. 9-18.)
- VII.1. 도서 中 〈알베르 카뮈 著, 유기환 易. 『이방인』. 현대지성. 2023.〉의 제1부. (pp. 27-96.)
- VII.1. 도서 中 〈프리드리히 니체 著, 박찬국 易.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의 ‘세 번째 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28절.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필수 읽어올 범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또는 대목과 그 이유.
- 카뮈가 설명한 ‘부조리’의 의미 및 특징, 이 ‘부조리’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와 자신은 어떠한지에 대한 요약. (구체적인 근거 문장들을 역자의 해설을 제외한 범위 내에서 인용할 것.)
- 중심 질문 V.1.3.에 대한 자신의 입장 및 그에 대한 설명.
- 구성원들이 각자 꼽은 필수 읽어올 범위 중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 대목들을 공유.
- 카뮈의 ‘부조리’ 개념의 의미 · 특징 · 그 ‘부조리’에 처한 인간의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공동으로 정리.
- 카뮈가 ‘부조리’ 개념으로써 주장한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동의하는지에 관한 토론.
- 중심 질문 V.1.3.에 대한 구성원들의 입장과 설명을 듣고, 자유 토의.
- 기타 필수 읽어올 범위 내 구성원들이 원하는 주제에 대한 논의.
- 제2회차와 제3회차의 경우, 관심이 있는 구성원들을 위해 원하는 경우 모임 정규 시간 이후에도 별도의 카뮈 · 니체 · 쿤데라 등 실존주의 철학 및 모임 도서 · 참고 문헌에 대한 추가 문답을 진행할 예정.
VI.3. 제3회차: “시지프 신화로 되돌아가며: 또다시 바위를 들어올리는 시지프”
- ♫ : Astor Piazzolla – Libertango (by Yo-Yo Ma, 1997)
- 필수 읽어올 범위: 책의 제1부: 〈부조리의 추론〉 끝까지(~ p. 98.), 본 모임 계획서의 ‘부록 I.’의 끝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필수 읽어올 범위에 더해, ‘제2장: 부조리한 인간’ 및 ‘제3장: 부조리한 창조’ 전체.
- 추천 참고 문헌
- VII.1. 도서 中 〈알베르 카뮈 著, 유기환 易. 『이방인』. 현대지성. 2023.〉의 제2부. (pp. 101-171.)
- VII.2. 철학 저널 및 학위 논문 中 〈조현천,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타난 무의미의 의미.」〉
- VII.2. 철학 저널 및 학위 논문 中 〈이서규, 「카뮈의 반항개념에 대한 고찰.」〉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필수 읽어올 범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또는 대목과 그 이유.
- 카뮈가 설명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선택지에 대한 요약. 마지막 선택지인 ‘부조리 속에서 버티기’에 대해서는 그가 이끌어내는 세 가지 결론을 반드시 요약에 포함할 것. (구체적인 근거 문장들을 역자의 해설을 제외한 범위 내에서 인용할 것.)
- 중심 질문 V.1.4.에 대한 자신의 입장 및 그에 대한 설명.
- 중심 질문 V.1.1.에 대한 자신의 최종 입장 및 그에 대한 설명.
- (가능하다면) 매 모임마다 탱고가 재생된 이유와 마지막 곡의 제목 ‘Libertango’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자신의 추측. (‘부록 II’가 상당히 도움이 될 것임.)
- 구성원들이 각자 꼽은 필수 읽어올 범위 중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 대목들을 공유.
- 카뮈가 논한 ‘부조리’에 처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길과, 세 번째 방법에서 그가 이끌어내는 ‘부조리’의 세 귀결에 대해 공동으로 정리.
- 중심 질문 V.1.4.에 대한 구성원들의 입장과 설명을 듣고, 자유 토의.
- 카뮈가 주장한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최종 정리하고,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
- 기타 필수 읽어올 범위 내 구성원들이 원하는 주제에 대한 논의.
- 제2회차와 제3회차의 경우, 관심이 있는 구성원들을 위해 원하는 경우 모임 정규 시간 이후에도 별도의 카뮈 · 니체 · 쿤데라 등 실존주의 철학 및 모임 도서 · 참고 문헌에 대한 추가 문답을 진행할 예정.
VII.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들
VII.1. 도서
- 알베르 카뮈 著, 유기환 易. 『이방인』. 현대지성. 2023.
- 프리드리히 니체 著, 박찬국 易.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
- 밀란 쿤데라 著, 이재룡 易.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8.
- 무라카미 하루키 著, 양억관 易.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2017.
- 야마다 무네키 著, 지문환 易.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북스토리. 2017.
- 김애란 著,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VII.2. 철학 저널 및 학위논문
- 이서규, 「카뮈의 부조리철학에 대한 고찰.」 철학논집. 35. 2013. pp. 139-178. (카뮈의 주요 철학 개념인 〈부조리〉와 이로부터 그가 유도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좋은 개론)
- 조현천,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타난 무의미의 의미.」 인문학연구. 19. pp. 191-218. (알베르 카뮈 · 밀란 쿤데라 · 프리드리히 니체 세 사람을 잇는 하나의 실존적 개요)
- 이서규, 「카뮈의 반항개념에 대한 고찰.」 철학논총. 75. 2014. pp. 211-242. (카뮈가 ‘부조리’에서 끌어낸 귀결 중 ‘반항’의 변질 위험성, ‘혁명’과 ‘반항’의 구분에 대한 좋은 논고)
- 윤정임, 「카뮈-사르트르 논쟁사.」 유럽사회문화. 6. 2011. pp. 5-27. (카뮈와 사르트르의 입장차와 그 역사적 증거에 대한 좋은 개요. 이서규의 「카뮈의 반항개념에 대한 고찰」을 먼저 읽은 뒤에 보는 것을 추천)
VII.3. 영상 자료
- EBS 지식채널e, 「반항하는 인간.」 2016. Web. Accessed on 5 Jul 2025.
(단편 다큐멘터리) https://jisike.ebs.co.kr/jisike/vodReplayView?siteCd=JE&prodId=352&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10576642.
VII.4. 개인 저작물들
- 커피사유, 〈논파록 #3. 니체의 오사무의 ‘합’〉. Web. Accessed on 3 Jul 2025. (모 선생님과의 의견 교환 기록) https://stevenoh0908.pe.kr/blog/knowledges/논파록-3-니체와-오사무의-합.
- 커피사유, 〈사유 #52. 키치와 인간〉. Web. Accessed on 3 Jul 2025. (니체의 《도덕의 계보》,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접점) https://stevenoh0908.pe.kr/blog/essays/사유-52-키치와-인간.
-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 #10 ~ #17. (지금까지의 철학적 여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0. 2024. 9. 8. ~ 2024. 9. 19.〉.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0-2024-9-8-2024-9-19.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 2024. 12. 21. ~ 2025. 1. 10.〉.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1-2024-12-21-2025-1-10.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 2025. 1. 12. ~ 2025. 1. 31.〉.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2-2025-1-12-2025-1-31.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3. 2025. 2. 4. ~ 2024. 2. 25.〉.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3-2025-2-4-2025-2-25.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4. 2025. 3. 1. ~ 2025. 3. 4.〉.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4-2025-3-1-2025-3-4.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5. 2025. 3. 10. ~ 2025. 3. 31.〉.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5-2025-3-10-2025-3-31.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6. 2025. 4. 1. ~ 2025. 4. 22.〉. Web. Accessed on 3 Jul 2025.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6-2025-4-1-2025-4-22.
부록 I. 김화영, 《시지프 신화: 작품 해설》 중 〈『시지프 신화』의 구조〉 전문
부록 II. 김애란 – 알베르 카뮈 –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관계
이하에는 6월,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과 7월의 모임의 양 축: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음악을 이어주는 연결점에 대해 쓴 제 글을 첨부해둡니다.
Abstract
김애란의 《비행운》, 피아졸라의 탱고, 그리고 카뮈의 철학. 이 셋은 ‘혼재되어 있는 것을 애써 분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모습들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나는 비행(非幸) 속에서도 비행(飛行)을 꿈꾸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했다가, 장면을 바꾸어 시지프스 신화를 떠올려본다. 이 전환을 포착해 글로 남기는 것, 그것이 내가 〈부조리〉라는 카뮈의 주제에 대해 남기는 대답이다.
#1.
기말까지 어찌저찌 끝내고 마지막 수업까지 마친 오늘, 방학을 맞이한 나는 연구실에 나가는 생활로 돌아가기 전 중단되었던 독서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6월 독서 모임의 선정 도서인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이 그 첫 타자(他者)였는데, 읽기 시작한 지 대략 일주일이 지난 지금, 3월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때 발휘된 날카로운 정신이 다시금 돌아오는 것 같다. 오랜만에 문학 작품을 읽으니 학기 중의 과제와 강의 정리 속에서 누적된 피로로 인해 몽롱해졌던 정신이 다시금 조각(雕刻)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정신의 뿌리에 자리한 저 문장들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톨스토이가 던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터,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삶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부조리〉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와 같은. 나는 지난 한 학기 동안 졸업을 위해 들어야 했던 컴퓨터공학 전공 강의 외에도 교양 강의로써 〈불교 철학의 이해〉도 수강했는데, 청강으로 들었음에도 나에게 또 하나의 철학적 이정표로 기억될 이 기념비적인 강좌를 회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니체와 부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더욱 정교하게 보고 싶어서, 《도덕의 계보》 등을 옮긴 박찬국 교수가 왜 불교철학과 니체의 철학을 한데 묶어 논문을 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듣게 된 강의였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당초의 목적보다도 더욱 귀중하고 많은 것들을 배운 것 같다. 부처와 니체는 모두 삶의 〈공허함〉, 그러니까 고정된 것이 없기에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세계를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그 철학이 모두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토양 위에서도 주체적이고 의욕적인 삶과 철학함을 논한 니체와는 달리 부처는 삶 자체에 적대적이었다는 차이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외에도, 교수자와의 문답을 통해 삶 자체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 강의 이후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텅 비어버린 강의실에서 교수자에게 강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불교 철학의 서양 철학과의 연결점, 계보적 연구 방법 등에 관해 정말 수많은 질문을 했다. 특히 교수자가 전공한 분야가 아직 국내에는 제대로 개척되지도 않았으며 이제 태동하기 시작한 분야 ― 인도의 논리학 지성 전통인 〈쁘라마나(Pramāṇa) 전통〉 쪽이라는 사실이 나 자신의 특유한 호기심을 격렬하게 자극했고 그 결과 내 질문은 어느덧 수업 내용을 넘어 인식론과 언어 철학, 삶과 세계의 본질 쪽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교수자는 내가 청강생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면서까지 아직 풋풋하고 경험이 적은 학생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던 시절의 고통, 독일 유학에서 견뎌야 했던 차별과 무시의 경험들을 담담하게, 숨기지 않고 풀어내는 그의 모습. 나는 교수자와의 문답에서 하나의 태도를, 그가 고백한 삶의 수많은 고통과 후회에도 불구하고 불꽃에 이끌려 영화 《어라이벌(Arrival)》의 주인공 언어학자처럼 기꺼이 다시 한 번 똑같이 같은 삶을 살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진담어린 태도로부터 니체의 연장선을 보았다. 국내에서 인정받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솔직하게 고백하는 열정어린 선생님과의 즐거운 14회짜리 대화편. 비트겐슈타인부터 헤겔, 칸트, 라캉, 프로이트,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의 영역을 가로지른, 솔직하고도 열린 어스름한 저녁의 대화는 내가 던져왔던 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눈 앞에서 실천으로 펼쳐진 삶의 한 장(場)이었다.
이공계열의 두 분야(대기과학, 컴퓨터공학)를 전공하면서도 철학과 문학 등 인문계열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버리지 않는 나, 욕심많은 인간인 나는 이 지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의 통념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인문학의 시대는 저물었으며 우리의 역량은 과학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수과학적 소양을 배양하여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 과제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철이 없는 나는 이러한 모토 아래에서 가려지는 것을 보고 만다. 어떻게 하면 기술을 발빠르게 습득하고 그것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응용하는 자를 길러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구도가, 존재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삶에 대한 질문들을 열린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과 논의할 수 있는 자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모르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것, 이 〈부조리〉를 나는 피하지 않고자 한다. 그렇기에 나는 낮에는 수치모델 연구실에서 두 전공에 대한 두 개의 졸업 연구들을 수행해야 한다는 시간적 압박에 시달리더라도 밤마다 독서와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심산이다. 내가 여전히 인문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간명하다. 단 한 번 뿐인 내 삶에 있어 저 질문들, 인간의 뿌리를 묻는 저 물음들에 대답하지 않고 죽기에는 살아가는 날들이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것. 나는 바로 이 불꽃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내 안에서 꿈틀대는 철학이 속삭이는 바, 끝까지 포기하지 말지어다는 저 문장을 따라가고 있다.
#2.
어제 절반까지 다 읽은 김애란의 《비행운》에 대한 서평을 거의 하루종일, 사실상 연구실에 나가 졸업연구 준비를 진행한 저녁 동안만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작성했다.
학기 중에는 글을 쓰고 읽기를 게을리하다가 지난 3월에 읽은 《노르웨이의 숲》 이후 3개월만의 서평 쓰기인지라 필력이 녹슬어 글이 잘 써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하루가 모두 가기 전에는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걱정했던 것은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해부칼처럼 예리하게 구조를 해체하는 문장들을 쓰는 문제였다. 글 전체를 궤뚫는 주제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문학 특유의 감정선이 묻어나오는 문체를, 나아가서는 아예 밀란 쿤데라나 알베르 카뮈처럼 주제 의식과 문체 자체가 완전히 일치하는 글쓰기가 퇴보했을까 노심초사했다. 4월에 그랬던 것처럼 문장들을 몇 적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 그러니까 며칠을 넘겨가며 수정을 거듭해야 완성할 것 같다는 당초의 직감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을 때 천만다행이라 느낀 것은 이러한 배경 위에 있다. 아무래도 다른 문제에 집중했다고 생각한 지난 몇 개월이, 오히려 내부의 문장들을 갈고 닦아 준 느낌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독서 노트에서 이야기하겠지만《비행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총 8개의 단편이 실렸으니 절반 읽은 지금은 앞의 4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 〈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까지 읽은 것이다. 현 시점의 판단으로는 맨 처음에 실린 〈너의 여름은 어떠니〉를 제외한다면 괜찮은 편이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처럼 인생에 깊이 남을 정도의 명작까지는 솔직히 못 되지만 읽고 분석해서 좋은 교훈 내지는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수작이라 평하고 싶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를 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구성에서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편소설은 소설집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혼재되어 있는 죽음과 삶’, 그리고 ‘그 혼재된 삶과 죽음이 명확히 구분된다고 생각하고 죽음으로부터 비상(飛上)하려는 인간’을 담아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장면 전환의 타이밍에 대해서는 시의적절하다기보다는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소재의 경우 너무 식상한 대학 커플이라던가 어릴 때의 추억 회상 등등이었기에 별로 흥미롭지 못했다. 전개 또한 극적이라거나 독창적이라기보다는 다른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이한 정도여서, 다음 단편소설로 넘어갈 때 기억나는 문장이나 대목이 하나도 없었다. 졸작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잘 쓰인 소설임은 틀림없지만 소설집에 함께 실려서 내가 읽게 된 나머지 세 편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세 편: 〈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소설에 대해 내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겪어온 삶과 철학들의 궤적 위에서 던지게 했다. 여전히 내가 이 의문을 곱씹어보며 그 대답을 갈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 소설이 인간의 본질을 궤뚫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소설은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삶의 측면들을 보는 것인가?”
#3.
탱고(Tango).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뱃사람들과 항구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가난한 바닷가 도시에서 탄생한 음악. 노동자 계층의 음악으로 시작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지구 반대편의 나 자신도 알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세계화된 장르. 탱고 음악의 이 같은 보편화 내지는 전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필시 아스트로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일 것이다. 클래식의 부드러움 · 섬세함과 탱고의 예측불허성 · 정열을 오가는데 능수능란했던, 〈누에보 탱고(Nuevo Tango)〉의 개척자 말이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 용감히 나선 첫 항해에서 지도에 아직 없는 지평선을 열어젖히는 인물. 기성의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후배가 며칠 전에 제안한 피아졸라 연주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곡이 그려내는 정경과 시나브로 파고드는 긴장감 덕에 가장 좋아하는 곡인 ‘Estaciones Porteñas: Invierno Porteño’가 셋리스트에 들어가 있었고, 그 외에도 나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확장시켜 준 피아졸라의 곡들이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씨의 선율로 현현하는 것이었으니까.
오늘 저녁에 두 시간 동안 피아졸라의 곡들에 푹 빠지고 났더니, 나는 탱고가 어떤 음악인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탱고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음악적 특징들을 가지는지와 같은 일반적 논의 말고.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탱고의 미덕, 그러니까 탱고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다.
개인적으로 나는 탱고가 우리 자신의 삶에 가장 가까운,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장 큰 연유는 여타의 장르와는 다르게 탱고 음악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그것이 거칠고 불규칙적으로 굴러 떨어질 때라는 점에 있다. 부드럽게 음계를 하강시켜 내려앉는 클래식이나 재즈 등과는 달리, 탱고는 특유한 당김박과 강세에서 선율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추락한다. 거칠게 떨어지는 선율은 보통 연주에서 미적 흠결로 간주되곤 하지만, 탱고의 경우 그 추락이 음악의 진가를 구성하는 것만 같다.
선율의 하강의 측면에서 본 탱고의 이같은 특성은 또 하나의 시각에서 새롭게 고찰해볼 수 있다. 탱고 연주에 빠지면 섭섭한 주요 악기라 할 반도네온을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고려한다면, 탱고의 추락은 우리의 삶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아코디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쪽에 건반 대신 버튼들이, 양쪽 도합 총 71개의 버튼들이 달려 있는 반도네온. 반도네온으로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이 수많은 양쪽의 버튼들을 알맞은 타이밍에 정확하게 눌러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미묘한 소리를 내기 위해 몸 전체를 비틀어가며 악기를 뒤틀어 소리를 내야 한다. 반도네오니스트는 강세를 조절하기 위해 때로는 급작스럽게, 때로는 부드럽게 몸을 접거나 펼쳐서 음조를 흩뿌린다. 긴장과 완화를 매우 격렬하게 오가는 신들린 듯한 연주, 그리고 악기가 뿜어내는 특유의 구슬픈 사운드를 회상하면, 나는 선율이 추락하는 장면 속에서 마치 반도네온이 비탄에 잠겨 온몸을 뒤트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인상에 잠기노라면 나는 마치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이 울부짖는 장면을 떠올리고, 이 인간이란 다름 아닌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썼던 대로 ‘합리를 바라지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서 닥쳐오는 세계의 비합리성’ 속에 끊임없이 잠겨 들어가는 한 인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겹쳐지는 장면들이 탱고가 가장 삶의 뿌리를 건드리는 음악이라 주장할 수 있는 핵심 근거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탱고가 추락만이 아름다운 음악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다. 탱고는 다시 한 번 상승한다. 하강 이후 상승은 오르내리는 선율로 무장한 음악에서 기본적인 것이긴 하지만, 탱고의 추락이 위 같은 인상을 주는 이상 나에게 탱고의 상승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인간 찬가로 느껴진다. 반도네온은 추락의 여명 이후에도 다시 한 번 비행(飛行)을 꿈꾼다. 비행(非幸) 속에서도, 곧이어 또 다른 추락이 있음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또 한 번의 도약을 시도한다. 나는 《시지프 신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지프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처음으로 굴러떨어진 돌을 다시 한 번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우상이 무너진 세계에서 주체성을 의욕하는 니체의 초인. 나는 이 모든 철학들을 이어주는 아교로써 탱고가, 탱고의 추락이,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본다.
#Appendix.
독서 노트 1: 제1회차 독서 모임 – “시지프 신화를 시작하며: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 184.
I. 저자 카뮈가 제4부: 〈시지프 신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
- 카뮈는 시지프를 ‘부조리한 영웅’이라 정의내린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계속해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밀어올려야 하는 그의 운명뿐만은 아니다. 그는 무의미해보이는 반복보다는 그 결말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의 태도를 강조한다.
- 시지프 신화는 그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한 반복이 인간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하나의 메타포로 간주될 수 있어 보인다. “신들은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유 있는 생각이었다.”(179쪽)고 쓰고 있으니, 카뮈 또한 이 해석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문장이라 하더라도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지,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이 어떤 이야기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빙하는지에 따라 의미 부여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행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상징들을 빌려 하나의 인간적인 운명을 그려낸다. 그는 시지프에게 도망치지 않고 반항하는 부조리한 인간이라는 현대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따라서 이야기는 더 이상 무의미한 반복만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 우리는 카뮈가 묘사하는 시지프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카뮈는 그가 지옥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 한 문단을 할애하고 있다. 시지프는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듯한 돌들과 바다의 맛을 보자” “지옥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고, “수차례에 걸친 소환, 분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181쪽)고 쓴다.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양껏 누리는 이 세계, 삶으로부터의 영원한 작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옥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시지프의 모습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심리를 생각나게 한다. 내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느 시점을 상상하는 것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당혹스러움을 넘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미약한 박동마저 중지해버리는 어느 순간 이후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세계와 나의 영원한 단절,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장면들, 행동들로부터의 영원한 단절이 있을 뿐임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되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선고받은 시지프는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를 수밖에 없다. 이 맥락에서 시지프는 태초부터 원하지 않는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 인간의 실존적 반항에 대한 표상이다.
- 시지프가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다음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란 그가 받는 형벌이 된다. 시지프에게 명령된 저 운명, 계속 굴러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밀어올려야 하는 저 형벌은 무엇에 상응하는가? 카뮈의 출발점은 시지프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휴지의 순간이지만, 우리의 출발점은 굴러떨어지는 바위가 되어야 한다.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181쪽),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181-182쪽)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바위를 바라보는 시지프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위와 얼굴을 맞대며 흘린 땀들과 그 손에 잡힌 물집들은 공허로 떨어진다. 그 모든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이 없다는 관찰, 다시 한 번 내려가서 바위를 밀어올리더라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리라는 직감이 작동하는 하강의 순간. 차라리 그의 정신이 마비되었더라면,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물러남의 순간을 가지지 못하고서 단지 습관적으로 바위를 밀어올리기만 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182쪽) 내리막과 영원토록 반복될 운명을 인식하는 인간에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방인으로 존재할 것이며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일순간에 모래뻘처럼 흘러내려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직감은 실로 치명적이다.
- 그러나 카뮈는 이 바위를 뒤따라 내려가는 시지프를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182쪽)고 말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이 형벌의 존재를 정확하게 아는 그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182쪽) 그리고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 (182-183쪽)시킨다. 바위를 밀어올리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무의미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지프는 그가 이 운명을 직시하는 순간부터 비탄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이 세상에 비끄러매 놓는 유일한 끈은 한 처녀의 싱싱한 손이라는 것을 안다.”(183쪽)고 카뮈는 쓴다. 이 지점의 인식은 산정에서 시지프가 다시 한 번 바위를 밀어올릴 자신을 상상하는 순간과 맞닿아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죽음을 경험한 그에게 도피는 선택지에 없다. 이미 수없이 되풀이된 경험으로 그는 단 하나의 비약적 명제를 스스로에게 제시하여,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알고 있다. 이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뒤에 시지프는 그에게 유일한 길, 그의 운명과 마주하는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카뮈의 말대로 “세계는 오직 하나뿐”(184쪽)임을 알고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184쪽)이라는 점을 아는 시지프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의한다.
- 이제 우리는 카뮈의 서술을 따라 비탈길을 걸어내려가는 시지프를 다시 한 번 상상해본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울까, 가벼울까? 허탈함과 공허함이 한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지옥을 아는 우리는 한때 그 발걸음의 무게가 시지프가 들어올려야 하는 바위만큼이나 무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뮈는 다른 가능성을 논한다. 운명에 대한 수용이 패배라기보다는 용기있는 저항의 결의일 수도 있다는 재해석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는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185쪽)고 쓴다. 시지프의 운명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그는 또 한 번 바위를 밀어올리는 작업에 착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단 하나의 확실한 인식, 그가 영원토록 반복해야 할 저 운명에 대한 미적인 인식이 전환된 이 순간 모든 것은 제자리로 되돌아감에도 불구하고 해석만큼은 그렇지 않다.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184쪽) 이 문장을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II. 중심 질문들에 대한 입장과 그 설명
II.1. 중심 질문 V.1.1.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
-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이 질문에 대해 가능한 대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것이다. 첫째로는 이 물음이 일상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복기할 때 자연스럽게 세우게 되는 가설인 “그가 이 질문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가 가능할 것이고, 둘째로는 “사형을 선고받았음을 알게 된 그가 애써 눈을 돌리기를 선택했기 때문에”가, 그리고 가장 드문 마지막은 “그가 자신의 운명과 끝까지 대결할 것을 결의하였기 때문에”가 가능할 것이다.
- 가장 첫째의 경우에 대해서는 ‘습관’에 대한 카뮈의 지적을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다. 임계점에 이르지 않은 정신은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29쪽)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 우리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아무런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서 행동하기 마련이다. 좌절감과 무력감을 안겨주는 어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우리는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왜 취업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왜 이런저런 자격증을 따야 하며 자산 형성에 전전긍긍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관심이 가닿지 않은 영역에 대해 질문은 봉쇄되기 마련이며, 그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지평선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논의조차 불가능하다. 만약 〈자살〉이라는 주제와 그 주제가 위치한 광활한 평야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의 마지막 운명은 실로 그의 인식이 유지되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후자의 두 경우라고 해야 하겠다. 우선 두 번째부터 검토해보자.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인식해버린 영혼에게 있어 〈자살〉은 생각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칠 수 없는 깊숙한 하나의 우물이다. 이 우물은 마치 개미지옥과도 같아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버둥거릴수록 그는 더욱 깊숙히 빨려들 따름이다. 하기사 살아 있는 동안 하는 모든 일들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자기 자신이 없는 경우에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의문이 인간을 붙잡는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기에, 그리고 이 손아귀가 한 인간의 눈으로부터 세계의 다채로운 색상을 빼앗는 능력은 너무나도 탁월하기에 회색빛 세계 속에서 인간은 푸르름을 잃어버린 초목들과 마찬가지로 시들어버리고 만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정신에게 저 질문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극심한 간극 속에서 그는 선택해야 한다.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믿을 것인지. 그러나 인간이 그의 세계에 대해 가지는 애착은 끔찍하리만치 강력한 것이어서 첫 번째 결론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하게 되는데, “부자들의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 위에 세워졌다”는 빅토르 위고의 문장이 함의하는 제2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고통, 잔인함, 추함, 더러움이라는 그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밝은 빛만을 갈구하는 것이다. 어두운 것에 익숙해지면 더 어두운 것으로 빨려들어간다고 믿기에, 그들은 최대한 밝은 빛 하나를 찾아 그것을 응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는 편을 선택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단 하나의 우상을 찾아 그것을 빛나게 닦아내어 그 광명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강력한 열망과 결합한 집착은 태양보다도 더 뜨겁고 강렬한 빛살들로 그림자들마저 덮기를 기도하는 법이고, 눈이 부신 인간은 그가 원했던 대로 빛무리에 기대어 죽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 마지막 경우, 카뮈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운명의 수용이 어떻게 하나의 승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얼핏 보기에는 그가 선고받은 사형을 인정하는 것이 그가 형 집행에 순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인간도 충분히 가능하다. 빛깔을 잃어버린 세계의 캔버스에 대해 자신만의 물감으로 색채를 되돌려주겠다는 열망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어오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 그가 건물을 세우는 것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지속될 몸부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그 소리에 매료될 수도 있다. 한 인간의 사형 선고가 저주에서부터 축복으로 변하는 위대한 정오 이후, 그림자와 빛 둘 모두가 그려내는 다양한 형체들이 아름답다는 저 사실을 인정하는 영혼이 가능하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 도달한 인간에게 있어 〈자살〉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 사형수로 살긴 하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사형수임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생을 만끽하고 또한 그가 인식하는 간극을 채우고자 하는 열망과 반항 속에서 살다가 떠나는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II.2. 중심 질문 V.1.2. 죽음과 나, 그리고 세계
- 모든 질문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기 전에, 궁금해했을 질문의 의도부터 밝히는 편이 낫겠다. 내 문제 의식은 6월 《비행운》에 대한 1차 독서 노트에 실린 다음의 대목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어떤 곳이든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나아가 어떤 생명도 결코 ‘더러운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이 없다거나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애써 눈을 돌리는 도피를 선택하는 것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과 그것의 부패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저 항진명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자들도 육체적 관계를 탐닉한다거나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종종 보인다는 일상적인 관찰을 우리는 되짚어보아야 한다. 주인공은 ‘벌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했고 그것을 철저히 탄압했지만, 어떤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부분을 철저히 말살한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 일상적으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가? 대답은 ‘아니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상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규칙적인 활동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는 효능감에 휩싸여,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인식할 기회조차 거의 가지지 못한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TV와 신문에서는 작업 현장에서 사망한 인부들에 대해서, 폭발 사고니 화재 또는 익사니 하는 사건사고들로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나 떠들어대지 않던가. 그 모든 기사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하나의 가십거리요, 머나먼 누군가의 비극으로 소비될 뿐 그 일이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기사 그런 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에게는 걱정할 거리가 널리고도 널렸다. 조만간 닥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걱정해야 하고, 졸업한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경제 활동을 영위해야 할지,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선포한 비상계엄과 그 이후 격변한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만 해도 금세 뜨거워지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다.
- 그러나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29쪽) 어떤 사건이 도래하여 죽음과 우리 자신의 거리가 더 이상 멀다고 여길 수 없는 때가 찾아오면, 본원적인 공포감이 한 인간의 마음을 덮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저 고전적 삼단논법의 전제 중 하나가 더 이상 전제만이 아닌 하나의 실존적 무게가 되는 순간, 우리는 나의 죽음을 상상해버리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죽음을 경험해본 일이 없기에,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 이 모든 사유들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가장 끔찍한 무지에 대한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제어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저 잔인한 명제대로 자신에게 닥칠 저 운명에 대해 대비할 수조차 없고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니! 삶과의 단절이자 자신의 지속이 중단되는 이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봉쇄되었던 지평선을 뚫고서 의식이 활동을 개시하는 이 순간, 한 인간이 목격할 수 있었던 수많은 세계의 색깔들은 모조리 단 하나의 문제 의식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 어떠한 걱정과 질문도 소용이 없게 된다. “나는 반드시 죽게 된다. 이 운명은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조차 없다.”는 저 문장이 한 인간의 의식에 도래하는 순간 세계의 다만사와 미래에 대한 그 어떠한 논의도 그에게는 그저 뭐라 웅얼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 하나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죽음과 철학적 실존의 문제가 우선순위의 가장 위에 자리하기 시작한 지난 3년여 전부터 지금까지를 회상해보면 회색빛 먼지들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허우적댄 상처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떠올리게 되니까. 일상에서 장애를 겪기 시작하고 삶의 다채로움을 빼앗겨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한다. 우선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필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끝을 모르고 빨려들어가는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선고된 파멸은 그 기일이 더 당겨질 뿐이라는 것을 육체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문제를 봉쇄해버리는 편을 택할 수 있다. 조금만 깊이 따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허상임을 어렴풋이 짐작함에도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 결론이 옳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만들어낸 단 하나의 도약을 사용하여 비약하고, 수렁으로부터 탈출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고려하는 선택지는 바로 후자인데, 그 문제를 봉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음을 알기에 망설이다가 우물 속으로 더 깊이 빨려들어가는 쪽이 위대한 정오로 향하는 유일한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한 인간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혜택 중 많은 것들은 앞으로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고찰하면서 차차 밝혀질 것이기에, 여기에서는 부차적인,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부차적이지 않을 한 가지만을 논하기로 하자. 가장 큰 도움이라 할 인식은 이 죽음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닥칠 운명이라는 사실을 직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모든 인간은 사형수라는 이 인식이야말로 타인과 자신을 갈라두었던 저 ‘무대 장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심리적 간격을 줄여주는 유일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지적해왔듯이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상실’이다.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내가 이끌렸던 사람들에게는 나의 결여와 유사한 공백이 있었음을 재발견하게 된다. 외로웠던 나는 외로운 사람을 좋아했고, 세계와 나 자신의 까마득한 간극을 인식하는 나는 그 간극을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간직하는 자만의 눈빛이 있는 사람을 갈구했다. 같은 구멍을 공유하지 않는 인간에게 이해받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애초에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많은 좌절을 통해 체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운명에 처한 자, 자신과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는 자에게 눈길을 보내게 되고 그 사람의 내면과 생각, 주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원리가 이러한데, 만약 모든 타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을 운명에 처해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는 수많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모든 존재가 도망칠 수 없는 저 운명 위에서도 다채롭게 피어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관심이 한 번 마음속에서 피어나고 나면 그 다음은 겉잡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 이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타인을 진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 181.
- 2물론, 원 신화에서는 제대로 바위를 굴리지 않으면 모된 채찍질을 당한다는 장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영역이란 이 신화 자체가 아니고, 이 신화가 우리 자신의 삶과 가지는 동형성에 의해 야기되는 우리 스스로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바위를 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 질문들 중 가장 무겁고 오래된 질문이 다름 아닌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3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212-238.